고후 6:3-10(설교: 바울 사도의 보은의 삶)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9
  • 2025-07-30 00:47:54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먼저 【3】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하였다.
이 직책은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뜻하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μηδεμίαν ἐν μηδενὶ διδόντες προσκοπήν)는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아무에게도 걸려 넘어지는 원인이 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대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의 언행을 근거로 복음을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물론, 모든 교인들은 복음 선교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아야 한다. 모든 교인은 전도의 문을 막는 말이나 행동 대신에 복음에 합당한 언행을 해야 한다.
다음으로, 바울은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라고 하였다.
일꾼들(디아코노이, διάκονοι)은 3:6의 주석을 보라.
견디는 것은 1:6의 주석을 보라.
환난(틀리프세신, θλίψεσιν)은 1:4의 주석을 보라.
궁핍은 아낭카이스(ἀναγκαις)로서 ‘필요들’, ‘고난들’을 뜻한다. 특히, 핫지(C. Hodge)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여 처신해 나가야 할 바를 모른 채 억눌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곤란은 스테노코리아이스(στενοχωρίαις)로서 ‘큰 근심’, ‘비탄’, ‘큰 슬픔’, ‘빈곤’, ‘고뇌’, ‘재난’, ‘답답함’, ‘불안’ 등을 뜻한다(12:10, 롬 8:35). 핫지(C. Hodge)는 “서 있거나 돌아설 여유가 없어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경우를 말한다.”라고 설명하였다.
벵겔(J. A. Bengel)은 환난과 궁핍과 곤란을 일반적인 것들로, 다음 구절의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함을 구체적인 것들로,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자발적인 것들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5】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라고 하였다.
매맞음은 11:23-25과 사도행전 14:19, 16:22-23 등에도 기록되었다.
갇힘은 11:23과 사도행전 16:23(참조: 24:23, 28:16)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빌립보, 예루살렘, 가이사랴, 로마 등지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요란한 것은 아카타스타시아이스(ἀκαταστασίαις)로서 ‘혼란’, ‘뒤죽박죽’, ‘무질서’, ‘불안정’, ‘혼돈’, ‘동요’, ‘요란’, ‘소요’, ‘폭동’, ‘폭거’ 등을 뜻한다(12:20, 고전 14:33, 눅 21:9, 약 3:16).
바울은 비시디아의 안디옥(행 13:50), 루스드라(행 14:19), 빌립보(행 16:19-20), 데살로니가(행 17:5), 고린도(행 18:6), 에베소(행 19:29), 예루살렘(행 21:30) 등지에서 무리의 폭거로 인해 위험에 처하곤 하였다. 칼빈(J. Calvin)은 “복음의 사역자들은 힘닿는 데까지 화평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만, 또한 하늘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정도를 벗어남이 없이 담대하게 그 소동의 중심을 지나가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수고로움(엔 코포이스, ἐν κόποις)의 복수형 명사는 ‘엄청난 노력이 소요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힘과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용할 만큼 노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W. Barclay). 또한, 이 말은 운동선수들이 힘들여 훈련한다는 뜻도 있다}(빌 2:16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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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손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한 것(행 18:3)과 사도로서 복음을 위해 직접 일한 것(11:7, 23, 27, 살전 2:9)을 가리키는 것이다(E. H. Plumptre, H. C. Zahniser, R. V. G. Tasker). 물론, 후자가 주된 내용일 것이다. 실로 바울은 사적인 일과 사도적 사명 수행에 온힘을 다 쏟았다.
자지 못함은 뜬눈으로 밤을 새는 것을 뜻한다(11:27). 바울은 끊임없는 선교 여행과 자신(살후 3:8), 특히 교회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여러 번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하였다(행 20:31).
먹지 못함에 대해서는 (1) 종교적 금식이라는 설,① (2) 먹을 것이 없거나 먹을 시간이 없어서 굶은 것(11:27, 빌 4:12)이라는 설,② (3) 앞의 두 견해를 종합하는 설(A. Clarke, A. Barnes, H. C. Zahniser) 등이 있다.
바울이 끊임없는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에 적들로부터 줄기찬 핍박과 박해와 조롱을 당했다는 점과 교회들의 사정상 생활 대책을 요구할 수 있는 사도권을 유보한 채, 그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해야만 했다는 점과 능력 있는 복음 선교를 위한 금식 기도가 필요했다는 점 등을 보아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많이 견뎌야 했던 아홉 가지의 외적 고난을 열거한 바울은, 이제 그러한 고난에 대한 자신의 내적 자세인 여덟 가지의 미덕을 열거하고 있다.
먼저, 그는 【6】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라고 하였다.
이 구절 이하의 은사들은 고난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자천의 근거이다.
깨끗함은 하그노테티(ἁγνότητι)로서 “11:3에 한 번 더 언급될 뿐이고, 그 밖의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이 낱말은 의식과 감정에 있어서 순결한 생활과 인간으로 하여금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유지하도록 하는 고결한 정신을 의미한다”(A. Plummer). 핫지(C. Hodge)는 “단순히 부도덕한 행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동기가 일관성 있고 청렴한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였고, 파러(F. W. Farrar)는 “단지 순결이나 정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순결을 의미한다(4:2, 요일 3:3, 살전 2:10).”라고 설명하였다.
지식(그노세이, γνώσει)은 2:14의 “아는”의 주석을 보라.
오래 참음은 마크로튀미아(μακροθυμίᾳ)로서 근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사람에 대하여 매우 참을성이 강하여 불쾌하거나 심술궂거나 잔인한 대우에 대해 고통을 느끼지 않고, 가르칠 수도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고, 미련한 것에 대해 성내지 않고, 미움에 대해 사랑이 결코 변질되지 않는 특성을 가진 마음과 생각이다. 마크로튀미아는 사람에 대한 인내심과 신뢰와 희망을 결단코 잃지 않는 정신이다.”라고 설명하였다}(골 1:1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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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Calvin, “Meyer”(in 이상근), E. H. Plumptre, R. V. G. Tasker, M. J. Harris, C. Hodge, “Muller-Bardoff”(in V. P. Furnish, p. 344), AV.
2) J. Wesley, A. Plummer, F. W. Farrar, “Bernard”(in 이상근), R. C. H. Lenski, C. K. Barett, F. G. Carver, F. V. Filson, H. J. Foster, p. 511, W. Barclay, P. E. Hughes, N. Hillyer, V. P. Furnish, p. 344, 박윤선, 이상호, 전경연, 이상근, RSV, N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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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크로튀미아는 인간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신적 속성이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고후 6:6, 갈 5:22, 엡 4:2, 골 3:12, 13, 딤후 4:2)와 마찬가지로 하나님(2:4, 9:22)과 그리스도께(1:16) 돌려진다.
자비함은 크레스토테티(χρηστότητι)로서 ‘인자’(롬 2:4), ‘자비’(엡 2:7), ‘탁월’, ‘선’, ‘유용’, ‘정직’, ‘친절’을 의미한다(롬 3:12, 갈 5:22, 골 3:12, 딛 3:4). 또한, 이 낱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온화하고 부드럽고 관대한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리(A. Barry)는 “상냥한 성품”으로 규정하고 있다}(골 3:12의 주석).
성령의 감화(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의 정확한 번역은 ‘거룩한 영으로’, 또는 ‘거룩한 영 안에서’이다.
이 말에 대해서는 (1) 인간의 거룩한 영, 또는 인간의 영의 거룩함이라는 설(C. K. Barett, A. Plummer, P. E. Hughes), (2) 하나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라는 설,③ (3) 환유법으로 보아 신령한 은사들이나(J. Calvin, M. J. Harris, F. W. Farrar) 성령이 주신 재능의 은사들(Allo)④이라는 설, (4) 성령의 감화라는 설(박윤선, 이상근) 등이 있다.
(1)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된 이유로 도덕적 속성의 목록 중에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프니쉬(V. P. Furnish, p. 345)는 “하나님의 성령과 사랑의 결합은 전적으로 바울적이다(롬 5:5, 15:30, 갈 5:22, 빌 2:1-2).”라고 반대하면서 성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도덕적 속성들은 자연인으로서의 도덕적 속성이 아니라, 신령한 자(고전 2:15, 3:1, 15:46)로서의 도덕적 속성인 성령의 은사(고전 12장)나 성령의 열매(갈 5:22-24) 또는 성령의 감화로 인한 행위(12:18, 롬 8:4, 5, 13, 14, 15:18, 갈 5:16, 18, 25) 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1)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는 원문대로 성령으로 이해해도 되나, 전후 문맥상 환유법으로 해석하여 성령의 감화 및 그로 인한 행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짓이 없는 사랑(롬 12:9)의 거짓이 없는은, 아뉘포크리토(ἀνυποκρίτῳ)로서 ‘위선이 없는’, ‘진실된’을 의미한다.
사랑(아가페, ἀγάπη)은 2:4의 주석을 보라.
다음으로, 바울은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라고 하였다.
진리의 말씀(로고 알레테이아스, λόγῳ ἀληθείας)은 바울이 전한 복음(엡 1:13, 골 1:5, 딤후 2:15. 비교: 4:2, 갈 2:5, 14), 또는 화해의 말씀(5:19)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에베소서 1:13에는 진리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복음⑤만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참된 지식,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의 종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주며(막 1:1, 14-15, 롬 1:16, 고전 9:14, 엡 3:6 등), 또한 우리의 생에 있어서 취해야 할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마 16:24, 막 8:34, 눅 9:23, 요 13:15, 롬 8:29, 살전 1:6, 빌 3:10).}(엡 1:13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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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 Alford, J. A. Bengel, A. Barnes, C. R. Erdman, H. C. Zahniser, F. V. Filson, J. Reid F. G. Carver, V. P. Furnish, p. 345, 黑崎幸吉. 비교: A. Clarke와 C. Hodge는 ‘성령의 내재’로 이해한다.
4) in P. E. Hughes.
5) 복음은 천국의 복음(마 9:35), 하나님의 복음(롬 1:1), 하나님 나라의 복음(막 1:14),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롬 1:1, 9, 막 1:1), 평화의 복음(엡 6:15),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고후 4:4)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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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뒤나메이, δυνάμει: 1:8의 “힘”의 주석을 보라.) 안에 있어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아름다운 말이나 지혜가 아니라(고전 2:1, 4),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고전 2:4, 살전 1:5, 딤후 1:8, 살후 1:11). 이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자이었던 바울을 사도가 되게 하였고, 또 그의 사도직 수행을 위한 준비 과정과 수행 과정에 강력하게 나타났다(12:9). 바로 그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다(4:7, 고전 1:18, 2:5, 롬 1:16).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은유법: 10:4, 롬 6:13, 13:12, 엡 6:14, 사 59:17, 지혜서 5:18)의 의에 대해 인간의 의인 ‘올바름’, ‘정직’, ‘청렴’ 등을 뜻한다는 설⑥과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의인 ‘칭의’(3:9의 주석을 보라.)를 뜻한다는 설⑦이 있다. 그 말에 대한 바울의 주된 용법과 전후 문맥상 후자를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사도가 된 이후의 바울은 율법이나 도덕적인 의미의 의를 내세워 사도임을 자천하기는커녕, 그런 의미의 의인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에 대해서는 (1) 어느 쪽으로부터의 공격이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는 설(R. V. G. Tasker), (2) 고대에는 오른쪽을 행운의 방향으로 생각했고, 왼쪽은 악운의 방향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들어 번영할 때에나 곤경에 처할 때에나 그리스도인들이 휘둘러야만 할 의의 병기를 뜻한다는 설,⑧ (3) 양손에 칭의의 무기 곧 한 손엔 칼이나 창을 들고, 또 한 손엔 방패를 든 것을 뜻한다는 설⑨ 등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인 바울의 영적 싸움(엡 6:10-)⑩의 영적 무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대다수의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검”(엡 6:17)을 공격용 무기로 해석하고, “믿음의 방패”(엡 6:16)를 방어용 무기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⑪
바울은 선교 활동을 하다가 겪은 상반된 경험에 대해, 【8】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라고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하나님과 지지하는 교인들로부터는 영광(독세스, δόξης: 1:20의 주석을 보라.)을 얻었으나(갈 4:14, 빌 2:22-), 적들인 불신자들과 반대하는 교인들로부터는 치욕을 당하였다(고전 4:9-13, 살전 2:2, 행 14:5, 16:19. 참조: 11:23-33, 행 5:41). 그는 동일한 사실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다. 즉, 대적하는 불신자들과 반대하는 교인들로부터는 악평을 들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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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J. Calvin, M. Henry, A. Barnes, C. R. Erdman, J. Reid C. K. Barett, H. C. Zahniser, H. J. Foster, p. 511, 박윤선.
7) J. Wesley, E. H. Plumptre, H. Alford, F. J. Dake, A. Clarke, C. Hodge, D. R. Mitchell, R. V. G. Tasker, “Windisch”(in V. P. Furnish, p. 346), P. E. Hughes, W. Barclay, M. J. Harris, A. Plummer, V. P. Furnish, p. 346, “Turner”(in F. G. Carver), N. Hillyer, F. G. Carver, 黑崎幸吉, 이상호, 전경연, 이상근.
8) “Chrysostom, Theodoret, Theophylact, Herveius”(in P. E. Hughes), M. Henry, H. Alford.
9) J. Calvin, J. A. Bengel, A. Barnes, F. W. Farrar, H. C. Zahniser, F. V. Filson, W. Barclay, F. J. Dake, A. Plummer, C. K. Barett, N. Hillyer, V. P. Furnish, p. 346, 이상근.
10) 저자의 에베소서 6:10-의 주석을 보라.
11) A. Clarke, C. Hodge, F. G. Carver, M. J. Harris, R. V. G. Tasker, H. J. Foster, p. 511, E. H. Plumptre,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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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4, 16:20, 21, 17:13, 롬 8:3 등), 하나님과 지지하는 교인들로부터는 호평을 들었다. 대체로 전자는 바울과 그들이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있은 일을 지시하고, 후자는 바울이 없을 때에 그들이 바울에 대해 평한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속이는 자,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속거나 방황하게 하여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유혹자(마 27:63, 딤전 4:1, 요이 7) 같이 취급을 받았으나 실은 진실하였다(11:31, 롬 9:1, 갈 1:20). 그는 영원한 진리의 전달자였다.
바울에게는 항상 비난과 칭찬이 함께 따라다녔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악평과 호평, 비난과 칭찬이 함께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세상 평판이나 칭찬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이나 칭찬이다.
이어서 바울은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ὡς ἀγνοούμενοι, καὶ ἐπιγινωσκόμενοι)는 ‘알려져 있지 않은 자 같으나 잘 알려져 있는 자요’이다. 즉, 무시당한 자 같으나 인정받은 자라는 뜻이다. 실상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훌륭하고 야심만만한 젊은 바리새인으로서 적어도 동족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복음 전도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이 표현은 일반적인 면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사도로서 인정받지 못한 자 같으나(고전 9:1, 15:8-9) 하나님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갈 2:9) 그리고 적지 않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사도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5:11, 고전 13:12, 15:10, 갈 1:1, 2:7-9).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는, 바울이 복음 선교로 인한 위험과 극도의 고통 때문에 죽은 것 같았으나(1:8, 4:9-, 11:23-, 고전 15:30-, 행 14:19-)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다는 뜻이다.
보라(이두, ἰδοὺ)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주님 안에서 영생을 얻었으므로(요 3:36, 5:24, 롬 6:4-, 고후 5:17, 엡 2:1, 5), 설사 죽는다 해도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4:14, 5:1, 고전 15:54-, 딤후 4:6-, 요 3:16, 11:25-).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는, 시편 118:18의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를 연상하게 해 준다.
징계를 받는은 파이듀오메노이(παιδευόμενοι)로서 “성경에서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을 바로잡고 훈련하실 목적으로 가하는 징벌을 지시한다”(P. E. Hughes).
바울의 적들이나 반대자들은 선교 활동 중에 겪는 바울의 모든 고난을 그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여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죽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를 보다 더 큰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한 연단이었다(4:16, 히 12:12. 비교: 히 12:5, 6).
끝으로, 바울은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하였다.
근심하는(뤼푸메노이, λυπούμενοι)은 2:1의 “근심”의 주석을 보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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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며 근심하는 자 같으나 실은 항상 기뻐하고’로 이해할 수도 있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자이나 항상 기뻐하고’로 이해할 수도 있다. 바울이 실제로 근심한 적이 있으므로(2:1, 7:10, 11:28, 롬 9:2, 빌 2:27) 후자가 보다 더 적합하다.
바울에게는 그 모든 슬픔과 근심을 언제나 극복하게 해 주는 신령한 기쁨이 있었다(2:3의 “기쁨”의 주석을 보라). 그러므로 그는 교인들에게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하곤 하였다(빌 3:1, 4:4. 참조: 갈 5:22, 빌 2:18, 살전 5:16). 이 신령한 기쁨이 있는 사람은 모든 슬픔과 근심을 언제나 극복할 수 있다. 죽음의 슬픔과 근심조차도 영생의 기쁨으로 극복될 수 것이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는, 바울이 재물의 많고 적음을 보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가난한 자(빌 3:8) 같으나 실은 영적 부자로서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부유케 한다는 뜻이다(고전 1:4-, 엡 2:7-, 3:8. 참조: 약 2:5). 일반적으로 신령한 부가 재물의 복을 받는 길이므로(빌 4“19, 요삼 2), 물질적 부를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써 자신을 주님께 바쳤으므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롬 1:1, 고전 6:19-) 실은 만물의 주님께 속한 자로서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3:21-23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⑫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 같은 불신자는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실상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이다(딤전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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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자의 고린도전서 3:21-2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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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고린도후서(서울: 글벗사, 2002, 3판 1쇄), pp. 23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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