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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 박종천 제13대 감신총장 당선자께 드리는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들
관리자
- 3821
- 2012-06-15 05:50:21
필자가 감게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일정한 성찰과 고민이 수반될 수 밖에 없었다. 감리교단 공식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쓰는 글들은 누구나 감리교단 목회자나 평신도면 쓸 수 있는 공간임에는 정해져온 일정한 프레임으로 확립되었고, 임시감독회장선임 국면에서 갑자기 로그인이 되지 않으면 글을 읽을 수 없게 되면서, 적지않은 파장과 혼란과 협의와 항의와 의견개진 끝에 결국 감게는 재정향될 수 있었다.
필자의 위치는 감신에서 아주 애매하다. 누구는 계륵과 같다고 평하기도 하고, 누구는 일정한 자격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면서, 필자의 논지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 7년동안 감게에서 글을 써오면서, 200여명에 가까운 이메일 동지들이 확보되었다. 물론, 그분들의 메일이 모두 합당한 문제제기는 아니였다. 때로는 지켜보고 때로는 구체적인 팩트를 확인하기 위해서 무던히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당장 필자를 이용하려고 이메일을 날리고, 전화를 걸었던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들은 꼼수와 작당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는 이메일에 답신하지 못했다. 이런 필자의 위치때문에 계인목사님은 필자를 감게의 게슈타포가 아니가요? 하고 정체성에 대한 준엄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셨다.
그러나, 필자의 논지력과 입장표명이 일정한 반향이 있었던 것은, 필자는 절대 이해관계에 얽혀버려서 당당하게 글을 쓸 수 없는 실존으로 접어들게 되는 수순들에 대한 일정한 방패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정말 신뢰하고 존경할만한 목사님들이 언제든지 상의하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진정으로 필자 나름의 까다로운 기준으로 존경할 수 있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모든 문제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처신하다가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만4년을 채워가는 기감사태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 판사들이 왜? 소청하면 바로 바로 재판을 열지 않는 이유를 소송을 제기한 이들은 모른다.
격앙된 감정상태나 차분하지 못한 태도를 추수릴만한 시간의 성숙이 없게 되면, 최근 필자는 별로 내켜하지 않지만, 조선일보에서 해마다 술때문에 대한민국 가정경제가 감당해야 하는 척박한 실존에 대해서 특집씨리즈로 계속해서 제시하는 기획기사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렇게 간다.
약간의 잡설일 수 있지만, 필자가 만13년을 지켜보면서, 제13대 감신총장 당선자의 위치에 오른 박종천교수님에게 공개적으로 쉽지 않은 글을 써야만 하겠다고 판단했기에, 이 글을 쓴다.
필자가 기감사태가 터지고 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종종 필자는 <변선환의 저승사자>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1년 12월 3일에 입대해서, 포병 사격지휘병으로 28개월을 복무했다.
필자가, 입대하기 한달 전에, 엄청난 영혼의 갈증이 있었다. 신학적인 섬세한 이해나 성찰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서강대 독문과시절을 보내면서, 본회퍼의 저작들과 참여적 신학책들을 어느 정도 읽고 있던 상태였다. 군입대를 한달 앞두고, 필자는 강렬한 예수체험에 점점 더 목말라 가고 있었다. 논리나 이성이나 합리로 설명되는 그런 예수체험이 아니라, 내가 당사자가 되어서 예수체험을 하고 싶은 강렬한 바램이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주일저녁예배 찬양단의 일원으로 예배시작전에 찬양을 부르다가 도중에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서, 수원역으로 향하고 바로 열차에 올라탔다.
필자는 그때, 수원의 서점에서 구입한 박종천 교수의 <상생의 신학>을 들고 있었고, 올라탄 무궁화호 옆에 안경을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시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신 분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중민이론에 대해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그 책을 꽤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었다. 수원에서 천안즈음 내려갔을 때, 옆에 있던 그 분은 안경을 치켜올리시면서, 필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 자네? 어느 신학교 다니나?\"
\"예? 저는 신학생이 아닌데요?\"
\"그런데, 어떻게 그 <상생의 신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가?\"
그리고, 서강대 독문과 89학번으로 입학한 이야기와 한달 후에 군에 입대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리고 그분은 어떻게 <상생의 신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지를 물으셨다. 폭력적 투쟁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운동권선배들과 싸우는 것도 쉽지 않았고, 1990년 이학년이 되면서, <비폭력사상위원회>라는 간디의 비폭력이 결코 나약한 어설픈 운동방법으로 취급되어서 안된다고 확신한 입장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 교수의 중민이론에 공감을 느껴서 여기저기 책을 살펴 보다가 수원의 남문 앞의 서점에서 <상생의 신학>이라는 제목이 너무 맘에 들어서 읽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필자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으셔서, 여자친구가 있는가? 독일어를 얼만큼 잘하나? 이러 여러가지 질문을 계속해서 하셨다. 그리고, 필자가 감리교회의 주일학교사와 성가대원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이 분은 눈빛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필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독일어를 잘 서강대에서 연마하고, 입학하게 될 신학대학교는 당연히, 서울 서대문에 있는 감리교신학대학교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물론, 필자의 군생활 시절 소천하신 어머님은 필자가 대학진학을 할 때, 바로 감신에 입학해서 군목을 마치고 최대한 빨리 목사안수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다는 바램을 너무 자주 피력하셨기 때문에 감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설고등학교 일회졸업생들의 진학성적에 대한 담임선생의 부담과 모교회의 담임목사님과 필자의 아버님도 서강대 독문과진학을 원하셨기에 필자도 감신보다는 일반대에 더 마음이 끌렸던 여러가지 상황들이 진행되면서, 권사이신 어머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서강대는 참 좋은 학교지, 열심히 독일어 독일철학 공부하고 꼭 감신대학원에 진학하게나\"
그리고, 그 분은 익산역에서 하차하셨다. 필자는 광주행열차를 탔음으로 광주에서 하차해서 무등산 부근에 기도원에 가서, 절절히 부인할 수 없는 나만의 예수체험을 향해서 내려가게 되었다.
필자가 그분이 고 변선환 학장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의 안경때문이였다. 관리자 조병철목사님과 함께 찍혀 있는 고 변선환 학장님의 사진의 안경과 동일한 안경이였다.
그런데, 필자에게 군부대로 매주 보내졌던 새누리 교계진보적 신문에서는 감신대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매주 특집기사로 쏟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1992년 10월은 다미선교회의 당사자 목사가 감신출신이라는 것때문에도, 종교재판때문에도 도무지 해석불가능한 상황이 담겨져 있는 새누리신문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필자는 전역하고 서강대에 복학하고 김일성주석 조문정국에서 당시 서강대총장이였던 박홍신부와의 대립으로 결국은 여러가지 사건들이 동시에 얽히면서 제적을 당했다.
복학과 동시에 좀 일찍 결혼한 셈이되어서 연년생의 두딸들이 태어났고, 학원강사 오토바이 퀵서비스맨 소매우유배달부를 거쳐서 조그만 우유보급소를 마련하기까지 했지만, 당시는 IMF시절이였고, 도무지 천미리 우유를 배달하면 보통 일이천원 할인을 해줘도 4만원을 수금해야 하는 상황이였는 데, 결국은 4개월을 못버티고 우유회사 보증금을 다 날려먹고, 주저앉아버렸다. 2달동안 노숙생활을 하다가 당시 노숙자의 동사자급증문제로 긴급하게 서울시에서 고건서울시장 성공회대 이재정총장이 의기투합해서 설립된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가 주관하는 영등포 문래동의 구 방림방적 여공들 기숙사 건물로 노숙하는 분들을 감당하는 일명<자유의 집>의 생활지도원이 되었다.
그리고의 아픔은 생략하겠다.
그리고, 수능을 다시 준비하고, 감신 00학번 신학과생으로 11년 인생 후배들과 함께 같은 학번으로 감신을 적을 두게 되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필자는 입대 한달 전, 광주로 향한 열차에 탑승하고 옆자리에 계셨던 분이 고 변선환 학장님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절절한 소위 말하는 <메이크 센스>가 가능했던 것은, 00년 가을학기 <종교와 문학> 강의를 감당하셔던 용산의 푸른언덕의 필자의 스승을 만나고 나서였다.
학생회 친구들은 고 변선환 학장님을 아시아를 넘어선 전세계적 지평에서 위대한 신학자라고 집회 때마다 학생비상총회때마다 외쳤지만, 00년 입학했을 때의 감신의 분위기는 전국신학대학교평가에서 최고평가를 받았다는 말만 교수들이 되풀이했지, 고 변선환학장님에 대해서는 애써서, 침묵하고 피해가려는 분위기가 농후했다.
필자는 00년 가을학기에, <종교와 문학>수업을 감당한 용산의 푸른언덕의 스승의 강의뿐만이 아니라, <인류종교의 이해>라는 이정배 교수의 필수과목도 수강하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 환경이 압도적인 시기는 아니였다. 그러나, 관리자 조병철 목사님처럼 일찍 인터넷환경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지금보면 초라하지만, 당시로서는 탁월한 홈페이지들이 접속되면 반향이 적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00년 감신의 1학년 가을학기는 고 염필형총장님이 소천하시면서, 더 민감해졌다. 당시 총장직무대행이라는 위치에 제13대 감신총장 당선자의 신분으로 접어든 박종천교수가 일시적으로 수고로움을 감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현재의 감신의 하드웨어의 전반적인 환경을 조성한 김득중총장님이라는 분이 당선되셨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필자에게 돌아가시기 6개월전까지 매주 토요일 장손주를 부르셔서, 사람의 관상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필자가 감지한 당시 김득중총장님의 눈매는 독수리의 눈빛이였다.
필자는 그분의 4년동안의 총장으로서의 역량을 아낌없이 평가하고, 한국교회사의 산증인 이덕주교수님등(이분은 참 철저하신 분이신데, 평양시가지의 사진을 파노라마로 찍어서 자료로 제시하신 첫번째 학자이신 것으로 파악한다. 관회수교 건물 이덕주교수 이분 연구실에 들리게되면, 바로 앞에 그 사진이 전시되여져 있다. 서울시 전경을 보는 것처럼 평양시 전경이 드러나 있다) 평양의 봉수교회등 직접 방문하셔서 귀한 역할을 하신 것을 필자는 매우 고무적으로 본다. 어쩌면, 고 김일성 주석의 스승이셨던 고 손정도 목사님의 후예다운 감신의 학자들의 오롯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참 쉽지가 않은 것이, 부부교수임용불가라는 현실이 제시되면서, 감신이 다시 격동적인 파란이 일어 났다. 아마, 임기 말련에 전 김득중총장님이 무척 힘드셨던 것 같다. 또 한편, 강남순교수 박충구 교수내외도 무지막지하게 힘겨웠을 것이다. (이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필자도 무척 힘겨웠다ㅠㅠ)
그러나, 세월이기는 장사는 없고,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김외식총장이 제11대 감신총장에 당선되게 된다. 초기에는 사회복지학과신설 교회음악과신설 여러가지 추진되는 과제들이 있었지만, 결국 현재 감신에 남아 있는 흔적은 실로암이라는 1억 가까운 돈을 드려서, 서대문 지역 유치원 아동들에게 해수욕도 제공하지 못할 만한 흉물만 남아 있다. (김홍기 총장이 스스로 견책으로 수렴하면서 8천4백만원을 감당하시고, 82?학번 선배들의 기금 기타등등 반드시 9월 개강채플에서 제13대 총장취임전 그러니까, 바로 이제 감신 기말고사가 끝나가니, 최대한 빠른 시일에, 거미집과 이름뿐인 실로암을 잘 정돈하시고, 아레오바고 광장을 재단장하시겠다는 약속을 꼭 지키시기 바란다. )
아직도, 필자가 변선환의 저승사자가 아니라, 신학적인 고 변선환 학장님의 손주뻘 되는 지점에서의 지평에서보자면, 아주 기가막힌 사건이 전 김외식총장시절에 벌어졌다. 고 변선환 학장님 10주기를 추모하면서 2005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그 제자 그룹에서 <변선환 신학 새로보기>책이 출판되었고, 그 기념식 자리에서 전 김외식총장이 축사를 하게되었다.
뭔가? 아주 애매하게 난감하면서도 그 자리에 참석해 있다는 것이 불편한 아주 여러가지 애매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진정 고 변선환학장님을 스승으로 기억하는 이들의 진정한 제대로 된 예우를 갖추는 자리였음에 틀림없다.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고 변선환학장님의 신학적 지평이 신학강의와 수업과 감신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강연에서 다른 지평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당시만 해도 크게 액션을 취하지 않았던 필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기에도, 2005년 고 변선환 학장님 소천 10주기 자리는 큰 이정표였다.
필자가 본격적으로 필자의 신학적 할아버지 변선환 학장님의 논문들과 변선환 아키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한 것도, 2005년 이후였다. 그런데, 변선환 학장님의 논문이나 설교문을 읽어 보면, 고 윤성범 학장님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게 나온다.
그리고, 필자는 오히려, 유교적 지평에서 윤성범 학장님의 성의신학과 효의신학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생존하시는 유동식 교수님의 낭만적 신학적 지평도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필자에게 입학하여 휴학하고 복학하고 5년이 지나서, 제대로 감신의 118년의 신학적인 중층적인 역사가 감게에서 일정한 역할을 꾸준히 필요할 때마다 제대로 짚어주시는 웰치감독 기념교회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님의 탁사 최병헌목사님에 대한 저작들부터 시작해서, 감신이라는 이 조그만 신학대학교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구나. 제대로 깨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역량에 대한 감동과 특히 상록수 최영신선배에 대한 감동으로 2006년 봄학기에 녹색살림배움터라는 야학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싸이월드일촌부터 시작했던 설득은 30명이 넘는 교사확보로 이어졌고, 당시 이성민 교수님과 임상국 교수님이 애를 많이 써주셨고, 이경재교수님도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결국은 용산 푸른언덕의 스승을 모시고 개교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왠일? 가을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감신에서는 파란이 일어났다. 유일하게 신학영어분과를 감당하셨던, 김준우 교수님만 임용에서 배제되는 사건이 발생된 것이다. 당시, 김외식 총장은 박종천교수와의 연결고리를 전제로, 여러가지 난감한 상황들을 적당하게 자신이 유리하게만 단도리하려고 하고 있었고, 차후, 총장선거국면에서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교수들의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김준우교수는 일년동안 무지막지한 고통을 당하고, 2007년 가을학기에 대자보 한장을 쓰고서 감신을 떠났다. 그러나, 후세의 그 어는 감신의 역사신학자가 감신의 역사를 쓴다면, 감신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제자들이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팬클럽을 버금가는 모임과 조직을 이끌면서, 헌신했던 유일한 교수는 김준우 교수뿐이다.
사실, 이 자체만으로도 김준우교수의 아픔을 제자들이 하염없이 눈물흘리면서 힘들어 했지만, 김준우 교수님은 감신의 그동안의 그 어느 교수와도 비교될 수 없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2. 변선환의 우파로서의 정체성- 신학교와 교회의 상생적 지평을 향해서
3. 왜? 그토록 감신총장의 자리는 그동안 무시무시할 정도로 쉽지않은 자리일 수 밖에 없었는가?
4. 감신의 학문성의 회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상생의 신학이 이뤄지려면, 먼저 해원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해원상생이다.
6. 엄밀하게 총장후보정책토론회 2시간만을 두고서 평가한다면 ?
7. 박종천 총장당선자와 가까운 관계를 들이밀면서 이상한 작당을 시도하려는 감신교수들에게 경고한다
8.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쓰시는 방법에 대한 필자의 견해
9. 세줄이 꼬여도 삽겹줄로 부드러운 곡선으로 제대로 꼬이면, 아주 튼실한 새애끼줄로서의 역할을 한다
10. 박종천 총장 당선자는 가을학기 개강채플에서 취임식을 한 뒤에, 가을학기 내내 교수들과 대화해야
11. 윤성범과 변선환의 선순환의 지평이 감리교 신학의 나아갈 길이다.
12. 변선환의 직계(좌파? 중도파? 우파?) 선배님들께 드리는 글
13. 이젠, 우리 감신에게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