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창 목사님과 오세영 목사님의 가난(부요)의 개념(기준) 논쟁

이재신
  • 3082
  • 2012-06-21 07:58:28
최세창 목사님과 오세영 목사님의 가난(부요)의 개념(기준) 논쟁

가난의 상대적 개념과 절대적인 개념-정답은 있을 수 없다(
나눔의 상대적 개념과 절대적인 개념-정답은 있을 수 없다
귿이 정의한다면 그 사회의 보편적이 통념으로 정해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반화하는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 소유에 집착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이 가장 큰 가난이다.
어떤 투자 전문가에게 4백억을 가진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요걸 갖고 뭘하느냐고 푸념을 늘어놓는다고...((같은 선상에서 루디아나 아리마대 요셉의 소유에 대해서도 논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것(4백억 가진 자의 푸념)은 쓸데없이 자기 자랑을 위한 술수?가 아닐 것이다.
분명 그 사람에겐 더 많이 가진 사람들 즉 수 천억이나 또는 그 이상의 소유자들에게 비하면 이걸 갖고 뭘하나? 하는 걱정일 것이다.
(어떤 동네나 어느 나라의 최고 부자도 다른 동네나 다른 나라으 최고 부자에 비하면 가난한 것이다).
많건 적건 남의 소유를 탐내거나 비교해서 언제나 불만족 가운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되게?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못되게? 가난한 사람이리라.
들의 풀이나 새나 백합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등기된 소유는 갖지 않았어도 언제나 여유롭다.(인간이 환경을 파괴하지만 않는다면~)-(온 천지가 그들의 소유이며 삶의 현장)

소유란 인간을 얽어매는 그리 좋아할 수 없는 도구?일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당연히 살아가는 존재들인 한 뭐 그리 대단할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쥐꼬리만한 권력이나 물질을 갖고서 잠시의 영화를 누리고 산들-허긴 그게 영화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이리라

누구나 소유의 집착을 버리고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즉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요, 그 대표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개념의 정립이 문제가 아니라 “나누어 주라“ 는 명령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가난이나 부’에 방점을 찍을 것이 아니라 ‘나눔’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능을 기부하든 물질을 기부하든 지식을 기부하든 즉 유 무형의 소유가 있다면 그걸 갖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칸트의 도덕률로 말하면 무한명령?)


두 뷴의 주장을 살펴보고서 나름의 생각을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혹시 불손한 표현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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