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횔의 주님을 보았노라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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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7 19:25:30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시편 22:14-21, 요한복음 20:24-25.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열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여러 이론으로 부정하려고 합니다.

실수설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너무 어두워서 예수님의 시신이 묻힌 무덤을 잘못 찾아갔을 것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2절에 의하면 이미 해가 떳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묻혀있는 무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여자들의 전하는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도 잘 알고 찾아갔습니다.

졸도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5:44-45,절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공식적인 확인이 있었습니다.
로마 병정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으니 만약 이때까지 죽지 않았더라도 창에 찔릴 때 죽었을 것입니다.

조작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거나 도둑들이 훔쳐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값비싼 향로나 귀중한 수의를 훔쳐갔다는 상상은 가능하나(요 19:39-40) 먼저 수의를 벗겨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체를 가져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로마 병정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시체를 훔쳐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제자들을 사기꾼으로 모는 말입니다.

보관설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의 당국자들이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시체를 가져다가 따로 보관했다는 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내고 다닐 때(행 2:24,이하) 당국자들은 제자들을 사기꾼들이라고 입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 빈 무덤의 증거를 전복시키려는 사람들의 엉터리 같은 설명들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관적인 환상의 부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죽은 스승을 너무나 간절히 열망한 나머지 자기들이 직접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찾으라 찾을 것이요...........”
마태복음 2:1,에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섬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이 누가복음 2:28, 38,절에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야를 사모하며 기다리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 같이 막달라 마리아와 요한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정성과 열심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사도들은 여인들에게서 주님이 부활하셨고 그의 누우셨던 무덤은 비었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셔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안할 지어다”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그 장소에는 도마가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값비싼 몰약을 시신에 발라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 지내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아마 어떤 제자들이 숨어서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의 기대도(눅 24:21),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 주기를 바라던 소원도(마 20:21), 바벨탑이 무너져 버리듯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힘없이 죽어 가시는 모습에 실망한 사람들은 믿음도 사랑도 함께 장사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번 다시 사실 것이라고 예언 하셨던 것을 지금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완전히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고 나면 전과 같이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두려움과 허탈과 번민과 슬픔이 교차되고 서로의 시선들이 집중되는 그곳, 가운데로 주님은 걸어 오셔서 “너희에게 평안 할 찌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은 모든 혼란과 격랑과 걱정이 사라져야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사로 끝인 것이 아니라 당신이 분명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한 증거로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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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사라 졌습니다.
절망도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누가 무어라 해도 증거하고 싶어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증거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없는 보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증거요 외침이 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뵈옵지 못한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뵈었노라”하고 증거 한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도 그들의 분명한 확신이요 충만한 기쁨이었습니다.
사막에서 기갈로 죽게 된 사람이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물이다”라고 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망망대해에 실망과 좌절로 항로를 잃고 방황을 하던 배에서 육지를 발견하면 “육지다”라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치열한 격전장에서 생명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다행이 적을 물리쳐 승리를 하게되면 “우리가 승리했다”고 함성을 지르지 않겠습니까?
땅속깊이 묻혀있는 금 광맥을 발견하면 “금이다”라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심마니들이 산을 뒤지다가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고 외친다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형편은 그 보다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기에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고 증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도, 저와 여러분들이 영 안이 밝아져서 믿음의 눈으로 부활의 주님을 뵈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한 것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증거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죽음! 그것이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을 해결해 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기울이며 찾고 연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진시 왕은 동남동녀 300인을 동방의 탐라국에 보내어 불사약을 구하려 보낸 것도 이 죽음을 면해 보려고 해서였습니다.
옛날 어떤 선비는 신선이 되겠다고 아침마다 이슬을 받아먹고 생식하고 도를 닦아 보았으나 그도 어쩔 수 없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오래되면 온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고 힘이 없어져 가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져 간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젊어보려고 온 얼굴에 화장품으로 칠하고 꾸미고 가죽을 끌어당겨 자르고 꿰매며 주름을 펴 보지만 그도 얼마가지 못하여 결국은 죽게되고 맙니다.
각 나라마다 굴을 뚫어 군비를 모아두고 무기를 비축하는 것은 전쟁으로 죽게 될까봐 죽음을 피해 보려는 수단인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죽음이라는 것에 30가지가 넘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름마다 죽음은 소망이 없다는 뜻으로 불려 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죽습니다. 왕도 죽고 부자도 죽고 지혜 자도 죽고 역사도 죽고 미인도 죽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허무하게 한줌의 흙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면 그 죽음이 왜 우리에게 오는 것일 가요?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멸망 받고 심판 받을 인류의 죄와 사망을 해결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사망과 진노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는 증언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을 증거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제는 증거를 할 때입니다.

바다에 사는 상어와 같이 크고 강한 고기의 꽁무니에 붙어서 따라 다니는 작은 물고기가 있습니다.
체구도 아주 작고 약한 고기이지만 상어의 배에 붙어서 상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상어의 배설물을 먹으면서 강한 고기들에게서 몸도 보호받으며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어와 악어새는 서로 도와주며 함께 공생관계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다 이겼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승리하신 주님 앞에는 아무 것도 막을 것이 없고 거칠 것이 없습니다.

어린 다윗이 불레셋의 골리앗을 쳐죽였을 때 불레셋 진영은 흩어지고 모조리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처럼 염려와 걱정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거센 폭풍으로 요동치던 갈릴리 바다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바람아 잠잠 하라 파도야 잔잔 하라” 한마디에 순식간에 조용하게 평안을 찾은 것처럼 평안이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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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두려워 떨고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명 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 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1-23).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몇 가지의 분명한 보장이 있습니다.

①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3위의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시겠다는 약속의 보장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으로 함께 역사 하실 것입니다.

②우리에게 법정의 판사와 변호사 같은 영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든지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 권세는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도록 구원해야 할 사명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③법정의 검사와 같은 영 권도 주어집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죄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사하게도 하고 버려 두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지상 명령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출발 명령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과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시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셔서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승승장구하시고 늘 승리하시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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