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강: 금식과 새 종교(2:18-22) A

관리자
  • 2852
  • 2012-06-13 19:39:35
다. 금식 문제<2:18-22>

<비교: 마 9:14-17, 눅 5:33-39>

불트만(R. Bultmann)에 의하면, 이 단화는 19절 전반이 출발점을 이룬다고 한다.1) “교회 공동체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현실화되었을 때 18절b가 아포프테그마2)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J. Gnilka, p. 148). 18절a는 마가의 편집이다.

“19절 전반과 21절 이하는 예수의 말씀일 것이다. 그리고 소개는 교회에 의해서 공식화되었다. 이것은 그 문제가 예수께서 금식하지 않으시는 것에 관련되지 않고,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관련되는지를 설명해 준다”(E. Schweizer).

19절 후반과 20절의 제자들이 금식해야 할 때에 대한 전망이 나오는 것은 갑작스런 것이므로, 후대의 첨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절 후반을 마가 이후의 주해로 주장하거나―여러 사본들에 이 문구가 빠진 것은 복잡한 마가 본문을 간편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0절을 교회 공동체의 오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E. Schweizer). “오히려 마르코 이전 전승 단계의 이러한 전망 때문에 이 단화는 전승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J. Gnilka, p. 140).

마가도 “이 전승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두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의 대결이 있다. 한쪽은 금욕적으로 살고, 다른 쪽은 구원의 때의 기쁨 안에서 산다. 좀 후대에 교회 공동체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결이 뒤따른다. 지금은 상이한 금식의 관행이 문제된다. 그 밖에 예수의 공동체는 금식해야 할 새로운 동기를 지니고 있다”(J. Gnilka, p. 141).

이 단화는 논쟁의 성격을 지닌 아포프테그마로 보아야 한다. 마가는 이 기사를【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로 시작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R. Bultmann, op. cit., p. 19.
2) Ibid, p. 9. 사화(Geschichte)로 취급될 수도 있는 전승 부분, 즉 어떤 간단한 장면에서 파악되는 예수의 말씀이 핵심이 되고 있는 부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의 제자들 곧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2:15의 주석을 보라.)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형인 에산······네스튜온스(ἦσαν…νηστεύοντες)이므로, ‘금식하고 있었다’(RSV)로도, ‘금식하곤 하였다’(AV)로도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가 더 적합하다.

금식의 기원은 모호하지만, 엄격한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규칙적인 습관이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단 한 번, 즉 속죄일(유대의 7월 10일)에 의무적으로 금식하며 자신을 괴롭혀야만 하였다(레 16:1-34, 23:26-32, 민 29:7, 9-11, 사 58:5). 바로 이 날에 온 민족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즉 예언 시대의 말기에는 해마다 네 가지의 다른 금식을 행하였으며(슥 7:5, 8:19-: 4월, 5월, 7월, 10월의 금식), 이러한 전통은 1세기에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엄격한 유대인들 곧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의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W. Barclay) 금식하였다(참조: 눅 18:12).

“금식을 하는 일반적인 동기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속죄와 간구이었다”(J. Gnilka, p. 143). “금식은 경건과 헌신과 비탄의 표현이었으므로(삼상 31:13),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좋은 준비로 간주되었다”(C. F. D. Moule).

이러한 금식은 “종교적 실행의 표준이라 자처하던 바리새인들”(M. Henry)에게서 지극히 의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고, 또한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 되고 말았다”(E. P. Gould).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들은 자기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였다.

그란트(F. C. Grant)는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 동기를 스승의 죽음 때문인 것 같다고 하지만, 본문에는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그럴듯한 것은 “스승의 금욕주의와 고행을 따른 것이라는 추측”(E. P.Gould)과 “메시아 시대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W.W. Wessel)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스승에게서 배운 “왕국의 도래―특히 심판의 국면에서―를 재촉하기 위해 계획된 회개의 표현으로서 금식했을 것이다”(W. L. Lane).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무튼,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금식 행위는 같았으나, 그 정신은 달랐다는 점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구약성경의 교훈에 더 가깝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사야와 스가랴와 같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의와 사랑이 없는 금식은 참된 금식이 아니라고 선언했다는 점이다(사 58:6-7, 슥 7:1-10).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의 혹이는 막연한 질문자들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해 누가는 바리새인들이라고 암시하고(눅 9:33), 마태는 분명하게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마 9:14).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가 단순히 궁금증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및 제자들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을 미루어 양자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이상야릇한 표현이다. 마치 플라톤 학파 사람의 제자들이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들 자신이 서기관 또는 랍비들의 제자들이었다(E. P. Gould).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바리새인이었던 서기관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W. Hendriksen).

“위의 질문 내용은 가치 있는 종교 행위들을 수행하기 원하는 자들의 전형이다”(E. Schweizer). 그들의 도전적 질문의 요지는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다 율법 위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40일 동안 금식하셨고, 최후의 만찬에서도 금식하겠다고 맹세하셨다(눅 22:16, 18). 그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금식하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라고 가르치셨다(마 6:16-18. 참조: 행 13:2-3, 14:23).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이전 관리자 2012-06-13 목회자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
다음 관리자 2012-06-13 마가복음 70강: 세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10:32-34)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