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 선교131주년 1차 학술심포지엄을 다녀와서

유은식
  • 2138
  • 2015-03-18 09:24:57
감리교회 선교131주년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선교 130주년
1차 학술심포지엄을 다녀와서


감독회장님과 집행부에 감사

그동안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 130년] 기념사업을 한다 할 때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을 때 필자는 지난 31회 총회에서 2015년은 한국선교 131년이기에 131년으로 표기해야 하며 특정인 표기는 부당하다 했다. 그런데 그냥 진행되더니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선교 130년]으로 바뀌었다. 이에 본부를 찾아가 왜 꼭 130년이 들어가야 하느냐고 묻기도 했는데 [감리교선교 131년 내한주제 130년]으로 간다하더니 [감리회선교 131년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선교 130년]이라고 최종 결정이 났다 하였다. 이중 가장 맘에 드는 타이틀이 [한국감리회 131주년]기념 사업이지만 그래도 [한국감리회 131주년 내한주재 130년]인데 아무튼 이렇게라도 결정이 되었다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를 받아주신 감독회장님과 집행부에 감사를 드린다.

오늘 기념사업의 첫 행사인 1차 학술심포지움에 와 있다.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에 오면서 현수막부터 보았다. 작은 글씨나마 감리교(선교)131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뿌듯했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함은 130년으로 기념한다면 특정 부분만을 기념하는 일이지만 한국감리교회 131년을 기념하면 131년의 역사 전체를 기념하는 것이고 오늘의 구성원인 각각의 나도 포함되어 기념하는 것이니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하는 마음에서였다.


3개 신학대학 교회사 교수들의 잠자지 않은 외침

그동안 타이틀에 대해 기독교타임즈에 5차례에 걸쳐 한국감리교회 선교 131주년으로 가야한다고 피력하며 이에 대해 감신 목원 협성의 교회사 교수들이 지난 역사에 대해 기념하는 일에 어찌 침묵하고 있느냐며 이는 직무유기라고 까지 했다. 오늘은 기념사업의 첫 행사로 아이러니하게도 필자가 이처럼 강력히 어필한 그 당사자들이 모두 나와 발제를 하고 또 필자는 그들의 강의를 들었다.

이덕주교수 김칠성교수 하희정교수 서영석교수가 그들이었다. 그러나 미안할 정도로 그들은 1884년이 감리교선교의 원년이라고 하나같이 주장함을 보았다. 교회사 교수들이 감리교회 행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필자가 우려했던 바를 외면하는 그들이 아니라 발제를 통해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게 했고 필자의 주장이 저들이 정성껏 발제해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행사의 원제는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선교 130기념 학술심포지엄이었지만 오늘 심포지엄의 그 내용은 한국감리교회 선교 131년이었다.

오늘 모든 행사를 마친 후 저녁시간을 같이 했다. 네 교수 모두 함께 했다. 이덕주교수가 기독교타임즈에 기고된 필자의 글을 본 모양이다. 그 글을 보고 섭섭했다고 한다. 교회사 교수들을 비하하기 위한 주장이 아니었고 그 만큼 바로 가야하지 않느냐는 입장에서 쓴 글이라 하며 양해를 구했고 또 오늘의 내용이 필자의 주장을 확인한 만큼 앞으로 더 이상 3개 신학교 교수들을 겨냥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이런 주장은 한 번이면 족한 일이다. 각 발제자들의 강의를 듣고 난 소감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강의 전부에 대한 소감 보다는 함께 공감하며 느꼈던 한두 가지만 소개하려 한다.


교수들의 발제와 필자의 소감

매클레이의 선교사역 / 이덕주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한국선교는 매클레이가 고종에게서 선교윤허를 받음에서 시작되었고 또 양주삼 총리사가 밝혔듯이 그는 개신교 첫 선교사라고 피력했다. 그동안 많은 자료를 보면 김옥균이 1884년 7월 3일에 매크레이에게 와서 전 날 국왕의 허락이 있었다고 함으로 선교윤허 일에 대해 7월 3일로 기록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지만 전 날 국왕의 허락 이라는 대목에서 필자는 선교 윤허일이 7월2일이라고 그동안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이덕주교수가 선교윤허일이 7월 2일이라고 강조해 줌으로 내심 반가웠다. 또한 매클레이의 선교에서 볼 때 그는 일본주재선교사이면서 동아시아 3국인 일본 중국 조선선교에 임하였다고 피력하며 3국 관계 즉 조선과 일본 조선과 청국 일본과 청국의 역학관계를 설명 할 때 호기심을 가지고 들었다.

여기에 아쉬움이 있다면 고종의 선교윤허가 단순 선교윤허만이 아니라 이것이 당시 조선 정치적 상황과 윤허를 한 고종의 입장이 설명되지 않았음이다.


한국감리교회의 주추 돌을 놓은 아펜젤러선교사 / 김칠성교수(목원대학교)

김교수의 강의는 처음 들었고 또 오늘 처음 말을 나눴다. 가장 머리에 남는 이야기가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조선 제물포에 첫발을 내 딛으므로 조선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입장에 그들은 제물포에 당도하기 전 4월 2일 부산항에 당도했다는 것으로 부산이 먼저라고 하며 이는 1년 전 매클레이가 6월 23일에 도착하기 전 같은 해로로 6월 20일에 부산을 거쳤다고 했다.

이는 필자도 아펜젤러의 부산 도착은 기독교타임즈에 기고한 바 있고 또 최근 다른 곳에 기고하기 위해 쓴 글에 매클레이도 같은 여정에서 제물포에 도착하려면 부산을 경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피력하며 또 이미 1884년 6월에 부산을 경유했다면 이는 1885년 아펜젤러가 4월 2일에 도착한 것 보다 의미가 크다고 했다. 이덕주교수의 발제에서도 매클레이가 개신교 첫 선교사라고 본다면 정식 선교사로서 그 신분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조선에 당당히 입국한 것으로 부산에 첫 발을 내 딛었다면 130주년 준비위원회가 계획한바 아펜젤러가 4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여 총실위를 부산에서 모인다고 함도 의미 있다 하겠지만 6월 20일 부산에 도착했음을 이젠 더 크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언더우드는 4월 5일에 도착하여 한양으로 들어가지만 아펜젤러는 한 주간 머물다 일본으로 갔고 스크랜턴이 5월 3일에 도착하지만 20여일 머무르다 한양으로 또 재차 6월 20일에 들어오지만 7월에 한양으로 들어가 선교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누가 첫 선교활동을 한 것이냐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서영석교수는 따로따로 볼 것이 아니라 조선개척선교 3총사로 하나로 봄이 마땅하다고 반문하였다.

이에 필자의 생각도 같다. 타 교파 선교사들은 각각 들어왔고 또 감리교회 선교사들도 이 후에는 파송을 받아 온다지만 개인적으로 들어오지만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부 메리스크랜턴은 매클레이와 함께 3월 5일 선교사회의를 가지고 들어왔다. 박영효와 이수정도 함께했던 선교사회는 이들을 각각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팀으로 묶어 놓았다. 이 선교사 회의에서 선교회장에 매클레이 부회장에 아펜젤러 회계에 매클레이가 정했다.(유동식교수와 이만열교수는 매클레이가 조선선교 감리사라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 최초의 감리사이다.) 이 말을 함은 초기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그리고 메리스크랜턴은 각각의 개인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 온 것이 아니고 또 조선선교회가 조선에 들어오는데 단체입국이 아니라 조선정세의 영향으로 전략상 개별적으로 조선에 왔다면 오늘 서영석교수나 유동식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지적한 대로 조선개척선교3총사로 하나로 봄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녀를 생각하며 감리교의 오래된 미래 메리스크랜턴 / 하희정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필자는 역시 하교수의 강의를 처음 들었다. 인상 깊게 들었다. 메리스크랜턴의 인간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그녀의 삶에서 감리교회의 선교적 정체성 곧 가라 고난의 현장으로 ... 이 대목에서 감명을 받았다. 또한 크게 공감한 것은 그녀의 “포용과 협력의 정신으로 리더쉽을 넘어 파트너 쉽으로”의 강의는 공감을 넘어 감동이 되었다.

특히 메리 스크랜턴의 이런 신앙적 정신이 장로교회가 받아들여 1907년 4교파의 장로교회가 하나의 독노회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평소가 가졌던 필자의 궁금증을 물었다. 장로교회는 메리스크랜턴의 영향을 받아 1907년에 독노회로 하나가 되었는데 더욱이 메리 스크랜턴 더 나아가 정작 이런 신앙적 정신을 가진 감리교회는 어찌 1930년에나 가서 기독교조선감리회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하교수는 우리 감리교회는 교파 통합만 한 장로교회와는 달리 1907년에 남북감리교회의 두 신학교를 하나의 신학교인 협성신학교로 통합하고 계속해서 교회의 사역을 통합해 나가고 1930년에 교단을 통합하는 점진적으로 소프트웨어부터 통합해 하드웨어가 통합되었다고 설명하므로 그동안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시간이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한국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B. 스크랜턴 / 서영석교수(협성대학교)

스크랜턴의 병원을 고종이 시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한 바 시병원이란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졌는데 스크랜턴의 조선어 명인 시란돈의 시로 이 시자가 베풀시施로 고종이 이미 스크랜턴의 인간 됨됨이를 파악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필자는 고종의 선교윤허에 참여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고종의 마음에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이는 선교사들의 일에 고종이 참여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부국강변의 조선이 되길 원하고 바라는 고종의 의도대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기여했다고 보고 싶다. 이런 입장은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배재학당 이화학당 보구여관 등 선교사들의 활동에 이름을 하사하며 지지한 반면 장로교회 활동은 이렇게 이름을 하사한 것이 미비하다. 알렌이 병원을 세우자 고종은 광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나 바로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의 하사는 더 이상 없었다고 본다.

필자는 서교수에게 질문을 하였다.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선교 130주년 기념사업을 한다면 스크랜턴이 설립한 동대문교회가 지금 폐지상태에 놓였는데 이에 대해 130년 기념사업회가 뭔가 이에 대한 대책이나 방향제시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필자의 짓궃음이었나. 직답을 피하며 잘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렇게 오늘은 모처럼 인천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필자에게 던져진 4교수의 발제는 참으로 유익했다. 9회 말 투아웃에서 터진 만루 홈런이다. 한국교회역사를 위해 발제를 한 교수들에게 감사하며 그동안 필자가 피력한 각 부분들이 잘못된 생각과 편견이 아니었음을 발견하고 한국교회 역사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감리교회 목사들은 한국교회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진급 중에 있는 교역자들에게 한국감리교회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 한국감리교회사를 제대로 알면 근대사를 알 수 있고 근대 민족사를 제대로 알면 감리교회사가 보인다.

필자는 교회사에 대해 정석으로 배우지는 않았다. 학부 때 윤병상 교수에게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김홍기(도표만들기), 성백걸(시대구분), 이덕주(역사관)교수에게서 배운 것이 전부였고 졸업 후 교회사 책을 가지고 씨름한 것이 아니며 각 사건마다의 깊이 있는 지식으로 다져진 게 아니라 과거의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를 가지고 늘어놓고 퍼즐 놀이하며 서로의 관계를 보고 정리해 가며 이야기를 만든 것이 지난 역사에 대해 정확히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였고 또 대단하다는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각 교회사 학자들이 부분적인 것 즉 자기 전공부분을 가지고 역사이야기를 나누지만 이젠 감리교회의 부분적인 역사가 아닌 통사로서의 감리교회사가 정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모으고 살펴 본 자료들을 가지고 집필을 해야겠다는 포부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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