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는 군림하는 자인가? 인도자인가?

관리자
  • 2839
  • 2012-06-16 03:37:59
목회자는 군림하는 자인가? 인도자인가?
  주일이 되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으려는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
  오늘은 목사님께서 어떤 말씀으로 은혜를 끼칠 것인가?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전하는 말씀에서 은혜 받고 기쁘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각오와 바람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에서 은혜로운 말씀이 외쳐지면 좋으련만 기대했던 대로 은혜로운 말씀이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책망과 저주의 말들만 들려진다면 교인들의 마음은 닫히고 기분만 상할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 곳이지 책망 받고 저주받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성경도 제대로 읽지를 않고 설교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인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폭언과 저주를 퍼붓고 설교도 아니고 설득도 아닌 독설만 외친다면 그것은 양떼를 이끄는 목회가 아니라 양떼를 죽이는 목살(牧殺)이며 영혼을 죽이는 짓이다.
  목회자가 설교준비에 등한히 하다보면 그런 망언들이나 퍼붓게 되는 것이다.

  교회강단은 목회자가 교인들을 향해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가 아니다.
  목회자 자신들도 다른 이들에게 그 같은 저주와 책망의 말을 듣는 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듣고 있겠는가?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대들고 극단적인 행동까지 저지를 지도 모른다.
  세상사에 시달리고 지친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 세상에서 흔히 듣는 시사평론이나 뉴스나 잡담과 저주의 말을 들으려고 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교회에서 설교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설교준비에 충실하면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모법적인 삶과 말씀에서 영적인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비결과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싶은 것이지 무작위로 퍼붓는 폭언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십일조 하라 안하면 저주 받는다” “주의 종에게 순종하고 잘 섬겨야 복 받는다.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식으로 위협이나 하고 책망이나 한다면 돈만 아는 목회자로 인식이 되고 교회는 부흥되기보다는 오히려 거부감만을 주고 영혼들을 죽이는 도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가 없냐? 다른 교회로 나가든지 저주받을 예수는 안 믿겠다!”고 하면서 낙심하는 교인들도 흔히 보게 된다.

  대형교회들을 보면 우연히 대형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희망의 은혜로운 말씀만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기복신앙으로 치우치는 것도 생각할 일이지만 나오지 않는 젖을 억지로 짜내려고 위협하고 폭언과 악담이나 하면 봉사하고 충성하려했던 교인들의 주머니까지 닫히게 만들 뿐이다.
  교인들이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와서 목회자들을 잘 섬기고 물질을 바쳐 목회자들을 대접해야 할 의무와 책임감은 없다.
  자신들이 영적으로 살고 구원 받기 위해 믿는 것이지 희생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연보하라고 설교하시지 않았고 자신만을 잘 섬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대접을 받기위해 일하시지도 않았다.
  양들에게 살진 꼴을 잘 먹이고 기쁘고 평안하게 하면 양들은 저절로 젖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이고 살찐 양이 될 것이다. 그러면 목자에게 많은 유익도 주고 목회자가 받는 보상도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양들을 편하게 해주고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며 좋은 꼴과 기름진 꼴을 먹일까?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해서 골라 먹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목회자의 본분이다.

  예수님이 책망하고 저주하신 것은 남을 속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짓는 자들에게 저주하고 책망하셨지 자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책망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감당치 못하는 자들에게 저주하시지 않았다.
  병든 자들을 찾아 치유하시고 가난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려운 중에도 연보하고 남을 섬기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본보기로 삼으셨다.
  삯군 목자는 보상을 받기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양의 젖만을 짜려고 나오지 않는 젖을 짜내려고 발악하고 신경질을 부리지만, 참 목자는 양떼들 앞에서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약한 양들을 돌보고 위로하며 병든 양들을 치유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싫증내고 떠나기를 바라는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오래 오래 계셔주세요”하는 목회자가 되어야지 “어디 빨리 떠나가지 않는가? 다른 목회자로 바꿔지면 좋을 텐데........” 하는 실증 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목회자가 먼저 주라! 목회자가 먼저 베풀어라! 양떼를 사랑하고 마음껏 축복하고 기쁘게 해주며 양들이 살찌도록 하라! 그러면 양들은 저절로 목회자를 사랑하게 되고 존경할 것이며 대접하기를 기뻐하고 다투어 봉사할 것이다.
  만약 목회자라고 해서 스스로 자신이 존경받고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너희도 이렇게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셨다.
  지도자일수록 낮은 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섬기고 겸손하게 낮추며 모범을 보이는 것이 높임을 받는 삶이며 대접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가면 중국인들에게는 모택동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모택동은 혁명을 일으켜 장개석 총통을 추방하고 중국을 통일한 일등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모택동이 혁명에 성공한 비결은 자신이 지도자이면서도 자기 부하들을 먼저 대접하고 잘 먹이고 섬기는 자세로 살았으며, 자신은 헐벗고 헐 먹으며 부하들은 따뜻한 방에서 자게하고 자신은 추운데서 웅크리고 잠을 잤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졸들은 모택동이야 말로 자신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지도자로 믿고 따랐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북한 김일성을 도와 남침을 하여 남북을 나누게 한 전쟁의 도발자이지만, 중국인들에게 모택동의 명성은 우상이나 되듯이 존경을 받는다.
  모택동은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 수하의 병졸들을 섬기고 높였을 때에 오히려 존경을 받았고 대접을 받았으며 생명 걸고 충성하여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회자들이 남을 섬길 줄은 모르고 자신이 무슨 존경받아야 할 신이나 된 것처럼 교인들에게 대접받으려만 하고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것인가?
  목회자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영생을 주며 구원하고 복주는 능력자는 아니지 않은가?
  목회자는 다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소개하는 사명자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도들에게 책망하고 저주하며 자신을 섬기며 대접하라고 외칠 수 있는가?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집고 넘어 가고자 한다.
  어느 평신도가 천국에 갔는데 예수님은 그냥 덤덤하게 맞이하셨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 왔다는 소식이 들리자 예수님은 신도신지 않고 맨발로 달려 나가 천국에 온 목사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평신도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다.
  “예수님 내가 천국에 입국했을 때에는 그러시지 않더니 목사님이 천국에 오시니 어찌 맨발로 신도신지 않고 반기시나요? 평신도와 목사님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 하셨다.
  “평신도들이야 천국에 입국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목사가 천국에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모처럼 목사하나가 천국에 왔는데 내가 어떻게 기쁨으로 반기지 않겠느냐?”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목사가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은 자리에 앉은 채로 덤덤하게 영접하시더니 평신도들이 천국에 갈 때마다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반갑게 맞이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간 목사가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예수님 왜 제가 천국에 왔을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지도 않더니 편신도가 오니까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영접하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얼굴을 정색하고 대답하시더라는 것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네가 내 자리에 앉으려고?.......”  이는 목회자들이 너무 높은 자리와 감투만 쓰려고 발악하는 것을 비꼬는 이야기이다.
  주인은 목자를 택할 때 양들을 사랑으로 잘 인도하고 먹이고 번식시키라고 사명을 준 것이지 양들을 때리고 저주하며 가혹시키라고 세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목회자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성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떼들을 잘 지도하고 사랑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지 가혹한 폭군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인심은 천심이라는 말도 있다. 성도들의 마음을 알아 겸손하고 친절하게 사랑으로 이끌어 간다면 중국의 모택동보다도 더 크게 인정받고 대접받으며 존경받는 목회자가 될 것이다.

이전 관리자 2012-06-16 로마서 "평강의 길"
다음 김정효 2012-06-16 불교계 정신교육 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