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복음에 대한 갈망과 대적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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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1 20:35:16
1. 시작하는 말

바울 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설교의 반응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주로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인 청중은 율법 행위, 또는 양심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세상 죄를 지시고 대속제물이 되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설교를 다음 안식일에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의사요 역사가인 누가는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인 복음 설교는 입에서 입을 통해 온 성에 퍼지면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들으려고 모였습니다.

2. 복음을 갈망하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민들 거의 다가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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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의 복음을 들으려고 모인 것은, 그 전 안식일에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인 이방인들이 소문을 냈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주중에 거주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부정적 내지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누가는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시기”의 헬라어 젤루(ζήλου)는 ‘열중’, ‘열심’, ‘경쟁’, ‘질투’, ‘맹렬’을 의미합니다. 본래 좋은 뜻의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고상한 인격이나 사물을 볼 때, 나누어 가지거나, 또는 그렇게 되고자 하는 좋은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경쟁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변질되어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하는 것’, 또는 ‘자신에게 합당치 않은 것까지라도 갖고 싶어하는 그릇된 욕망’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특히 열등감에서 강렬한 시기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변박하고”의 헬라어 안티레곤테스(ἀντιλέγοντες)는 ‘반박하다’, ‘논박하다’, ‘부정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비방하거늘”의 헬라어 블라스페문테스(βλασφημούντες)는 사람이나 사물, 특히 하나님께 대해 비방하거나 욕하거나 불경스런 말을 지껄인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이 복음에 대해 부정적이며 적대적인 태도로 반박하고 모독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감정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도는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복음이 우선적으로 유대인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은 성경 곳곳에서 주장됐습니다. 특권이 아닌 구속사의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배척하였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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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현대 교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헛것이 되게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이사야 49:6을 자유롭게 인용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두 사도의 말을 들은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찬양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었습니다.
“작정된”의 헬라어 테타그메노이(τεταγμένοι)는 종과 횡으로 정렬하는 것을 의미하는 군사 용어인데, 일반적으로는 ‘질서 있게 정렬하다’, ‘배치하다’, ‘정하다’, ‘지정하다’, ‘동의하다’, ‘제정하다’, ‘명령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 대해 칼빈(J. Calvin)은 절대 예정인 하나님의 자유로운 양자 결연에 의한 선택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절대자 하나님께서 미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따로 구별하여 믿게 하셔서 자녀로 선택하신다면, 작정되지 않은 자들은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복음이 아닌 화음이 되는 것입니다.
클라크(A. Clarke)는 “작정된”으로 번역된 단순 동사가 어떤 종류의 운명 예정(pre-ordination 또는 pre-destination)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웨슬리(J. Wesley)는 “누가는 결코 ‘예정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무슨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 전파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정되었다’는 말은 이 설교를 듣고 깨닫는 순간에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설교하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그 청중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어 주어서 그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 바울의 말은 마치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니 그들은 믿었다’는 말로 들린다.”라고 주석했습니다.
한마디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란 성령의 역사로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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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후반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에베소서 2:8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선교로 많은 사람이 믿어 구원받았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도 주의 말씀인 복음 설교가 비시디아 안디옥 온 지방에 두로 퍼졌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 선교의 놀라운 열매와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시기하고 질투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같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냈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릇된 종교적 신념과 교리라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매인 유대인들은 복음을 대적했고, 지역 유지들을 선동하여 두 사도를 쫓아냈습니다. 실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을 하면서도, 그 영적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성적이며 종교적인 지도층 역시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쫓는 짓이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을 기회를 차 버리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거주민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 영생을 얻을 기회를 막아 버리는 짓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성인들이나 종교인들이 불순하고 부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비열한 짓은 세상 권력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유대 교권자들이 로마의 권력자인 빌라도를 충동질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선동된 유대교인인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에게 쫓겨난 두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해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누가복음 9:5을 보면,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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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의 지역을 통과하는 여행을 한 후, 다시 유대 땅에 들어오기 전에 신과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유대 땅은 성지로, 이방 땅은 부정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취지는 제자들을 대적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부정한 장소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분노나 악의를 표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한 사람들에 대한 충격적인 경계와 회개에 대한 마지막 촉구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쫓겨난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간 이고니온(Ἰκόνιον)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직선거리로 약 125㎞ 떨어진 곳이며, 비옥한 평야를 낀 타우루스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고, 루가오니아 지방의 수도로서 번영했습니다. 그 먼 길을 자동차도 없는 시대에 말도 안 타고 복음을 전하러 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선교를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하며, 박해와 조롱을 당해 보았습니까?
그런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불만과 원망과 슬픔 대신에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느라 당하는 핍박을 기뻐하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외적 표현이고, 그러한 영적 기쁨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3. 맺음말

바울 사도가 설교한 복음은 입에서 입을 통해 온 성에 퍼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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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라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유대교인들은 시기하여 비방하고 핍박했습니다. 같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들은 영생의 복음을 배척하고, 지역 유지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을 쫓아 버렸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지만, 안 믿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복음 설교가 거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반석 위에 더욱 확고히 거하는 것이 되기 바랍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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