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으로 하는대로 복을 주리라

관리자
  • 2486
  • 2015-03-28 19:29:43
네 손으로 하는 대로 복을 주리라
신명기 15:7~11. 고린도후서 9:6~15.


목회자에게 가장 큰 보람이 느껴지는 것은 목회하던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초신 자들의 믿음이 자라 믿음 안에 열심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그렇게 목회하면서 힘이 들었던 교회였는데, 이제는 부흥하고 성도들도 열심을 내는 모범적인 믿음으로 자랐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목회자는 자기가 그곳에서 목회하였던 일을 회상하며 여러 가지 희비의 순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다시 가보고 싶고 만나보고도 싶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8:1~11절에서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울 때에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장막을 만드는 같은 업에 종사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니, 유대인들이 대적하며 훼방하므로 회당에서 자리를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디도 유스도의 집은 회당 옆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선교의 자리를 잡은 것이 회당 장 그리스보를 개종시키게 되었고, 회당 장과 그의 가족들이 믿고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주님이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용기를 내어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선교의 힘을 입어 고린도교회는 당시에 큰 교회로 자라게 되었고, 교회 안에 좋지 못한 일도 있었으나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로 자랐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특히 사랑하여 두 번씩이나 긴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교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도록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고린도교회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 있었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돌보아 주는 사랑의 교회였던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한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주는 것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고 또 우리 자신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이처럼 사랑이 풍부하고 헌신적인 행위에 대하여 로마교회에 자신 있게 자랑을 하였습니다(롬 15:26).
또 마게도냐인들에게와 아가야지방에서 자랑하였다고 했습니다(고후 9:2).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고린도교회의 소문은 멀리 퍼져 나갔고,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알려졌고 고린도의 열심이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고린도교회를 자랑하는 일들이 자랑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마치 신명기 15:7~11절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 행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라고 권고하는 것과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범사에 손으로 하는바 복을 받는 길임을 모세는 권고했습니다.
그러한 권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교회에 모세라고 하는 목회자의 권고나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이라고 하는 목회자의 권고나 오늘 이 시대에 우리교회를 향한 담임목사의 권고나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복 받는 것을 다 같이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목회자들 자신과 그의 시무하는 교회들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것인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연보하는데 정성이 담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연보는 하나님 앞에서 정성이 담겨진 예물로 드려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주는 성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은 같은 성격의 것이겠으나,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갖는 것과 사람들 앞에서 정성을 갖는 것의 차이이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성금을 내는 것은 필요에 따라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연보는 구별하여 미리 준비하였다가 드려야할 참 연보라고 했습니다(고후 9:5).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인 정성을 갖는 연보와 사람들 앞에서 자비심으로 내는 성금은 역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에게 성금을 내려고 할지라도 정성을 기울여 미리미리 준비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금은 불행을 당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동정심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선사업을 하는데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미리 준비해서 하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의무감에서 정성을 다하여 내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내는 성금이라 할지라도 빚을 갚기 어려운 상황에서 빚쟁이가 내미는 청구서처럼 밉살스럽게 내는 성금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는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가 감사절에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은 성금을 내는 것과 같이 청구서를 받고 마지못하여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다른 사람의 눈에 보여주기 위한 예절이 아닙니다.
체면이나 세우려는 즉석에 드리는 예물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정성된 연보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절이 되면 특히나 몇 주 전부터 널리 광고를 합니다.
그것은 미리미리 정성을 기울여 연보를 준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각자의 신앙에 따라 미리미리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하고 절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예물을 마련했다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명절을 기다렸다가 새 옷을 입고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사모하고 준비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마치 자기의 생일을 캘린더에 표시해두고 매일매일 생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어린이와 같이 기다리고 준비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교회절기가 되면 모든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여 예비했던 헌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절기에는 모든 성도들이 새 옷으로 단장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성도들 간에 추수한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하여 드리는 연보가 연보다운 연보입니다.
믿음이 자라는 성도는 연보하기 위해 미리 헌 돈을 새 돈으로 바꿔둡니다.
깨끗한 돈을 바꿔 성경 속 같은 곳에 잘 보관해두었다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나 마지못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정성된 예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것이어 든......흠이 없는 것으로 드릴지리......”라고 레위기에서는 말합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나, 비둘기나 모두 흠이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연보를 할 때 미리 준비해 깨끗이 드려야 정성된연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연보를 드리는 것은 동정에서나, 납세의 의무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의무는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들이며, 그것을 드리지 않음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 말라기 3:8절 말씀합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10을 드리는 것을 말하며(레 27:30, 민 18:21),
헌물은 거제물인데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렸던 화목제 희생의 가슴과 넓적다리를 말합니다(출 29:27, 레 7:14, 32~34, 느 10:37~39).

헌물 중 어떤 것들은 율법에 의해 십일조보다는 덜 엄격하게 규정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나 자선의 요구를 위해 성도들이 하는 헌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감사의 예물을 얼마나 드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이 됩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 먼저 각자의 신앙의 척도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좀 더 신앙적으로 성숙한 성도에게 굳이 대답을 한다면 최소한 가족들의 건강과 생활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며칠간의 생활을 드리는 자세는 되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1년, 혹은 반년동안의 모든 생활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나 한사람의 하루 생활로 드리지 못하는 것은 결코 정성을 다하는 연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의 액수를 따지고 말하기보다 나를 전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로 하면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적은 감사의 연보이지만 나의 정성과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라면, 어느 것보다도 귀한 예물이 분명합니다.

2. 연보는 씨를 심는 정성으로 드려야 합니다.
씨를 심는 사람은 나쁜 것으로 심지 않습니다.
최고의 극상품의 아주 좋은 씨를 심는 것입니다.
씨를 심는 사람이 씨 값을 아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지 제일 좋은 씨를 골라두었다가 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보는 하나님 나라에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으로 심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싹이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좋은 것, 정성된 것으로 드려야 즉시 열납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으나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이 열납 하셨음을 창세기에서 잘 가르쳐 줍니다.
좋은 씨는 아무리 먹을 것이 없고 궁핍해도 최후까지 남겨두었다 심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의 연보를 심을 때, 구별된 연보는 쓰지 않고 따로 보관하여 심어야 합니다.

연보는 쓰고 남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따로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연보는 이미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지어 보관해 두었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씨를 심는 사람은 풍부하게 심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얼마만큼의 연보금액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고, 강제적으로 부과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아낌없이 바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마음에 정하는 대로 풍부하게 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인색한 헌금을 함으로서, 만일 자원함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올바른 정신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며, 올바른 정신이 담겨져 있지 않는 연보는 가인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연보처럼, 하나님께 열납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원이나 천만 원을 바치면서도 인색하게 바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동전 한 닢을 바치면서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영적인 농부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일은 씨를 뿌려 그 결과를 추수하는 것입니다. 씨를 밭에 뿌리는 사람은 손에서 씨를 흩어서 버릴 때 좋은 알곡을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가능하면 큰 밭에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많은 씨를 뿌릴 때, 우리는 그것을 던져서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러나 결과는 추수 때, 많은 결과를 기대하고 뿌리는 것입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 출 때가 있으며.......”한 것처럼, 씨를 심으면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씨가 뿌려지면 많은 것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은 추수해서 우리의 창고에 채우게 하시려고 이 신기한 씨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곡식을 주십니다.
우리는 곡식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지 못하는 곡식을 추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적게 뿌리면 적게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면 우리는 많은 것으로 원하고 바라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천억 원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으로,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조금밖에 받지 않겠다고 주장하므로 풍성하게 추수할 수 있는 씨를 뿌리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추수는 결코 사람의 노력의 대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씨를 주시고 땅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게 하시고 다시 알곡까지 주셔서 더 풍성한 것으로 거두어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는 자는 진심으로 심어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사람이 자기의 원하는 것과 스스로 가지고 싶은 것을 자유로이 선택하듯이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해야 합니다.
충동에 의해서나 압력을 받아서 하는 행위는 허위입니다.
돈을 받아내는데 전문적인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설득력에 동요되어 연보를 하게 되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참된 연보는 후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연보를 바치는 사람이 자기 피나 생명을 바치듯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괴로움으로 신음하듯 하며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연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바치는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금액을 바치면서도 기쁨이 없고, 자원함이 아니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은 것이 됩니다.
어떤 교인들 중에는 신앙이 어려도 온전히 바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지 않습니다.
바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씨를 심는 마음으로 연보를 천국에 심는 것입니다.

3. 연보는 은행에 예금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우리의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은행에서는 돈을 도적맞지 않도록 지켜줄 뿐만 아니라 변리까지 붙여서 늘려주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아무 곳에도 우리 돈을 맡겨둘 곳이 없습니다.
만약 돈이 많은 줄 알면 도적이 들어오고 사기꾼들이 접근하고 강도가 흉기를 들고 찾아듭니다.
요즈음에는 어린아이까지 유괴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이 있으면 즉시 안전한 곳에 둬야합니다.
그곳은 바로 은행입니다.
은행에는 아무리 많은 돈을 맡기고도 통장만 간직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은행도 불안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행원들이 몰래 고객의 돈을 빼내어 유용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은행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쌓아두는 예금은 더욱 안전합니다.
거기에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좀이 먹는다는 것은 작은 벌레의 해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옷이나 인간의 체내에서 번져나가는 균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균들이 사람과 재산을 해치는 피해는 큽니다.
녹이 슨다는 것은 자연계의 해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재난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또는 화재나 수재나 지진이나 우박이나 해일이나 태풍으로 입는 피해가 해마나 크게 일어납니다.
도적의 해를 받는 것은 사람으로 인하여 입는 피해를 말합니다.
도적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기를 당합니다.
강도를 당합니다.
횡령과 침략자, 독재자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땅에서 당하는 해를 천국은행은 절대 안전합니다.
하늘에는 어떤 부패적인 요소도 침입할 수도 없습니다.
좀도, 동록도 해하지 못하고 도적이 든든한 천국 문을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죽음도 영생의 지역에서는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 소유에 대해서 파괴하거나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물을 쌓아둘 하늘은 어떤 곳입니까?
하늘은 천문학적인 장소도 아니고, 먼저 간 성도들이 거하는 장소도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 하여 계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발휘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재물을 쌓아둔다는 것은, 그 재물을 하나님께 맡겨둔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갈 때에 찾게 되는 재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은 재물은 어느 곳보다도 안전합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11~12절).

우리는 하늘 은행에 예금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하면 아까운 생각이나 인색함이나 억지로 연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즐겨 바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7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주는 행위에 있어서 전혀 인색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비 베푸시는 것을 즐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주와 연한과 사시와 자연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과 자유와 인격과 소망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하나님은 편 손과 미소 짓는 얼굴로 기꺼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같은 물건을 주고받아도 기쁨으로 주고받는 것은 갑절이나 주고받는 것과 같이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주는 것은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모습으로 주고받는 것은 오래도록 훌륭한 인정이 마음의 선물이 되어 여운으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과 표정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음과 표정과 정성을기대 이상의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보충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궁핍함보다 필요 이상의 민감한 반응으로 영적인 부요를 느끼며 가난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부족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폭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아멘.

이전 주병환 2015-03-28 장유위소집이 성원미달로 결렬됐다고? 대단하다!
다음 홍의종 2015-03-28 이정훈 목사(중앙연회 양평지방) 부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