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손정도목사의 민족사랑
백영찬
- 2700
- 2015-02-25 00:58:12
손정도목사 84주년 추모행사 안내
일시 : 2015년 2월 26일(목) 오전11시
장소 : 종로구 김상옥로 30 기독교연합회관 3층
이번행사는 감리교회에서 철저하게 외면 하였던 타 교단인들이 주관하는 감리교인 애국지사 추모기념식에
처음으로 전용재감독회장이 총회차원에서 참여하는 행사로서 의미가 크다.
감리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의로우신 분들의 참석을 기대합니다.
(손정도목사의 생애)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72~1931) 목사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홍리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3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84주년이 되었다.
그는 23세 때 관리등용시험을 보러 평양에 가던 중 우연히 하룻밤 묵게 된 목사집에서 기독교 교리를 접하고는 개종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27세인 1909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평양 남산현교회와 진남포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은혜로운 말씀이 듣는 이로 하여금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교회의 부흥이 날로 번창해 갔다.
그는 일제로부터 자주독립하여 실의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으로 도산 안창호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대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는 등, 민족 운동가들과 연대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손목사는 전라남도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으나 오히려 가는 곳 마다 복음을 전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기에 정열을 쏟았던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손목사는 1914년 동대문 교회(13대 담임)로 부임을 하게 되었고 그가 목회를 시작한 후 대부흥의 전기를 맞이하여
1천여명의 성도가 모여들었다.
이 후 1915년 정동교회로 부임한 후 손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키며 3.1운동을 태동 시킨후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1919년 2월 중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아예 망명하였으며, 이 사건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는 동대문교회에서는 김상옥의사를 정동교회에서 유관순열사를 길럿다고 회고 하였다.
상해로 가서 그곳에 있던 망명객들과 함께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고, 1919년 10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초대 의정원(국회) 의장에 손정도 목사가 선출되었다.
1921년 임시정부를 떠나 북만주 길림으로 가, 그 곳에서 목회를 하며 교회를 거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예배당과 자택은 의지할 곳 없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비밀아지트로 사용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길림지역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는 고향의 땅을 모두 팔아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하며 농업공사의 조성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 후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 후유증이 악화되어 손정도 목사는 1931년 2월 19일 49세의 나이로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세월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고,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모범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현한 독립운동가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감리교의 자랑스런 인물이다.
그의 장남인 손원일 제독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군의 창시자로서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다.
1872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그는 이 지역의 유명한 기독교가문 강돈욱 장로 집안을 알게 됐고, 숭실중학교 동문인 친구 김형직과 강반석(강돈욱 장로의 딸) 집사 사이에서 태어난 김일성과 후에 인연을 맺게 된다. 김형직은 1926년 죽음을 앞두고 그 의 아들 김일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길림에 있는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유언했다.
당시 중학생 나이였던 김일성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손 목사를 찾아가 의탁했고,
손 목사의 보살핌으로 소년기를 기독교 신앙 안에서 보냈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매일 새벽 교회 종을 치며 새벽을 깨우는 신앙생활을 했다.
이와같은 인연으로 인하여 김일성은 1994년 사망하기 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개업 의사로 생활하던 손 목사의 아들이자 친구인 손원태씨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손 목사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집사의 작은아버지는 강양욱 목사로서 조선기독교도연맹(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설립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강영섭 목사가 30여년 가까이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이끌면서 한국교회와 교류했고,
얼마 전 그의 아들 강명철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의 기독교 최고 지도자로서
그들은 북한복음화와 복음통일을 위하여 한국교계의 선봉에서 일하는 감리교회와 함께 교류하고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와같은 연유로 인하여 손정도목사는 분단된 남과 북에서 동시에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나라와 민족사랑은 복음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상암교회 백영찬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