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대인과 소인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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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4 23:45:33
천국에서 작은 자와 큰 자
출애굽기 20:4-6, 마태복음 5:17-20.

창세 이후를 시대적으로 구분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던 시대를 구약시대 혹은 율법시대 또 성부시대라 말하고, 신약시대를 은혜의 시대 혹은 성자시대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를 성령시대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친히 인간사회를 통치하시던 때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생활 규범이며 신앙의 몽학 선생이었습니다(갈라디아 3:24).
그런데 신약시대에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 장로들의 유전을 거침없이 어겼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손을 씻지 않고는 식사를 하지 않는 유전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시비를 합니다.
예수님은 또 유대인들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어떤 일이나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2천 규빗 이상 걷지 않는 다든지 안식일에 불을 피워 밥을 짖지 않는 다든지 무거운 것을 들지 않는 다든지 큰 상처를 입은 환자라도 물 묻힌 천을 붙이는 것 이상은 금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완치된 병자들에게 자기 자리를 거두어 가져가라고 했으며 길을 갈 때 제자들은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비벼먹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시비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으로 제자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반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셨거나 아니면 율법을 무시하려 하지 않느냐고 오해를 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율법은 구약시대나 적용되는 말씀이고 성령시대인 지금은 율법을 준수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라기 3장에 11조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11조는 구약의 율법시대에나 해당하고 신약에서는 구약시대처럼 11조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뜻을 잘 알지 못한다는 억지 주장입니다.
잘못된 이론으로 억지 주장을 부리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자기 편견에 사로잡힌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정말 구약시대로 끝나는 것이며 지금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1, 율법의 완성 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하여 지거나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바른 의미를 가르쳐 주는 선생으로 모범을 보여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율법에 명시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바르게 깨우쳐주고 몸으로 실천하여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갖게 하시려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구약에 관계되는 중요한 단어들이 세 개 나옵니다.
그것은 율법, 선지자, 완전케 하다, 는 단어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율법은 도덕적인 것, 법률적인 것, 의식적인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구약의 10계명과 같은 도덕적인 율법이 있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을 하며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법률적인 율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성전예배를 통하여,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요제 등을 설명하는 의식적인 율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적인 의식들을 읽다보면 좀 지루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약의 이런 모든 율법들이 예언적인 모형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이 파기되거나 끝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파괴시키는 자로 몰아 붙이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지 율법을 파괴하거나 거역하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 자로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수정하거나 불완전한 데를 삭제하고 보충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가운데서 구약의 계명이나 율법을 가르치실 때 에 참된 영적 해석을 하신다고 추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새로운 말씀을 덧붙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들을 몸소 보여주셨고 생활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해야 옳은 설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으며, 율법에는 동물들로 레위기적 피의 제사를 드려라 했고 할례를 행하라 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런 일들을 지키지 않고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한 논쟁에서 말씀하신 구절들을 보면 안식일 규례에 대한 율법은 능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다시 부활하셨으니 주일은 곧 생명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정했으나 지금 지키지 않는 것들은 대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상징적인 것들로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붕괴되도록 내버려두어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를 든다면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의 몸으로 동물들을 대신하여 레위기적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들도 다 그같이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11조에 관한 것은 구약 말라기에 명확하게 기록하였고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23,에서 언급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1조는 구약에서 율법시대에 끝난 계명이고 신약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억지 주장을 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11조에 대해 율법으로 명시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성숙하지 못해서 왜 연보를 해야하는지? 어떻게 연보를 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해서 그들을 신앙의 무지함에서 깨우치기 위해 율법으로 하나님께 연보 드리는 최소의 기준으로 11조를 정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9:8,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 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어버리라고 율법에 기록한 것은 이방인의 풍습에 배여 있는 그들을 바르게 교육하기 위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11조의 계명도 연보의 최저 기준을 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온전한 신앙으로 서있는 성도들이라면 오히려 11조가 아니라 내 몸 전체로 온전한 예물을 드리고 산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은 바른 율법의 해석을 마태복음 5:21, 이하에서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 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행동의 죄 보다도 마음의 동기에서 나타나는 죄부터 금하시는 것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 등 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 계명은 성도들의 진실된 말과 정직한 신용으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며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부도덕하고 악질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처세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문서적인 율법, 그 이상으로 인간의 양심과 사고의 동기까지 밝혔고 영적인 문제까지 말씀하셔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2,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18절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율법의 영원성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한정된 어느 시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했고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유대인의 계율을 어기셨습니다.
끝 내 예수님은 율법을 어겼다는 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네 가지로 사용하였습니다.
① 십계명을 가리켰습니다.
② 모세 오경을 가리켰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두루마리의 성경은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③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로 구약전서를 가리켜서 말했습니다.
④ 불문법, 혹은 서기관 법인데 예수님 때의 율법이란 보통 이것을 가리켰으며 그것을 예수님과 바울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참 뜻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이며 그 뒤에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복잡한 규율과 제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을 했으나 그들의 정성은 빗나갔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의 원칙과 뜻을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부모를 향한 존경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털끝만큼도 실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지 전능하사 완전무결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다 할지라도 다시 살펴보면 오점이 있고 실수가 있어서 다시 보완해야하고 또 수정을 해야되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 율법은 결단코 어느 시기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이 됨으로 철회하거나 보완하거나 수정할 것이 없는 영원 불멸한 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완전무결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은 어느 나라든지 다르지 않고 통치자에 따라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권자가 바뀔 때마다 개정하는 국법처럼 시대에 따라 바뀌는 법도 아닙니다.
세상나라들이 많든 법은 시대가 흐르고 역사가 지나면 보충하고 개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은 4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따르고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하는 절대적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법입니다.
4천년 전 모세를 통해 주신 이 율법은 모세와 같은 시대로부터 사사의 시대와 선지자들의 시대까지 예수님 때로부터 사도들의 시대까지 아니 오늘날의 성령의 시대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모두 동일합니다.
오늘날부터 영원까지 일 점 일 획도 변함없고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영원성을 가지는 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지혜로 세우신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율법은 영원히 일 점, 일 획도 수정되거나 보충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야만인에서 문명인까지 피부색이 검거나 붉거나 하얗거나 어느 민족일지라도 문명과 문화가 달라도 시대를 초월해서 수정하거나 보충하지 않아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은 세상 끝 날이 와서 온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새로운 신천지가 시작된다 할지라도 언제나 영존성을 가지는 법인 것입니다.

3, 율법의 권위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19절에서 율법을 알고 가르치는데 따라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로 일컬음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에 대한 비교는 마태복음 18:3-4, 제자들이 서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다툴 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의 차이는 신체의 크고 작은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생각의 차이도 아닙니다.
오직 율법의 권위와 신뢰하는 데서 차별이 되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이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소극적인 율법의 교훈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권위를 희석시키고 멸시하거나 무의식중에 율법을 범하며 율법 지키기를 게을리 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행위는 천국에서 쫓겨나지는 않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도덕적 통찰력의 부족 때문에 스스로 작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의 말씀들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결국은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천국에서 큰 자는 겸손한 자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율법에 명시된 그대로 가르치는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이고 지극히 작은 자는 계명 중에 어느 것 한 가지라도 버리고 가르치면 지극히 작은 자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서 큰 자는 율법에 있는 대로 믿고 있는 대로 가르치는 자라야 하고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율법에 명시된 어떤 계명하나라도 부인하고 외면하며 잘못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어떤 인정을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은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의 귀중 성을 얼마나 어디까지 세우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율법 중 어느 계명이라 해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율법은 결코 임의대로 해석하고 논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을 구약시대의 것이며 신약시대나 성령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식의 궤변은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대했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극히 작은 율법도 복종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음으로 받는 자라면 구약의 한 말씀도 경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말씀들도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의 말씀은 모두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4, 율법의 준수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보다 의롭지 못하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제자들이 소유한 의의 우월성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전가된 의에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학문적으로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이고 바리새인은 율법적으로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형적인 경건과 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의를 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의가 의롭다고 판결될는지 모르지만 하늘나라 심판대 앞에서는 그들의 의는 진정 의와는 정 반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문제는 그 의가 오직 한 분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참 의라고 선고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좋은 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행과 마음이 합쳐져서 경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시를 받는 것이다. 율법은 선행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철두철미하게 어울리는 마음도 소유할 것이다. 그러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나는 그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높은 수준의 의는 갖고 잊지 못하지만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높지 못하다고 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심판을 듣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고 더 진실해야 되고 더 선행이 더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인 선행이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외형적인 선행은 예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형적인 행위의 선행보다 마음과 정성을 함께 요구하셨습니다.
선행이 행위에서 그치는 것보다 참된 믿음도 함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라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천국에서도 큰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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