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평강의 길"

관리자
  • 2909
  • 2012-06-16 03:33:54
평강의 길
              로마서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아마존 강 유역에는 아직도 인디오들이, 문명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상태에서 겨우 햇빛이나 가리는 움막을 지어놓고 자연 상태에서 나무열매나 따먹고 짐승들이나 잡아먹으면서 사는데,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근처에 나타나면 즉시 피하고 숨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마존의 밀림이 그들의 생활 터전이고 보금자리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문명세계의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생활을 파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명세계는 그들에게는 아주 생소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환경에 따라서 평강을 주셨습니다.
  인디오들만의 평강을 문명세계 속에 옮겨진다면, 그들은 평강이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명세계 안에서 누리는 평강을, 미개인들 속에서는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평강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평강과는 감히 비교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미개인과 문명사회의 차이가 많은 것보다, 이 땅에 속한 삶과 하늘에 속한 삶은 차이가 더 크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평강을, 하늘에 속한 평강과 비교한다면, 초보단계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수단으로 얻어지는 평강이란 단시간 내의 짧은 순간밖에는 누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디에선가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발을 하면 한 시간이 행복하고, 새 옷을 입으면 하루가 행복하고, 새집을 지어 이사하면 한 달이 행복하고, 결혼을 하면 1년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얻어지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인간의 두뇌와 수단으로 행복을 창조하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주지도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평강이 아니라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삶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죽음의 굴레가 인간에게 씌워진 이후로 평강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은, 누가 쫓아오지 않아도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죄지은 사람은, 누가 책망하지 않아도 두려워합니다. 죄지은 사람은, 누가 정죄하지 않아도 걱정과 근심뿐입니다.

  이사야 48:22,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신 뒤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첫 번째 주시는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실 때마다 먼저 평강을 빌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배반하고, 범죄 한 인간들에게, 평강은 있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시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속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마치 독버섯의 아름다운 색깔에 속아서 독버섯을 먹듯이, 죄를 먹고 사망에 빠질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자업자득하여 얻은 고통과 번민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하신 것처럼 원망하고 불평들을 합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라고 하는 말은, 평강을 잃어버린 불행한 인간들의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신 상태는,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죄나 고통이나 저주나 죽음이란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 이후에 평강은 사라졌고,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으며, 남자에게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남자가 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것도, 일하는 대로 소득이 얻어진다면 보람이 있는 일이겠지만, 노력을 하는 것만큼 얻어지지 않을 때, 마음으로 받는 고통은 큰 것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도, 여간 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여 집사가 해산을 하는데, 견딜 수가 없어서 목사님을 불러서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집사님들 몇 사람들과 함께 사모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산모는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고통의 신음이 계속됩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 343장을 펴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산모가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울어도 못 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 하네”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옆에서 거들던 사모님이 산모에게, “힘써, 힘써”라고 권합니다.
  찬송은 계속됩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하고 부릅니다.
  사모님이 다시 산모에게 “참아, 참아”라고 말했습니다.
  찬송가가 또 계속됩니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찬송을 불렀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산모에게 사모님이 “믿습니다. 나올 줄을 믿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찬송이 다시 계속됩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하고 찬송을 부르는 순간, 그 때 “으앙!”하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평강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지경에 있는지 조차도 알지를 못하고, 평강을 찾는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강을 잃은 것도 알지 못하고, 또 찾는 길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교회는, 가난과 곤고와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알지 못하니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알아야 보충하고 채우고 변화합니다. 평강을 잃어버린 비참함과 곤고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6:16, 평강을 회복하는 길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라는 말은 평강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빛의 자녀들이 빛을 향하여 모여오고, 어둠의 자녀들은 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사람이 평강을 찾고, 평강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모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줍니다.
  역대상 22:9, 평강의 사람은 전하는 것도 평강을 전하고, 예레미야 6:16, 심령에 평강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결과 진노의 길이 있습니다.
  광야로 가는 길에서 물을 얻기 힘들고, 바다로 향하는 길에서 산맥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평강을 얻는 길로(눅 1:79) 나아가야 합니다.
  평강을 얻지 못할 길에서 평강을 구하는 것은, 구하여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겔 7:25). 평강을 얻는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 나침판과 십자가의 이정표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지식이나 경험이나 수단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원시림이 우거진 숲을 탐험하는 영화를 보면, 탐험하는 사람들은 안내자의 뒤만을 따라갈 때, 앞서가는 사람이 큰 칼을 들고 숲의 나뭇가지와 넝쿨들을 제거하며 전진하는 대로 어렵지 않게 뒤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모습과 비교해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악으로 욱어진 이 세상에서 모든 멸시와 조롱과 아픔과 수치와 부끄러움들을 성령의 검으로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가시는 길의 안내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담당하셨으니, 우리는 무조건 주님의 뒤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19).
  길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 곳에서도 평강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실패와 고난과 죽음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앞서 가시면서 이 모든 악과 고난과 슬픔과 괴로움을 담당하셨기에 예수님만 뒤따라가면 평강을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최후에는 십자가로 죽음을 담당하심으로 인류에게 오직 평강을 주실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나침판과 십자가의 이정표를 바라보고 천성 길을 따라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는, 평강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 가운데, 닭이나 오리는 본래 하늘을 마음대로 나르는 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사람들이 기르며 질을 들이게 되면서 이제는 하늘을 날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아예 하늘을 날아가려고 하는 생각도 하지를 않고 사람들에게 길들여져서 집에서 삽니다.
  지금도 날아가려고만 하면 가능한 날개를 달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오늘의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평강을 잃어버리고 잃은 평강을 체념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우리가 평강을 찾으려고만 하면 찾을 수도 있는데, 평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찾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의 원어는 에이레네(είρήνῃ)인데 평화, 혹은 평안으로도 번역합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모든 은사와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히브리어의 샬롬, 독일어의 하일(Heil)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어 우리의 모든 일들이 잘 되어 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평강의 객관적 마음 상태는, 만족과 행복감이 따르고, 평화와 안정이 언제나 함께 합니다. 하나님은 그 평강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인간들은 그 평강을 상실하고도 다시 회복할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 가치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골에 사는 사람이 부모님이 쓰시던 사기그릇과 사발들을 헛간에 버리고 놋그릇을 사서 사용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시장에서 가벼운 양은그릇들이 나옴으로 가볍고 파손될 염려가 없어서 양은그릇들을 다시 사서 사용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스테인레스 그릇들이 광채를 띠고 반짝거리는 것을 보자 스테인레스 그릇들을 사서 다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방문한 어느 사람이 헛간에 버려진 사기그릇들을 보고 싼값에 사갔습니다. 그는 그 그릇들이 이조백자, 청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골 사람은 그 그릇의 가치를 알지 못하여 모두 헐값에 팔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평강을 알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회복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들이 소유해야 할 길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범이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하룻강아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평강을 모르고 회복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평강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하나님도 없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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