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구원론에 대한 마지막 글입니다..

김성국
  • 2353
  • 2014-10-12 02: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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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원론에 대한 마지막 글..


이제, 마지막으로 칼빈의 구속이론의 성경적 근거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독자분들께서, 특히 목회자분들께서 이 부분을 잘 살펴 감리교회 목사로서 성도들의 신앙교육에 만전을 기하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 토기장이 비유의 배경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이 그들의 구속이론(이중예정론 & 영구구속이론)을 주장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말씀이 바로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이다. 그렇다면 이 \\'토기장이 비유\\'가 왜 그들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성경적 근거가 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칼빈주의자들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유기되었고, 이방인들은 선택되었다는 이중적 선택교리의 논리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이방인교회(영적 이스라엘)가 유대민족(육적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장로교 대체신학의 성경적 근거요, 그들의 이중예정론의 골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토기장이 비유\"가 담긴 9장은 어떠한 章인지를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목사님들은 잘 아시는 내용이라 생각하지만, 9장부터 11장은 바울이 그의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언급하는 아주 특별한 장이다. 바울은 이 세 장에 걸쳐서 왜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 일정 부분 소외되고, 이방민족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거부하였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말하자면, 유대민족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거부함으로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구원적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바울은 탄식하면서, 그러나 이것도 크게 보면 하나님의 숨겨진 경륜이라고 섭리론적으로 해석하고자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사도바울은 \"토기장이비유\"를 통해서 마치 토기장이가 흙을 가지고 여러 용도의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도 이방민족이나 유대민족이나 당신 자신의 뜻과 경륜 속에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다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구원사라는 커다란 경륜 속에서 장차 있게 될 영광스런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최종적인 때에, 멋진 구원적 결말을 가지고 등장할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지금 현재로서는 우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떨려나게 된 사실을 설명하려고 도입한 수사적 비유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9,10,11장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유대백성을 영구히 구원으로부터 유기하셨다는 것을 바울이 증거해주는 章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백성이 우둔하게 됨으로써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획득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 복음이 전 이방민족으로 확대되는 轉機가 마련되었음을 선언하면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장자 이스라엘을 장차 그 언젠가 다시 부르셔서, 이방민족과 유대민족을 화목하게 하시는 큰 구원사적 경륜을 성취하실 계획을 갖고 있노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엡 2:13-18)  결국,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를 주석한 칼 바르트 역시도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같은 칼빈주의자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백성을 \"버림받은\" 공동체, 교회를 \"선택받은\" 공동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선택 대상은 이스라엘 자체도 아니고, 교회 자체도 아니고, 그 일원성(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兩者이다 ... 이스라엘과 교회라는 이중 형상을 가진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다.\"(교회교의학, \"하나님의 관한 교의\" 중에서)  \"우리는 이 절의 확정된 사실들을 로마서 9-11장을 통해서 연속적으로 주석함으로써 뒷받침한다. 우리의 연구와 진술은 이 9-11장만을 고려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서 전체를 바라본다.\"(같은 책) 장로교 목사이기도 했던 바르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왜 듣기 싫어합니까?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조차 사람들은 왜 유대인이 더는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증명하려고 애씁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자유로운 은총의 태양이 여기에,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 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사람은 독일인, 프랑스인, 스위스인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선택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든 나쁘든, 스스로 유대인이 되거나 유대인과 강하게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칼 바르트 신학묵상\" 중에서)

그러면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서는 그 어떤 민족도 배제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만인보편구원론\"을 주장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장로교목사 로이드 존스와 칼 바르트는 결별하였고, 바르트를 장로교목사들은 자유주의신학자, 新정통주의자 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로이드 존스는 더 나아가 \"만인보편구원론\"을 주장한 존 웨슬리를 사탄의 졸개, 쓰*레기라고까지 폄하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이 그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주 거론하는 \"토기장이 비유\" 같은 예들은 그들의 성경석의의 부실함과 편협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바울의 \"토기장이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수사학적 기법이라고 알고 있으나, 바울이 왜 \"토기장이 비유\"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주석학적 견지에서 들여다보면,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배경과 결론에 다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이 같은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단지 수박 겉핥기식으로 \"토기장이 비유\"를 다루다보니 엉뚱한 결론, 곧 이중예정론과 같이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명분 아래 \\'선택자\\'와 \\'유기자\\'라는 희한한 논리가 개발되어 하나님의 인류보편의 구속적 사건이라 할 십자가사건을 유명무실한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우를 범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로 나누어 선택하실 요량이시라면, 무엇 때문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라는 어려운 길을 걷게 하시겠느냐는 논리적 비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십자가구속사건은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구분 짓는 구원의 척도가 아닌 것이 되고 있기에, 어린아이라도 칼빈주의자들의 논리가 이치에 전혀 닿지 않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2. 유병언과 김홍도 그리고 조용기 목사의 공통점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유병언과 김홍도 그리고 조용기 목사의 공통점은 한국사회에 기독교가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 그리고 악랄할 수 있는지를 증언해주는 목사들이었다는 점에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함께 공유하는 구원이론이 바로 영원한 속죄이론인 성도의 견인이론이었다는 사실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장로교 목사들은 같은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그들과 유사한 파렴치범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데, 그들 셋은 어찌하여 한국사회에 그와 같은 패악질을 저지르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장로교목사들은 그와 같은 악랄하고 편협한 교리를 신봉함에도 불구하고, 그 조악한 교리가 그들 자신을 함몰시키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누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자와 유기자를 하나님이 아닌 이상,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거나 타인에게 절대로 공포할 수 없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지정하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신앙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함부로 비그리스도적인 행동이나 행태를 자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믿은 바의 확신을 증언한다.(롬 8:35-39)

그러나, 앞서 얘기한 악랄한 기독교인 세 명은 장로교리 신봉자들과 성도의 견인교리 인식에 있어 큰 차이를 내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즉, 감리교회의 보편구속이론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데다가, 덧붙여 그 받은바 구원을 영구히 저버리지 않는 장로교 교리를 수용한 까닭으로, 이를테면 감리교회의 장점인 보편구원의 교리에다가 장로교의 장점인 영원한 구원교리를 혼합하여 가장 인간들이 달콤해 하는 구원의 수단인 독특한 교리를 만들어 자신은 물론 성도들에게 자가당착적인 교리를 머리 속에 영구히 장착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끔찍하지 않은가? 성경에도 없는 교리를 자신들의 신앙적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감리교회 전반에 독약을 뿌려댄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도 감리 내부에 그 독극물을 먹은 자가 상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유병언의 구원파가 그 독극물을 서로 상부상조 나눠먹어 자신들의 영혼을 사탄에게 저당 잡힌 신세가 되었음을 우리 한국인들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 감리교회 차례가 되었는가? 아니면, 조용기의 순복음파가 다음 번 차례인가? 바라건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패악질은 이번만으로 여기에서 그쳤으면 싶은 것이다.

3.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조건들

구원에 관하여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주지하는 대로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는바, 첫째는 해 아래 사는 모든 인간은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이며(예외가 없음), 둘째는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고(다른 방법이 전무함), 셋째는, 그러므로 만민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것이며(만인구원론), 마지막으로는 성경적 구원이란 구원받은 자나 구원을 주시는 분이나 동시적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완전 구원론)

말하자면, 구원이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충만하고 고귀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사회적으로 받는 지탄이 어마어마하다. 물론 걔 중에는 그야말로 폄훼를 위한 폄훼도 있을 것이나, 상당 부분의 이유는 기독교사회에서 꾸준하게 원인제공이 되고 있으며,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할 말이 없는 것이 적잖다. 지난번 어떤 후배목사님이 전도하러 나갔다가 욕만 먹었다고 전도하기 너무 힘들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럼에도 중단치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격려한 적이 있다.

구원론은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다. 어떤 구원론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양태는 천양지차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자들은 성경적인 구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써서 살아야 됨을 말씀드리고 싶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가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 못하여 감독이 되고자 온갖 못된 짓을 망설이지 않고 한다든지,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고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게 종주먹을 들이댄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행위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어느 하나 안 걸려드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어제 잘못한 아들에게 꾸중한 것도 마음에 걸려 통회하기 마련인데, 사회적으로 패륜을 저지르고도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을 강심장이라면 그들이 어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식이라 할 것인가. 그러므로 감리교회가 달라지려면, 구원관부터 올바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자기 임의대로 조작한 구원이론을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회개하는 심정으로, 마땅히 영구히 폐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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