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파멸과 고생"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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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3 09:00:00
파멸과 고생
                             로마서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이 있어.......”


  “파멸과 고생이 그 길이 있어...........”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의와 죄 가운데 행하고 있으니, 반드시 죄의 결과가 그에게 나타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욥기 4:1-1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 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기는 흩어지느니라.”
  엘리바스의 이 같은 말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욥기 8:1-7,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수하 사람 빌닷도 역시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그런 성경적인 근거들을, 열왕기상 2장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4째 아들로서, 부친 다윗이 나이가 많아져서 기력이 쇠하여 죽을 날이 가까워졌음을 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왕이 죽기 전에 나아가, 전에 왕께서 솔로몬에게 왕이 되게 하겠다고 맹세했던 것처럼,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지금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다윗 왕은 그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함께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아뢰자 솔로몬에게 정식으로 왕위를 이어받게 하라고 왕명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3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도니야는 두려워서 성전으로 들어가 제단의 뿔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조건부로 용서하는데, 만일 선한사람이 되면 살려주지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일 것이라고 조건을 말하였습니다.

  그 후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뒤, 아도니야는 부친 다윗의 침상에서 함께 누웠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기의 아내로 달라고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통하여 솔로몬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솔로몬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었고, 더디어 아도니야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러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쟁을 치르면 인명살상과 파괴가 따르는 것처럼, 분명한 일입니다.
  인간의 파멸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 인간들에게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파멸”이라는 말은,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듯이, 부셔지고 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와 악을 상습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남에게도 파멸하게 하며 자신도 파멸하게 됩니다.

  노아 시대에 대홍수로 세상이 진멸당한 것을 보면, 사람들의 죄악으로 짐승과 가축들까지도 함께 파멸을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 노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못했고, 그 지시대로 방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함께 파멸 당했을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성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당할 때, 롯이 신속하게 피란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파멸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나 시대에 니느웨 성도 왕을 위시하여 모든 백성들과 가축들까지 금식하며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당시 막스 레닌 한 사람의 영향이, 소련 공산당을 탄생시켰고, 중국 인민혁명의 주도자인 모택동 한 사람의 영향이 공산화시켰으며, 북한의 김일성 한 사람이, 철의장막 공산주의로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악질적인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처음 사람, 첫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으나,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살리는 몸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로마서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의 죄악이 인류를 파멸시키고, 한 사람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다시 살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으나, 아이성에서 크게 패배한 것은,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을 파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술주정뱅이의 파멸을 보십시오. 도박꾼들의 파멸을 보십시오. 아편 중독자들의 파멸을 보십시오. 절망입니다. 그들의 죄가 파멸을 불러옵니다.

  나는 책상위에 유리판을 깔아놓았습니다.
  몇 번 이사를 하느라고 한쪽에 작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 현관문이 좁아서 문설주에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작은 상처가 있는 데서부터 금이 가더니 결국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별로 크지 않고 대수롭지 않았던 작은 흠이 커져서 결국은 유리판은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흠이 생기면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문둥병 암병 에이즈병 등 모든 병들이 발생하는 것들도 작은 세균들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와 한 사람이,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다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류를 파멸의 죽음으로 떨어지게 한 것처럼,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파멸의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멸의 세상에서 인류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 인류를 대신하여 죄악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파멸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악으로 인한 파멸의 길로 나가는 삶은, “고생”이 따릅니다. “고생”이라는 말은, 어렵고 괴로운 생활을 말하데 비참한 모습입니다.
  파멸이 죄악의 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고생은 그 결과입니다.
  피를 흘리는데 빠른 그 발이 가는 길을 묘사합니다. 산산 조각난 결과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에덴의 동편 놋 땅에 거할 때, 그에게 당한 고생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11-12,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이 가인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고생이 임한 것입니다.
  가인은 고생을 예측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罪罰)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 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14).

  동생을 쳐 죽여 피를 땅에 쏟게 한 가인의 죄 값이,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서 더 수고하게 하였고, 효력이 없으니 농사하는 사람의 고생이 어떻겠습니까?
  육체적 고생은 말고라도, 정신적인 불안과 고생은 또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동생을 쳐 죽인 것처럼, 자기를 만나는 다른 누군가도 자기를  죽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과 초조함이 늘 따랐을 것입니다. 가인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철칙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하여 재산을 가지고 먼 타국에 나아갔으나, 곧 허랑방탕하여 재산모두를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으니 그 고생이 어떠했겠습니까?
  탕자는 비로소 돼지우리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집을 생각하고,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으면, 아무런 고생도 수고도 없는데, 아버지를 떠나 고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육체의 노동이 알맞은 것이라면. 건강을 지키는 축복이 되지만, 정신적인 불안과 근심은 살을 마르게 하고 뼈를 깎는 고통입니다.
  잠언 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언 17:22, “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전도서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고생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고생과 수고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고생을 하였어도 그 고생에 대한 고통을 잊지 못하고, 고린도후서 1:8-9절에서, 이렇게 술회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생과 수고의 경험을 많이 한 바울이기에, 피 흘리는 죄악으로 당하는 고생이 얼마나 큰 것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고생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해서 받는 고생이라면, 하나님이 갚으시고 장차 큰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죄악을 행함으로 받는 고생이라면, 저주와 진노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고생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생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생에 도전합시다.
  그러나 죄악으로 받는 고생은 위로도 받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에 있어
  그들이 가는 길, 다시 말해서 죄 아래 있는 불의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악을 행하고 범죄 하는 자들의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죄를 심고 악을 뿌린 자들에게 거둘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뿐일 것입니다.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여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세 번씩이나 그들에게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은 부당함으로 놓아주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증오심은 “당신이 만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하고 외쳤습니다. 하는 수 없게 되자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하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대답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지어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불법재판으로 예수님을 처형한 그들이, 어떤 보응을 받았는지 역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으나, 예수님을 불법으로 재판한 빌라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가운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을 영원히 되 뇌이고 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  치던 유대인들은, 독일 나치스에게 “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인들”이라는 죄명 하에서, 6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학살을 당하였으며 천대를 받았습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일을 역으로 행동하고, 하나님의 길을 굽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 치고, 그 길이 형통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룟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으나, 그 돈은 한 푼도 써보지를 못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으며, 거꾸로 떨어지면서 창자가 터진 채 음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불법 재판을 한 이후에,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나 중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죽었으며, 헤롯 왕도 얼마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교만을 부리다가 벌레가 창자를 깎아 먹음으로 죽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행 12:22-23).

  시편 1편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잘 설명하고 나타내어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예수님도 사람의 앞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사람이 어느 쪽의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권은 자유의지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강제로 막지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막으셨거나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길로 들어가느냐? 좁은 길로 들어가느냐? 선한 길로 가느냐? 악한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주어 진 선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길에서, 십자가만을 목표로 삼고 힘 있게 전진하고 승리하여, 면류관을 쓸 때까지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악한 사람의 길을 모방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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