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결과에 승복해야 할 때

이재신
  • 3300
  • 2012-06-17 02:15:48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다.
그러나 또한 소수를 중히 여겨야 한다.
과연 이런 이상적 명제들이 가능한지를 따져 본다면 그리 신빙성 있는 논리 같지는 않다.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한다는 허울은 말 그대로 형식(명분)일 뿐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다수의 지지로 권력을 잡으려 혈안이 되는 것이리라.
아무리 합법적인 다수라고 해도 소수된 자들이  다수의 지배를 좋아할 리 만무다.

그렇다면 그 다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결정된다고 하겠다. (이 또한 문제가 많은 세상의 논리일테지만)
이번에 통합진보당의 사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다수결로 당선되었지만 그 다수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감리교는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뒤로하고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복음 안에서는 권력이나 명예에 있어서  세상보다 더 자유로와야 한다.(이 또한 허구가 될는지 모르지만...)
독배를 마시고 죽었던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증인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억울함” 정도는 그리 대수가 아니었다.
즉 긴 역사를 두고 참 스승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합법과 불법, 은혜와 비은혜를 두고 시간이 흐르면 그 평가가 내려질 터인데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르칠 것이다.

천국의 삶을 보장받은 우리가 땅의 것을 갖고서 무엇이 부족한 자처럼 징징댄다면 그건 성도(지도자나 교인이나) 로서의 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본시 희생이란 잘못된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르고 참되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희생이다.
그것이 추잡하고 더러운 싸움이나 분열보다 더 나은 가치라고 믿기 떼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옳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산 그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쯤 되었으면)인가?
더 많은 것들을 선사?하고 싶은 충정이야 누가 모르련만 이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되었으니 그 역효과를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안다면 양보하고 희생하는 신앙의 기본과 미덕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과 교회와 후대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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