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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위한 거룩한 낭비
관리자
- 2304
- 2015-03-16 20:08:16
(삼백데나리온의 나드 향유)
요한복음 12:1-8.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들리셨을 때는 유월절 6일 전이였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집에 들리셨을 때 그 집에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누가복음 10:38-42,에서처럼 음식을 만드는 솜씨를 발휘하여 준비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을 때 이였습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값비싼 나드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주의 말씀의 향기에 취하여 기뻐하고 있을 때 육신적으로 나드향기의 새로운 냄새로 황홀하게 번져오자 가득한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선한 것을 선하게 보지 못하고 오히려 악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의 선한 일을 선하게 보기 전에 비판하고 트집을 잡는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5,의 말씀과 같이 “그 쌓은 악이 악을 내고 선을 쌓은 사람은 선이 그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계산에 빠른 가롯인 유다는 “3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왜 허비하느냐?” 하고 비난하였습니다.
3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였으므로 300일을 꼬박 일한 품삯이며 1년을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일하면서 모아야 하는 많은 돈입니다.
가롯인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낭비하고 허비하는 것으로 보았고 불만 섞인 화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궤를 맡은 도적이기에 훔쳐가려는 욕심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성경은 밝힙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저를 가만두어라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구제는 진정한 구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예수님 없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예수님 없는 구제는 교만과 자기 자랑과 만족을 위한 위선에 빠지기 쉽고 예수님 없이 사랑하는 것은 정욕에 빠지기 쉬운 행위입니다.
구제와 사랑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중에 이루어 져야만 합니다.
신문이나 TV에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제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에는 구제를 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나 되면 양로원이다 고아원이다 지체장애자들의 수용시설을 앞다투어 선물들을 싸들고 다니면서 불우한 이웃들을 돌아보고 선거유세를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들해지는 것을 봅니다.
선거 유세가 끝나면 얼굴한번 비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이는 형제는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한다 하느냐?”
마리아의 이러한 헌신은 자신의 이익이나 생색을 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1, 생명을 구원해 준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사람은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이성의 동물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은혜를 입고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감사도 모르고 산다면 다른 동물들보다 낳을 것이 무엇입니까?
심지어 까마귀도 그의 부모를 1년 간 공경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도 며칠만 돌보아 주면 은혜를 알고 기억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의 가정도 예수님께 입은 은혜가 남달리 많은 가정입니다.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나 되어서 썩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을 막은 돌을 굴려내게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을 때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한 분밖에 없는 죽은 오라비를 무덤에 장사되어 썩어가고 있을 때 살려준 은혜를 어디에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무덤 속에서 썩고 냄새나던 시신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죽은 나사로와 같이 죄악으로 더러워져서 냄새나고 부패하며 부정하고 흉악한 죄인들인데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주셔서 살리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3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3천 데나리온을 드려도 부족하고 3만 데나리온도 부족하며 3백만 데나리온을 드려도 부족할 것입니다.
아니 백골난망이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몸과 뼈를 갈아서 드려도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가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서 예수님께 끌려갔던 여인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큰 죄인이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녀가 지은 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은혜의 보답으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지은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았을 때 그 은혜야말로 얼마나 크겠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듣고 예수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던 모습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며 감사하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제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 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이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나라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단정치 못하면 청와대를 비롯한 국정 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항을 통하여 외국에도 나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서 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 할 수 있겠습니까?
미가 선지자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 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3백 데나리온의 나드향유를 주님께 드림으로 감사를 드렸으니 참으로 잘한 일이며 당연한 일이며 본받아야 할 행동입니다.
2, 예수님을 향한 존경심과 충성심에서 드렸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표현합니다.
머리를 기르고 아름다운 것을 장식하여 가꾸는 것은 문화인이나 미개한 종족이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성경은 여자들에게 성전 안에서 모자를 쓰거나 수건으로 덮도록 하였습니다(고전 11:5, 15).
머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드렸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과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는 행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존경하고 배우고 따라야 할 위대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영웅들이 있습니다.
위인들이 있습니다.
성웅과 성현들이 있습니다.
철학자들과 문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내 몸의 일부를 드려 감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도 나를 위하여 말 한마디 대변한 적도 없었고 나를 기억한 적도 없었고 나를 위하여 희생한 것도 없으며 나를 위하여 죽은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생명까지도 희생하시고 죽으셨기에 우리의 몸과 생명을 드려도 감사하고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에서 지면 상대방의 발 앞에 엎드리고 상대방의 발을 자기의 머리에 얹어서 항복을 맹세하였습니다.
노예들도 주인의 발을 머리에 얹어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남녀가 만나면 여자의 손을 입에 대어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의 지극한 정성을 3백 데나리온의 나드향을 부어드림으로 표현하고 그도 부족하여 가장 아끼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존경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은 참으로 세상의 어느 누구의 발 보다 귀한 발입니다.
사랑의 발입니다.
복음의 발 입니다.
희생의 발입니다.
생명의 발입니다.
영생의 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귀한 것을 드린다 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미국의 단편작가 “오 헨리”의 단편 중에「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는데 남편에게는 조상부터 내려오는 금시계가 있었고 아내에게는 20년이나 길러온 갈색의 윤기 나는 아름다운 머리털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가난하여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없었습니다. 서로에게 무엇을 선물로 줄까 고민하던 두 사람이 저녁에 들어와 서로 내어놓은 선물들은 남편은 금시계를 팔아서 아내의 머리핀을 샀고 아내는 자기의 머리를 팔아서 남편의 금시계 줄을 샀더라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헌신적인 사랑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향기를 맡게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온 집안의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렇게 자신의 몸의 일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하여도 부끄럽지 않고 자신에게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하여도 감수하여 낼 것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바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낭비는 자신을 위하는 큰 축복이며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마리아의 이 위대한 사랑의 행위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행위이며 칭찬 받을 모범적인 사건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를 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마음으로 정성으로 생활로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인색한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을 받고 주님께 드릴 때 내게 축복으로 하늘에 쌓이는 일입니다. 하늘에 많이 쌓아 영원한 축복으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남에게 주기보다는 받기를 좋아합니다.
받기는 좋아하면서도 주는데는 인색한 이기적인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몰려드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가 병 고침을 받고 떡을 얻어먹고 말씀을 듣기 위하여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려고 찾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아니합니다.
예수님 주위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을 듣고 있었으나 마리아 많이 예수님께 가장 아끼는 향유를 부어 드린 것은 마리아는 받기만 하는 여자가 아니고 드릴 줄도 아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행한 마리아의 선한 일을 예수님께서는 오래도록 기념으로 남겨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장사를 위해 이를 두게 하라”고 까지 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의 왕족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뭍일 무덤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경비와 물자를 들이며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피라미드를 쌓았습니다.
그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에 울창하던 숲에서 나무들을 베고 돌을 쪼개어 냄으로 황폐화시켜 오늘날에는 사막으로 변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열사의 사하라사막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만든 피라미드의 깊은 곳에 묻혔던 시신들은 방부제를 넣어 미이라로 만들어 장사하였으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왕조들로 남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자 여인은 자신이 죽으면 묻힐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무덤들이 죽은 후에 무슨 유익을 줍니까?
우리나라에도 조상들의 무덤을 왕릉과 같이 크고 아름답게 비석과 조각품들을 만들어 세우고 자연을 훼손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위하여 아무것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두 개의 통나무들로 십자가의 처형 틀을 누군가 만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군인들을 모아 체포 조를 정하고 점검하며 검과 몽둥이를 준비한 채 악한 작전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믿음을 소유하기보다는 대중들의 마음이 자기들에게서 멀어져가게 하는 장본인인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계교를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에 기도하실 때 함께 기도하여 도와달라고 애원하여도 제자들은 모두 피곤하여 졸며 도와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셔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고 빌라도의 불법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판결을 받으셔도 아무도 변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형 판결은 로마인 빌라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지심은 구레네 시몬을 통해서 장사되심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서 묻히셨던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준비된 것은 마리아의 헌신적인 나드향유를 부어드린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에게 죽음을 위한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받으셨던 예수님은 죽으시기 직전에 나드향유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살았을 때에도 중요하지만 죽을 때 장사 준비는 더욱 중요합니다.
죽음의 준비가 호화롭게 장식된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저편 하나님 나라로 가느냐 못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죽은 뒤에 주님이 계시는 나라로 들어 갈 수가 있다면 그는 잘 살아왔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주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생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어느 교회의 한 장로님은 헌금을 작정하실 때 100원을 부르고 조금 있다가 다시 110원을 부르고 다시 120원을 부르고 계속하여 올려서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마귀가 너무 작정을 많이 한다고 속삭이며 막으므로 그때마다 마귀를 이기기 위하여 자꾸 높여서 부른다고 하드랍니다.
마귀가 틈을 타고 막을 때마다 높여서 부를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의 3백 데나리온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나드향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지식입니까?
가정입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정성과 봉사와 충성과 헌신이 예수님께 바쳐질 때 예수님께 인정받고 칭찬 받고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