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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엄열매를 버려라
관리자
- 2820
- 2012-06-19 20:52:58
누가복음 15:16-24. 창세기 39:7-18.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 진 유명한 내용입니다.
어떤 부자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장차자기가 받아야 할 상속을 미리 받아가지고, 먼- 외국으로 나아가 돈을 다 탕진하고 허비한 뒤에,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쥐엄 열매로 허기를 채우려다가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다시 고향의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새로운 결심과 각오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결단의 중대한 시기가 여러 번 있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시간을 늦추지 말고 빨리 결단하여 과감하게 개선해 나아가는 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의 삶의 가치회복은 빠른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둘째아들처럼 아버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얻어 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삶이 값없는 삶이었다고 한다면 만족하지 못한 삶이었을 것이니, 내게 결단의 시간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손에 붙잡은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1. 가치 없는 돼지의 사료를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쥐엄 열매는 아카시아나무의 씨앗처럼 생겼으며, 콩과에 속하였으며 상록수 잎으로 5월에서 8월 사이에 익어, 열매의 맛은 그냥 버릴 정도는 아니어서 가난한자들의 식물이나, 가축의 사료로 사용한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광야로 나아가게 되자, 돼지우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사람이 돼지의 식물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먹을 식물을 먹어야 하는 것이지, 짐승의 사료를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비참한 일이며 매우 슬픈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성도가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을 받아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성도가 만약 이단자의 사상이나,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생명이 없는 양식을 받아먹는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불신자들의 생명이 없는 주장을 받아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돼지들의 음식과 같은 것들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어야 할 성도들이 돼지들이나 먹는 식물을 받아먹어서는 아니 됩니다. 돼지들이나 먹는 식물들은 버려야 합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 자유를 얻으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잘못된 목적은,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짐승들의 동료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돼지우리에서 돼지무리들과 함께 기거하며 돼지들이나 먹는 식물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상실하고 마는, 비극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비극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인정하였고, 심지어는 먹지도 말라고까지 했던 짐승입니다(레 11:7, 신 14:8).
성경에서 증거 하는 돼지의 모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굽이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는 짐승으로, 추하고 더러운 동물이라는 것입니다(레 11:7, 신 14:8).
성경에서는 총 21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22, “더러운 것을 좋아 하는 짐승” 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11:22, 마태복음 7:6, “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미련한 짐승” 이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밖에 모르는 짐승, 사람의 가까이 하면 가증해지고 부정해 지는 동물로 규정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 떼를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몰살하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2천 마리의 돼지 떼라도 한 사람의 영혼만 못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먹는 것만 탐하고 부정한 것만을 좋아하는, 2천 마리의 돼지 떼와 같은 사람보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생명말씀을 사모하는 한 영혼이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증스럽고 부정한 동물이 먹는 사료를 사람이 먹었으나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이 먹는 식물을 먹어야하지, 사람이 먹는 식물을 버리고 돼지가 먹는 식물을 먹으며, 돼지들이 먹는 식물을 만족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스스로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돼지가 먹는 식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돼지우리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돼지우리의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돼지우리의 생활습관에 만족해하는 사람은, 영원히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돼지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부정한 인간들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부정하고 추한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깨끗함을 받고 정결함을 받았으나, 다시 추한 것을 즐거워하고 찾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진주와 금보다 귀한 예수님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사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먹는 것만을 탐하고 부정한 것만을 찾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생명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되새김질할 줄을 모르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먹는 것만을 좋아하고 입으로 들어가는 떡만을 찾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좋은 도리와 진리의 길을 가리켜 주어도 그 가치를 모르고 추한 것만을 좋아하는 인간들을 말합니다.
돼지의 굽이 갈라졌듯이, 세상과 영적인 세계를 갈라놓은 발걸음이어야 하는데도, 추하고 더러운 곳으로 스스로 찾아드는 인간과 같습니다.
양이 염소와 가까이 하면 염소가 되는 듯이 부정해지고 맙니다.
돼지가 사람 속에 있어도 기회인 것처럼, 성도는 돼지 곁에 있어도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영적 돼지를 성도와 같이 되게 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버리고 불신자들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 돼지들처럼 먹는 것만을 쫓지 말고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둘째아들은 돼지와 같이 살며 돼지들이 먹는 사료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부정한 식물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양반들은, 곧 죽어도 상놈들처럼 구걸하지 않았고, 아무리 급해도 뛰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추워도 곁불을 쪼이지 않았고, 자기의 처신을 알고 지키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자기의 처신을 바르게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2. 쥐엄 열매는 사람의 양식이 아니므로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의 양식이 있고 돼지는 돼지의 사료가 있듯이 사람은 사람의 양식을 먹어서 사람의 위치와 처신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부정한 식물에 만족하지 말고, 자기의 위치를 찾아서 살아야합니다.
자기의 위치를 스스로 찾지 못한다면, 돼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할 때, 마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마귀에게 속아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발람이 선지자 위치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모사꾼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했을 때, 거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롯 인 유다가 사도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은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받은 은혜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성령을 속이고 저주를 받아 죽었습니다.
참된 가치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가치한 것을 단호하게 버릴 줄 아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돼지는 금덩어리나 진주보다도 먹는 것을 좋아 하고, 쥐엄 열매를 좋아합니다. 돼지는 아름다움보다는 이 부정하고 추한 것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면 구정물이나 쥐엄 열매보다도 참된 가치를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알아야합니다.
성도들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은, 아무데서나 냉대밖에 받을 것이 없는 것임을 16절에서 보게 됩니다. 두 발가진 인간이, 네 발가진 돼지에게조차 냉대를 받으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돼지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은 네 발가진 돼지들이 먹어야 할 양식을, 두 발가진 모습의 다른 종류의 돼지가 들어와서 건더기만을 모두 건져 먹어버리고 구정물만 남겨두니 불평과 불만이 있을 만 합니다.
자기들의 영역에 마음대로 들어온 침입자를 쫓아내려고, 돼지들은 머리로 받고, 입으로 물면서 항의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면 어느 곳에서나 냉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아들이 돼지들에게도 배척을 받은 것처럼, 우리성도들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을 때, 내 뜻과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다른 무리 속에 섞여볼지라도 결국은 그 무리 속에서도 냉대와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도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불신자들 속에 들여가 보아야 천대와 멸시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금수와 다른 것은, 가치를 판단할 줄 아는데 있습니다.
조물주에게 인간들이 불평을 했더랍니다. 왜 우리 인간들은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주시지 않았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를 수 있는 날개도 주시지 않았고, 타조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 튼튼하고 빠른 다리도 주시지 않아서, 아무무기도 없으니 불공평하다고 불평 했더랍니다.
그러자 조물주께서는 말하기를 “그러나 너희 인간들에게는 짐승들에게 없는 큰 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이성을 주었다.”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돼지의 사료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돼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돼지사료를 좋아 하고 만족한다면, 그는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다른 돼지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을 격하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만물의 영장으로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신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낮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대중기도를 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나를...........” 한다든가? “마른 막대기보다도 못한 나를.........” 하고 자신을 너무도 격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말입니다. 왜 우리 인간이 만물의 찌꺼기와 갔습니까?
어찌 우리 인간이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인간입니까?
짐승들은 네발로 기어 다니며, 머리를 언제나 땅만을 내려다보고 삽니다.
그러나 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며, 머리를 하늘을 향해서 들고 멀리 바라보며 삽니다. 그것은 인간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라고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릴 것은 버리고 사는 결단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무가치한 습관, 무가치한 행동, 무가치한 말과 식물을 버리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끊을 것은 끊고, 자를 것은 자르고 살아야 합니다.
미련을 두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합니다.
둘째아들이 쥐엄 열매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위치를 다시 회복하려고 결심을 하고 결단을 하였을 때, 손에 들었던 쥐엄 열매는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았던 것입니다.
3. 쥐엄 열매를 버린 뒤에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아들은 쥐엄 열매를 버리고 돼지우리를 뛰어넘었을 때, 그는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거할 이들은 돼지가 아니라 부모님과 그의 형제들입니다.
그는 분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돼지는 인간의 가족이 아닙니다.
인간이 돼지들과 대화를 하고 합숙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족은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고 돌보아 준 부모님이요,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일가와 친척들을 만나서 살아야 합니다.
그가 돼지우리를 벗어나서 쥐엄 열매를 버렸을 때, 부모와 형제를 만날 수가 있었고, 그리운 벗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잃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회복하여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잠언 23:4, “ 네 사사로운 길을 버릴지어다.”
시편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 화평을 찾아 따르라”
어린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더러운 것을 버리면,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선물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품에 있는 아들보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선한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양을 찾으러 나아가 잃은 양을 찾았으면 더욱 기뻐합니다(눅 15:6).
회개할 것이 없는 죄 없는 사람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십니다. 의인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의 죄는 생각지도 않으시고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작은아들의 회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고, 죄는 생각지도 않았으며 용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받았고 용서를 받았으며, 잃어버렸던 아들이라는 명예와 영광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상속자의 영광자리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영광의 상속권을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또 이웃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고 겉옷을 벗어 버렸을 때, 감옥으로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의 자리를 벗어버리고 광야로 나갔으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여 내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갔을 때,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막 10:50).
바울은 핍박자의 행패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곧 회개하는 길이며 새로운 삶을 향하는 길입니다.
한 사람에게 마음도 하나요, 정신도 하나요, 생각도 하나입니다.
한 그릇에 한가지만을 담아야 하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한가지만을 담아야합니다. 두 가지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두 가지가 석이게 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여호수아 24:15,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8:21, 엘리야는 주관이 없이 흐리 멍청한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들이 한 말도 대답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 여러분은 현명한 것을 선택하셨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선택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가운데, 늘 이기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