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좋은 군사

관리자
  • 2074
  • 2015-03-18 19:16:46
십자가의 좋은 군사
여호수아 3:7-16, 디모데후서 2:3-4.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쟁의 성격을 중요하게 되었으며 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 군인은 더욱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군인은 국경을 지키고 영토를 넓히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얼마나 발달하고 편히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국력이 얼마나 강하냐 하는데 있습니다.
그에 따라 군인이 얼마나 나라를 잘 지키고 국민을 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군사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겠습니다.

좋은 군사란 결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는 미디안의 메뚜기떼와 같은 적들을 쳐부수었고, 이스라엘이 아랍전쟁에서 6일 전쟁이라는 가장 짧은 전쟁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던 교훈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6월이 되면 6,25가 생각이 나는 달입니다.
3년간의 전쟁은 얼마나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습니까?
나라를 시키겠다는 일념에서 젊음을 아끼지 않고 전쟁터에서 산화된 청춘의 꽃다운 나이의 군인들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의 평안이 있기에는 그들의 큰 희생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 바쳐 나라를 지킨 군인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신앙생활과 연관을 지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군인에다 비유하였고 성도의 생활이 곧 싸우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1:18)고 명했고, 빌레몬서 2절에서는 아킵보에게 “군사”라고 부르고 있으며, 빌립보서 2:25하절에서는 에바브로디도에게는 “함께 군사 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군사는 많으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군사는 어떤 군사여야 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개인과 국가의 존폐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조건들이 있습니다.
좋은 군사는 강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군인이 있어도 힘이 없으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강한 군사는 한 명이 백 명을 당하고 백 명이 천 명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3용사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는 불레셋을 쳐 부시는데 큰 공헌을 한 용사들입니다(삼하 23:8-17).
그들이 있었기에 국난을 회복하고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강한 군사는 정신력이 강합니다.
정신력은 군인들의 사기를 좌우합니다.
두려워하는 군인은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사울이 두려움은 불레셋에게 패하고 길보아 산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사사기 7장에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는 메뚜기떼와 같이 많은 미디안 군사들을 쳐부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으며, 어린 다윗이 불레셋의 골리앗을 쳐 부신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의 승패를 자원하는데 많은 신념이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군인은 무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옙 6:10-17)고 했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정신력이 있어도 무장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을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좋은 군사는 충성스럽습니다.
좋은 군사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하는 군인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목숨을 걸고 충성하면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가지 일에만 전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명을 걸고 복음전파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군인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좋은 군인이 아닙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인은 자기를 모집해준 상관에게 기쁘게 하기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6,25때 군가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나 죽으나 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군인은 진실해야 합니다.
상관 앞에서는 진실한 부하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어도 상관을 위하는 진실성이 군인의 정신입니다.
우리야는 다윗의 부름을 받고 술에 취하였어도 전쟁에 나가있을 요압 장군을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자지 않았습니다.
하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상관을 걱정하고 성문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우리야가 진실한 삶은 그를 죽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진실을 보셨고 애국심을 보셨고 충성심을 보시고 복수해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좋은 군사는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군사가 많고 좋은 무기를 지녔다 할지라도 훈련이 없으면 안 됩니다.
훈련은 제 2의 전투입니다.
6,25때 군인이 모자라 마구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총도 쏠 줄 모르고 희생된 군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땀을 흘리는 훈련, 피나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력의 훈련입니다.
군에 있을 때 아침과 저녁으로 군인의 길을 외우고 군인의 맹세를 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절약 정신과 애국심 등을 심어 주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에게서 어머니 유니게가 훈련을 받았고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디모데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극기의 훈련입니다.
군인은 훈련을 통해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이기는 것입니다.
새벽이나 밤중에 비상출동을 합니다.
눈 비 올 때에도 도보행군을 하고 야간행군도 합니다.
신자는 밤이나 낮이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주의 전을 찾아야 합니다.
영적 비상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깨어라 근신하라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듯이 사탄 마귀가 삼킬 자를 도루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의 때가 임박하여 발악하는 때가 된 것입니다.

신체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훈련을 겪어야 육신의 건강하고 환경에 적응이 됩니다.
기도의 훈련, 전도의 훈련, 충성의 훈련, 봉사의 훈련, 사랑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군인이 편한 것을 찾는 것은 군인의 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잠을 며칠씩 못자고 배고프고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두려움과 공포가 겹쳐도 기뻐할 줄 알아야합니다.
생명의 위협이나 육체의 고통은 기쁨으로 당할 수 있어야합니다.

생활을 초월해야 합니다.
의식주의 문제를 초월해야 합니다.
잠자리가 길이든지 산이든지 비 속이나 눈 속에서나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전쟁터가 곧 집이요 하방이요 안식처입니다.

식사를 몇 기씩, 며칠씩, 건너도 감당합니다.

의복이 낡고 더러워도 개의치 않습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에 대한 것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명령에 죽기까지 절대복종 절대순종입니다.
국민의 생명은 명령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죽음의 사지에도 명령을 받고 진격하고 평안의 안식처도 명령에 따라 미련 없이 떠나야합니다.
전쟁에서 명령 불복종은 즉시 총살입니다.
명령을 받은 군인은 그 명령이 자기의 뜻과 의사에 맞든지 아니 맞든지 따라야합니다.
비판이나 가감이 있어서는 안 되고 수정해서도 안 됩니다.
항의를 해서도 안 됩니다. 명령은 곧 자기의 생명으로도 바꾸는 태도입니다.

명령은 명령자의 의사대로 내려집니다.
그 명령은 손끝으로도 내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명령은 암호로 내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명령은 표정으로 내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명령은 문서로 내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명령이 어떤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 명령은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지시자의 뜻대로 명령이 내려질 뿐입니다.
명령하달 자는 순종하고 복종할 의무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군사 된 성도들의 생활을 상상해 봅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영적 싸움의 성군입니다.
영적군사 성도들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 마귀와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영적군사인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 군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나가는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3장,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내 생각 내 전술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군기를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11C-13C 말까지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회복을 위하여 기독교도들이 십자가기를 들고일어나 싸웠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기를 들고 나아가야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운 대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잘 배우는 일입니다.
잘 배워야 잘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배워도 안 되고 아무렇게나 배워도 안 됩니다.
좋은 선생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사상이 건전해야 생활이 변화합니다.
12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배우고 따라서 사도로서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는 사랑과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기대하여도 과정이 나쁘면 소용이 없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특히 법과 질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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