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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심스러운 감리교단이다.
관리자
- 2739
- 2012-07-19 09:00:00
바로 얼마 전 250기 성막 쎄미나를 하였습니다. 타교단 목사님 한 분이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감리교가 사라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요?”
그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목사, 장로들이 성경적이지 않아요.”
쇠뭉치로 얻어 맞은 듯한 아픔으로 아찔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픔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질서를 위하여 순항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들이 많지만 부담금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나도 2년 전 감독회장에 출마하였습니다. 부담금 문제로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정 유권 해석위원회에서 <4년간 성실>을 <날자>로 풀었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을 장정에 넣을 때 장정 개정 위원회 회원 한 분이 말해주었습니다.
그 때 200억 결산 교회가 60억 보고한 것을 알고 <성실>이라는 말을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4년전 연회 때 부담금을 낸 것이 감독회장 후보 실격사유입니다.
1. 그 때는 그랬습니다.
그 때는 연회때까지 부담금을 내면 되었습니다. 한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나도 너도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2. 그 때는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감독회장, 감독 되신 분들은 모두 선거 전 해에 부담금만 12월 31일까지 냈으면 모두 후보로 결격 사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그렇게 심사를 받았습니다. 나도 이 문제를 사석이지만 자문을 받고 선거 운동을 하여 왔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3. 그 때는 그랬습니다.
교리와 장정은 “부담금을 4년 동안 성실히 납부한 이”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조항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3년 전만 하여도 전혀 감독, 감독회장 출마 의사가 없었습니다. 오직 교회, 오직 부흥회, 오직 성막 쎄미나, 오직 저술에 전력하였습니다. 1,500 교회 정도 부흥회, 250기 37,000명 목사님과 성막 쎄미나, 94권 책 출판, CTS, CBS TV 강의 이것이 나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3년 전 많은 이들이 저를 감독 선거 현장으로 불러 냈습니다. 그 때 부담금 문제로 접었습니다. 당해 연도였기에 선거권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피선거권이 있느냐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4. 그 때는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는 강남 잠실에 있었습니다. 기도원과 교회로 분리되어 많은 목사님들과 성막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막 쎄미나와 94권의 책을 통하여 들어오는 수입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한 푼도 내가 사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237개 교회를 건축완료하였습니다. 11년간 기도원과 교회가 분리되어 있다보니 교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내에서 교인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쎄미나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쎄미나실, 성막실 그리고 숙소까지 겸한 종합관적인 교회를 짓고 싶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내가 개척한 교회이기에 15분 장로님들은 항상 100% 만장일치였습니다. 그래서 종합관 건축을 기도하던 중에 강북 뚝섬에 부도난 교회가 있었습니다.
과감한 모험
지하 2층 지상 12층 건평 2,300평, 108명이 잘 수 있는 콘도 17방, 1,300석 본당의 큰 건물입니다. 지금은 땅값만 500억 정도 되는 건물입니다. 이 교회가 이단 인터넷 방송으로 월요일에 등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은 은행문이 닫히기에 계약을 할 수 없습니다. 금요일 계약을 못 하면 끝나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목요일 밤 장로님과 마지막 회의를 하였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밤 11시에 헤어졌습니다.
허탈한 나는 안양 갈멜산 기도원으로 달렸습니다. 밤 3시까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교회로 돌아와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직장에 가지 아니하시는 장로님들 세 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장로님들! 어제 밤 기획위원회에서 부결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건물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계약하고 다음 주일 생기는 문제는 생기는 대로 처리하십시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또 저에게 맡기세요.”
그리고 그 날 계약을 하였습니다. 다음 주일 장로님들에게 발표하였습니다. 모두 제가 저지른 일을 긍정적으로 추인하여 주었습니다. 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20 일 동안에 130억을 만들어야 하는 피말리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처럼
내가 앞장 선 것이기에 모두가 나만 보고 있었습니다. 우선 나는 웨슬리를 뒤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동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연회 웨슬리 집회 강사로 웨슬리의 특징 5가지를 정리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문자 멧세지를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산뜻하게 웨슬레를 정리하였느냐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분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웨슬리에 대하여 설교하지 말고 웨슬리처럼 살아 주세요.”
그래서 나는 웨슬리처럼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버지가 44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거하실 아파트를 강동구에 준비하였었습니다. 팔았습니다. 6억 5천만원이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은 내가 산 집이었습니다. 은행에 가서 5억 5천만원을 빌렸습니다. 있는 돈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부흥회다니면서 들어 온 돈을 모두 드렸습니다. 모두 14억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웨슬레처럼 책과 이블과 옷만 남기고 죽기로 결단하였습니다.
혼신을 기울였습니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보니 70억 부채가 남게 되었습니다. 600여명 장년부 출석 교인이 이전을 끝내고 나니 300여명으로 줄었습니다. 강을 건너 오는 것이기에 노인과 차없는 이들은 이전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다행히 장로님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배드리던 건물은 장로교회에서 22억 준다고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리교회에 21억에 넘겼습니다. 따라오지 못 하는 교인들을 감리교회에 남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생활비도 받지 못 하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는 갈보리 교회가 내 아들같았습니다. 그랬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전한 교회는 초교파적으로 우리 교회뿐이었습니다. 이전 뒷 처리와 한 달 이자 4천만원 감당은 나의 피를 말렸습니다. 낮에는 웃었고 밤에는 우는 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빚의 크기가 사람의 크기라는 말이 나를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으라는 말이 힘을 주었습니다. 거친 파도는 사공을 유능하게 한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큰 사람은 초라한 구상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나를 위로하였습니다. 힘들 때 울면 삼류 인생이라고 나를 자책하면서 울지 않았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함을 알고 장로님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걸었습니다.
악소문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갈보리 교회 쓰러진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꿈은 꿈꾸는 자를 가혹하게 하였습니다. 아프고 또 아팠습니다.
성공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임을 알고 차근차근 일하였습니다. 쟁기를 쥐고 뒤를 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꿈은 욕심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꿈이 방향을 잘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이주한 지 5년 되었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꾸준히 성장되었습니다. 장년부 출석 700명 수준으로 올라 왔습니다. 금년 최고 많이 모일 때 900명이 넘었습니다. 과정이 힘들었기에 결과가 소중하였습니다. 사탕만으로 성장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도전에 웃음을 섞었습니다. 여유가 찾아 왔습니다. 내게 던진 돌로 담을 쌓아왔습니다. 이제는 승리하였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비올 때 우산을 뺏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플 때 아프게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 이겨냈습니다. 이제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연회때까지 부담금을 납부하였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4년간 부담금을 성실하게 낸 이”
어느 것이 성실인가요?
1. 꼭 100점이 성실인가요? 80점이나 90점은 성실이 아닌가요? 100점만 합격이고 80점은 불합격인가요? 4년 동안에 한번 늦게 낸 것은 성실이 아닌가?
2. 도전하지 않고 평안하게 목회하면서 12월 31일까지 부담금을 잘 낸 것은 성실이고, 감리교 재산을 크게 늘리면서 도전하느라고 거친 파도를 헤지며 연회때 낸 것은 성실이 아닌가요?
3. 12월 31일까지 낸 것은 성실이고, 생활비도 못 받으면서 병들 정도로 고생하며 조금 늦게 낸 것은 성실이 아닌가요?
4. 성실의 의미는 이중장부, 속임의 개념이 더 크지 않을 가요?
그 때는 그랬습니다.
이제 조용히 감독회장 출마를 접으면서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장사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버는 것이라는 탈무드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흠있는 동생을 감싸느라고 동분서주하셨던 김진호 감독회장님, 강흥복 목사님 그리고 생명까지 달라면 줄 수 있을 정도로 충성하였던 차창규 목사님들을 비롯한 7명 타르탄 같은 참모 목사님들 그리고 전국의 목사님들, 그리고 오직 나만을 위하여 존재한 듯한 마음을 들게 하신 김재성 장로님, 박희달 장로님을 비롯한 전국의 장로님 감사드립니다. 갈보리 교회 온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같습니다.
\"당선되면 박수치고, 떨어지면 춤을 추겠습니다.\"
이제 춤추며 같이 지내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감독회장에 안 나가기를 기도해요.”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에게 이스라엘에서 대통령 출마를 권유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상대성 원리를 강의할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고 대통령 할 사람은 많으니 나는 나밖에 할 없는 일을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성막 강의를 할 수 있는 분은 한국에 강 목사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여도 안 되는 것도 기도응답니다.
주님이 인도하는 길을 걷겠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장정 유권해석의 결과는 그렇습니다.
“법 해석이 아니라 정치 싸움입니다.”
4년만에 떠오른 감리교 정상화의 찬란한 태양이 계속 빛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리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샬롬
갈보리 교회 강 문호 목사
**** 참 한심 스러운 일이다.
감리교회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참 모를일이다.
이건 아니지 않는가? 누가 보아도 이건 정말 아니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춤출수 있는 방안이 그렇게 없는것인가?
정당하게 대결해서 낙선이 되었을땐 땅을 보고는 울겠지만 하늘을 보고는 웃을수 있는게 우리들이 아니던가?
근데, 이건 거꾸로 땅을 보고 웃고 있다.
하찮은 속물 인간들이 정치 판 놀음하는것에 대한 졸렬한 비웃음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늘을 향하여는 운다.
무너진 공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을 향하여 운다.
나는 근 몇년간 누가 뭐라던 감리교회 정상화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일해 왔다고 자부한다.
\"전국 감리사대회\" \"감리교정상화수습대책위원회\" \"감리교정상화대책위원회\"등등이다.
그동안 지내오면서 참 많은 오해을 받아 가면서 말이다.
강목사님의 피눈물나면서 쓴 글을 보면서 나는 두 주먹을 불끈쥐어 본다.
작은 내 힘이지만 내 가만이 있지 않을것이다.
다 한번 뒤 엎어 버려야 겠다.
그동안 그렇게 우리가 각종 정상화 모임을 가지면서 공통분모를 가진게 있는데 그것은 그 누구도 억울하게 소외됨 없이 \"다 함께 사는 법\" 그것을 모색하면서 물색을 했던것이다.
근데 근 3년이 지나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는 조금도 변한게 없다.
참 억울하다. 누구를 당선 시키고, 누구를 탈락 시키고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감리교회 행태들은 또 다른 불란의 시발점이 또 될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김기택 임시감독회장의 교단 운영능력이 고작 이렇게 밖에 되지 못하는가?
이런분이란걸 좀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이 분을 세울라고 그렇게 몸부림치지 않을텐데,,,, 참 한심 스럽다.
이게 \"동그라미\"인가?
이게 너도 나도 다 함께 사는 방법인가?
나는 오늘 오후 본부 감독회장실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강 하게 항의 하려고 한다.
내가 무슨 책임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총 책임은 감독회장에게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공의가 강같이 흐르는 감리교단을 위하여 기도한다.
서울 불광동에서 심영식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