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G. 아펜젤러 선교사는 일제에 암살(순교?) 당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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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3 09:00:00
【발굴자료】
H.G. 아펜젤러 선교사는 일제에 암살(순교?) 당했다.,,

한국독립협회, 고마청(철도청) 설립지원, 여순 만행폭로가 원인인 듯...
순교직전 아펜젤러 선교사는 안식년귀국, 미국정부(오하이오 콜럼버스시)로부터 한국철도(정동선교부내 고마청설치)와 오하이오 델라웨어 독립협회발행 델라웨어 독립신문(한글판)을 발행하도록 했고, 일제의 잔악한 동방침략전쟁(여순 학살사건)의 만행을 수집, 세계 언론에 폭로했다.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암살(暗殺 : 몰래 죽임) 당했다.
<사건개요 : 당시 신문보도를 중심으로>

가해선박(기소카와마루, 577톤, 선장 핫도리)

충돌 수 분전 경적을 울렸다.(당도했음을 알렸다) 구마카와마루는 기적도 울리지 않았다. 가해선박 기소카와마루와 피해선박 구마카와마루는 서로 껴안은 것 같이 충돌하였다. 가해선박 기소카와마루는 선수가 손상되었으나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선장 구로다는 피해 선박 구조를 외면하고 침몰여부 확인도 전에 가해선박으로 피신했다. 가해선박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각 1명이 익사하였다고 기록(대판상선 80년사)되었으나 대판매일신문 등 일본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 사실(가해선박의 익사자) 조차도 보도되지 않았다.(암살범 추정)

폐선 직전의 피해 선박(구마카와마루, 558톤, 선장 구로다)

오사카 제철소에서 만든 일본 최초의 강선(최고의 고물선박), 애초 스미다 카와마루(694톤)가 운행 할 것이나 수선 중으로 이배가 대선(?)으로 운행되었다(1902년 인천에서 694톤급 최신 강선을 수선했다?)

피해 사망자는 18명이 아닌 7명으로 전원 아펜젤러와 수행원

사망 한국인 14명 일본인 3명+선원 8명, 미국인 1명(일본인 사망자중 선원 8명 신상조사 필요) 선객 46명중 18명 사망, 28명은 무사했다. 사망자 18명은 선원 8명을 비롯 일본인 3명과 건강한 30-40대 미국인 1명(아펜젤러), 배재학당 조사 조성규, 김택규, 최기석 외 1, 정신여학생 등 2명 아펜젤러 수행원 7명이다.(일본인 사망자 사실여부 추적 중, 왜 아펜젤러와 수행원만 사망했나?) 한국인 사망자 14명일 경우 사망자 총수는 26명이어야 함.

피해선박의 화물과 이중 보험, 일본해상보험은 보상금 성격(?)

침몰선박은 해상보험으로 도쿄해상에 3600원, 일본해상에 8,730원. 침몰선박의 화물은 우편물 9개 외 화물은 주로 쌀 포대(?) 2,482개 사망자 보험금은 아펜젤러만 수령됐고 조성규, 김택규, 최기석 등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 사고 직후  인근에 있던 군함 출동

사고직후 인근에 있던 군함 사라카와마루(白川丸)가 쓰꾸시(구명정)와 함께 구조 활동을 했다. 구마카와마루가 침몰하자 조난자들은 사방에서 살려달라고 외쳤고 선장은 구명정 보트 하나를 내리는데 2~30분 걸렸다. 침몰 23분간 십수 명을 구조한 채 그쳤고 보트 4척은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구조군함은 3시간 동안 현장에 정박만(?)하고 있었다.(대판매일 1902년 6월 23일자 번역)

◆ 침몰직후 선원들은 객실 문을 잠근 후 탈주해.

“배가 기울며 객실 손님들이 구조를 요청하며 아우성을 치자 선원들은 객실 승강문을 잠가버렸다. 아펜젤러와 조성규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며 문을 잡고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문을 열지 못한 채 두분다 순교하셨다.” 조성규 선생의 자부 심상영 씨(인천 부흥초등학교 교장 역임) 기록.

순교직전 아펜젤러 선교사는 안식년(1900년) 귀국 미국정부(오하이오 콜럼버스 시)로부터 한국 철도(정동선교부내 고마청설치)와 오하이오 델라웨어 독립협회 발행 델라웨어 독립신문(한글판)을 발행하도록 했고 일제의 잔악한 동방 침략전쟁(여순 학살사건)의 만행을 수집 세계 언론에 폭로했다. 특히 아펜젤러는 스크랜톤 선교사와 함께 친일 하리스 감독(동경 주재)보다는 반일성향의 무어 감독(상해주재)편에서 일했고 당시 무어 감독은 그의 선교관활지(개성이북)가 아닌 경인지역 무지내교회 헌당식에 참석하는 등 미국과 앵글로 미션(영국공리회)이 지원하는 중흥회(중화회)를 한국에 심으려고 했다. 특히 무지내교회 인근의 남양만은 중국과 일본, 미국 모두가 점유하려고 했던 군사 요충지로 이 일대 토지를 아펜젤러, 스웨러, 스크랜튼 선교사가 감리교미션으로 대거 매입하고 있었다. 무어 감독이 지원한 중흥회(중화회)는 중화민국의 출발인 1911년 신해혁명의 원동력이 된다.

◆ 사망했다는 승무원은 보트로 어청도 피신, 인천으로 옮겨져.
◆ 일본인 사망자는 없다(?) 사망자 18명 중 일본인 승무원 8명, 암살자 관련 혐의자 3명을 밸 경우 실제 사망자는 7명.
◆ 일본인 사망자(3명), 고마쓰(메이지상사원), 시모무라(요코하마), 다카마스(히로시마) 생사여부 확인필요.
◆ 일본인 미리 피신한 선장 구로다 외 사망자로 보도된 승무원 7인은 구명보트에 옮겨서 그중 5명은 어청도에 상륙시켰고 다음날 아침 안개가 걷힌 후 출발 오전 11시 20분 인천항에 입항했다. 구마카와마루 선원은 인천 경이도조와 야마토조로 나누어 숙박토록했다.(선장과 선원은 죽지 않았음) 생존선원 외 일본인 생존자(대판매일보도) ① 사토우(구마모토현), ➁ 니시카와(오사카부), ➂ 미치야마(시가현), ➃모요토시(오이타현), ➄ 네노다니(인천), ➅ 호시노(오사카부), ➆ 야마모토(야마구치현) 이상 선원, 호시노마에도(시가현), 아베(오사카) 2명.

    * 사건기록(개요)

1) 선박 충돌 당시 일본의 기록

1896년 오사카 - 인천선이 개항되어 최초로 기소카와마루가 한달에 두 번 항해 하였다.(50年史) 구마카와마루는 오사카 제철소(현 自立조선주식회사)에서 만든 것으로 일본 최초의 강선(鋼船)이다.(위 책 80年史). 당시 오사카상선주식회사는 미쓰이 선박과 합병하여 현재는 주식회사 상선 마쓰이(三井)이다.(오사카시사편찬사) 수몰된 자는 14일자 보도엔 한국인 14명, 미국인 1명, 일본인 3명 등 18명과 선원 8명이나, 23일자 보도엔 한국인 7명(미국인 1명 포함), 일본인 3명, 선원 8명 등 18명이다.(한국은 선원 7명이나 일본신문에 8명의 명단이 나와 있다) 기소카와마루는 선수(船首)가 손상되었으나 운항에는 지장이 없었고 승객 중 한국인과 일본인 각 1명이 익사하였으나 두 사람 다 일본기록에는 명단이 없다. 한국에는 그 사실조차 보도되지 않았다.

스미다카와마루(694톤)가 운행할 것인데 수선 중으로 구마카와마루(558톤)가 대선(大船)으로 운행하였다. 전자는 기소카와마루보다도 19톤이나 무거워 정상적으로 운행했더라면 충돌을 하였더라도 피해가 없었을 뻔하였다. 충돌 사건이후 일본은 조사와 구조작업에 최선을 다하였다. 사건직후 군함 사라카와마루(白川구) 쓰쿠시, 가해선박 기소카와마루, 히노데마루가 현지에 갔으나 구조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구마카와마루 선장 구로다씨와 기소카와마루의 선장 핫도리씨는 선체를 구조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대판매일 1902년 6월 14일자)

두 선박은 같은 항로를 항로 하는데 조류가 매우 급하여 피할 여지가 없었으며 짙은 안개로 서로 껴안은 것 같이 충돌하였다. 조난자 중 미국인 아펜젤러와 그 종자(從者) 2명이 있었다. 침몰하물과 해상보험은 도쿄해상에 3,600원, 일본해상에 8,730원 들었다. 충돌 몇 분 전에 기소카와마루가 경적을 울렸으나 구마카와마루는 기적도 울리지 않았으니 주의를 게을리 한 것이다. 구마카와마루가 침몰하자 조난자는 사방에서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가해선박 기소카와마루 선장은 보트 하나를 내리는데 2~30분이 걸렸고 피해선박은 23분여 만에 완전 침몰했다. 피해선박선원 7명 만이 구조되었다. 4척의 보트는 본선에 매어 놓은 채였고 3시간 동안 현장에 정박만하고 있었다. 구마카와마루 선장 구로다는 충돌직후 침몰여부도 판명되지 않는 상태에서 기소카와마루로 옮겨 타 피신했다.(위 신문 6월 23일) 사건상보에 승선 인원, 화물 등 있음.

2) 선박 충돌 당시 한국의 기록

성서번역을 담당한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은 서울에서, 레이놀즈는 목포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 동안 각자 번역한 초안을 가지고 독회를 해야겠는데 레이놀즈는 오랫동안 목포를 떠날 수 없다고 하여 서울에 있는 번역위원들이 목포를 가기로 하였다. 언더우드와 게일은 예정대로 갔고 아펜젤러만 무지내교회 봉헌식 참석 당시의 사고로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되어 일주일 후인 6월 11일 가게 되었다.

그날 오후 11시 목포로 가던 오사카상선주식회사 구마카와마루와 목포에서 오던 기소카와마루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 곳은 인천에서 85마일(Korea Review), 깊이는 150피트(그리피스의 전기), 칠산 외양 어청도 근해(신학월보), 어청도 서북 2,3마일 지점(황성신문)이다. 조난상황은 구마카와마루는 충돌 23분여 만에 침몰하였고 선객은 46명 그중 28명은 무사하였고 배재학당장 아펜젤러와 조성규, 김택규, 최기석을 비롯하여 일등기관수, 선원 8명 등 18명이 익사하였다. 우편물 9개 화물 2,482개,(일본기록은 주로 쌀) 지폐 7천원도 함께 수몰되었다.(황성신문 1902년 6월 14일)

충돌의 원인과 책임(대판매일 연속보도)

* 충돌장소 : 조류가 험악하고 일정한 항로가 있다고 하지만 항로가 넓어 약간만 주의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 충돌 당일 기황 : 그날 밤은 천기가 천명하고 해상은 조용하여 멀어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생존자 증언)
* 충동 당시 상황 : 충돌 몇 분 전 기소카와마루가 기적을 울려 주의(접근)을 알렸고 두 선박은 서로 껴안듯이 부딪쳤다.

이 신문 보도로 보면 당시(밤 10시~11시)는 천명(天明) 해상은 조용했다. 짙은 안개로 식별불가능 상태는 다음날 새벽임.

* 암살범은 메이지(明治) 상사원 공작금(7천원 소지)과 승무원으로 위장 사건직후 8마일 지점 어청도로 피신 후 귀국 조치된 낭인들로(5명) 추정됨.

《본 자료는 재미 서동성 변호사가 일본 청산학원 아카이브를 방문 검색한 자료와 리진호 장로 저 “아펜젤러의 조난사건”을 토대로 작성하였음》

2012. 6. 13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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