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자 (큰 사람 대인)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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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9 20:12:23
큰 자
요나서 3:1-4, 열왕기상 10:1-3. 마태복음 12:38-42.


국어사전에 “큰 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① 키가 보통보다 큰 사람, ② 위대하고 이름난 사람, 또는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대인, 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큰 자”는, 후자에 속하는 말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말은, 어떤 큰 이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기적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지, 사람들의 불손한 요청대로, 의문에 대한 확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진리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심령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게 하는, 의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불치의 병자들의 병을 고치시는 일들이, 사탄의 도움을 받았다는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대로(고전 1:22), 유대인들이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한 것은, 그들 식으로 율법을 이해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유대인들이 인정하도록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을 걸며, “선생님이여!”하고 부른 말도, 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상, 백성들과 작당해서, 예수님을 철저히 몰락시키려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한 것도, 예수님이 지금까지 수많은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신 것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며, 귀신들을 쫓아내고,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린 일들만으로도, 보여준 표적들이 불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이적들 중에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은혜와 자비로, 비천한 죄인들과 불치의 병자들을 도와준 찬란히 빛나는 이적들이, 예수님을 죄와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인식하고, 신앙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영 안이 밝고, 영 음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눈이 어둡고, 영 음을 들을 수 없는 그들은, 이런 표적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증거를 필요로 했고, 그 무엇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불신앙들은, 그 어떤 확실한 표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늘이 움직이고, 구름이 빙빙 돌고, 해와 달과 별들이 익살을 부리고, 천사들의 무리가 은하수를 타고 시위행진 하기를, 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천둥번개치고, 폭풍으로 땅이 흔들리고, 지진이 나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뿌리 채 뽑히며, 바위들이 터지는 분위기를 보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우주와 자연계가 운영된 것과는 달리, 신속하거나 그슬리며 역행하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증거를 요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요구들을 선선히 받아들였다고, 잠시 상상해 봅시다.
이 같은 경이와 전조들은, 일시적으로 그들의 눈에 놀라운 경이와 감탄을 자아내게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깊은 영적인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할 것이며, 죄에서 구원받을 길도 제시하지 못했을 것이고, 신앙과는 연분이 없는 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의 육체적 요구가, 병적인 면에 대해 반응하며, 불건전한 갈망을 자극시킴으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는 바다 물처럼,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을 계속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면, 이전의 불만과 의심과 거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 분명한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그런 표적 하나만 보면, 믿을 수 있겠다는 약속은 거짓 된 신앙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속마음이, 그들로부터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보여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악하고 음란한 불신자들에게까지,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신 예수님은, 참으로 "큰 자" 이십니다.

1. 표적(이적)에서 요나 보다 큰 자 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확실한지를 알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북극에 가면, 대기권의 하늘에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오로라가 나타납니다.

열사의 사하라 사막에는, 목마르고 지친 나그네들을 유혹하는, 신기루가 오아시스처럼 나타납니다.

영화관에 가면, 화면에는 온갖 많은 사람들과, 웅장한 건물들과, 각가지의 짐승들이 나타나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실상이 아니라 허상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그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손으로 만져보고 믿겠다고 의심했던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확인하려고 하는 그들은, 악하고 음란했기에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갖 선의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와 반대되는 길을 추구하는 적대적 의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악하고 음란한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배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불 신앙적 행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과 다른 우상사신을 섬기고 따르며, 불충하는 영적 간음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도,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을 현대에 적용한다면, 교회에 외형적으로 소속되어있으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장하면서도, 그의 말씀을 악용해 복음의 명령을 불순종하며, 이 같은 유형의 다른 사람들과 연합함으로 관계를 깨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의 범죄 함을 보고, 멸망하시기 전에, 요나에게 사명을 주어, 먼저 니느웨로 보내셔서 회개시킬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을 주시며, 니느웨로 가서 증거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지중해를 지나갈 때, 하나님은 바다에 사나운 풍랑을 보내셔서, 요나가 탄 배를 깨뜨릴 정도로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 값으로, 선원들에 의하여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에게 통째로 삼켜져서, 사흘 동안이나, 물고기 뱃속에서 괴로운 날들을 보내며, 배를 타고 있을 때보다 더 한 고통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를 명하여, 니느웨에 토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에 의해, 삼켜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삼켜진 후에 산채로 보호되었다가, 3일 만에 토해냄을 받았고, 위험을 면했으며, 그의 임무를 다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고기 배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서 지내야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셔서 밤낮 사흘 동안 지하 땅속 무덤에서 보내야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표적은, 다른 표적들 중에 제일 큰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동안 물고기 배속에서 지냈던 것을 진술하고, 이 역사적 사실에 자신을 도장 찍으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불순종한 선지자이지만, 예수님은 순종한 메시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 받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만민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적과 기적들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솜씨입니다.
요나가 3일 만에 위험을 면한 것처럼, 예수님도 3일 만에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요나가 다시 니느웨로 가 사명을 감당했듯이,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셔서 인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요나의 사건은, 신약의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실 예표이며 증거였습니다.

고기가 입을 열어 요나를 토해냈듯이, 지하의 무덤도, 창조주 하나님을 더 이상 묻어두지 못하고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빌린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2. 말씀에서 요나 보다 큰 자 입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서 멸망의 선언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를 멸망하시기보다는, 구원받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고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셔서, 니느웨로 가서 증거 하게 하셨는데, 명령을 받고도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도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으로, 요나가 탄 배를 혼쭐나도록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고기가 통째로 삼켜버렸습니다.
고기 배속에 들어간 요나는, 고통 중에 3일을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를 명하여 니느웨로 토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야 했고, 억지로라도 “40일 후에 니느웨는 멸망 한다”는 말씀만 전파하였습니다.
아니 그것이 요나가 바라는 바였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선포하자, 40일이 지나도 니느웨는 진노의 멸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이 짧은 설교를 듣고도, 왕을 위시한 모든 백성들과 짐승들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요나의 짧은 설교를 듣고도, 멸망의 대상 이였던 니느웨 왕을 위시한 모든 고관대작부터, 부자들과, 모든 백성들과, 가축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며 철저히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회개한 요나도 살고,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도 살았으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은, 회개하지를 않아서 멸망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죄인들도 회개를 하면, 멸망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니느웨 왕을 위시한, 모든 신하와, 백성들과, 가축들까지, 철저히 회개한 것은 실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구원받은 니느웨 백성들의 수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만 12만 명이요, 육축도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하신 복음을 듣고,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을 받은, 인류의 수는,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나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범죄하고 완악하여, 진노와 멸망을 작정하신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방주를 완공할 때까지 120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참으시며,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소원하셨습니다.
노아도, 그 동안 쉬지 않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권하고 설교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도 120년 동안이나, 천천히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외치며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노아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결국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그들의 완악하고 범죄 함이 극에 달했을 때,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말씀을 외치는 자가 없어서 멸망을 받고, 저주를 받았다고 핑계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천사들을 보고 남색을 즐기려 몰려왔을 때, 롯은 그들을 만류하며, 범죄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권하고 제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롯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오려고까지 했고, 보다 못한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회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불과 유황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니느웨 사람들처럼, 회개하는 양심을 가졌더라면, 롯과 천사들의 권고에도 회개했을 것이고, 멸망 대신에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권고를 무시하고, 계속 범죄 하려다가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의 7족속과 31왕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에게 멸망을 받았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온갖 가증하고 더러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증거 하는 사람이 없어서였나요? 아닙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선민의 보호받음과 승승장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문을 듣고, 신분을 속이고 찾아와 화친을 맺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너무 짧았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120년이나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족속들은, 같은 소문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으며, 살기를 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전쟁을 준비하고 싸우려고 모였다가 하나님의 멸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한 가나안의 거민들은, 모두 범죄 하여 멸망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면,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5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한번 말씀을 증거 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성령을 속인자의 영혼이 떠나가 죽었으며, 죽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쳐서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여행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살리고 구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운 사람으로, 교회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이 밖에도, 역사에 남을 만한 훌륭한 전도자와 설교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전도 설교와 같은, 획기적인 변화의 역사는 없습니다.
단 몇 마디 외치는 요나의 설교를 듣고도, 온 성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진노와 저주로 무서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서, 니느웨는 회개하여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온 선지자 한 사람의 외침을 듣고도, 율법의 위협 외에는 아무런 증거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람들은 그 선지자가 외치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금식하며, 회개하고 죄악을 떠나, 행실을 고쳐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변혁의 사건도 놀랍거니와, 능력 있는 요나의 설교도 위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요나보다도 더 크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을 주셨고, 보내어 증거 하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인 반면에, 예수님은 명령하시고 보내신 분이시며, 요나가 말씀의 전달자인 반면에, 예수님은 말씀을 주신 분이시며, 요나가 고기배속에서 구원받은 자인 반면에,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죽을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나 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3. 지혜에서 솔로몬보다 큰 자 입니다.
동서고금의 역사 가운데, 솔로몬보다 지혜롭고 부유하고 화려하게 살다간 사람은 없습니다.
또 그의 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고, 성서에 나타난 그의 지혜의 글은, 지금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지혜와 감동을 줍니다.
그의 지혜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세계 각 국에 전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그 지혜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0:1-13,「스바」여왕은 땅 끝에서, 수천 마일을 많은 위험과 고난과 시간을 허비하고, 경비를 써가면서,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솔로몬의 지혜는 얼마나 많은 경비를 쓰고서도, 듣고 싶은 보물들 중에 보물이며, 놀라운 지혜의 보화입니다.

논어에 “아침에 지혜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스바 여왕도 시간과 물질 등,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솔로몬의 지혜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어, 많은 돈과 시간을 허비하면서, 지혜와 경험과 기술과 학문을 배우게 합니다.
학원에서 온갖 지능과 기술을 배우게 합니다.
현장에서, 일터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학교와 학원과 일터와 직장에서 배우고 익힌 지혜로, 세상을 사는 방법과 능력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매한 이방 여자가, 먼 곳으로부터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와, 사람의 지혜를 듣고도 만족했는데, 하물며 그 사람을 창조하신 자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주님은 솔로몬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솔로몬의 입술에, 말씀을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의 말들을 설파하게 하신,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이태리에 가면, 유명한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이 만든 조각과, 그가 그린 그림들이 있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운 감탄과 경이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 그 미술품들이 귀합니까? 그것을 만든 미켈란젤로가 귀합니까?

영국에는 유명한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희곡들은, 수백 년 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감동을 주는 작품들입니다.
그러면 그 희곡들이 귀합니까?
그 희곡을 쓴 셰익스피어가 더 귀합니까?
물론 작품들도 귀하고 좋지만,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이 더 위대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도 귀하지만, 솔로몬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더 위대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요, 예수님의 지혜는 유일신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이 땅의 지혜요, 예수님의 지혜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육신의 지혜요, 예수님의 지혜는 영혼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인간을 만족시킨 지혜요, 예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한 생애의 지혜요, 예수님의 지혜는 다시 살고 영생을 얻게 하는 부활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요, 예수님의 지혜는 스스로 주시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지혜는 사람을 깨우치고 영생을 주시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몇 백 배 몇 천 배를 모은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지혜에는 조금도 비할 바 못되는…, 참으로 예수님은 위대하고 놀라운 지혜의 총 본산이 되십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주위의 사람들을 매혹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죄인의 죄를 사하시며, 지혜로는 모든 인류를 진리로 인도하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사랑하고,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니,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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