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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관리자
- 2471
- 2015-04-14 20:34:15
창세기12:10-20, 누가복음 24:13-35.
사람들은 제각기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의 차이 뿐입니다.
꿈과 희망이 부푼 아침 길을 달려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괴로움과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유혹과 위험의 비탈길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모든 길들을 순간 순간 다른 모습으로 접근하고 이 모든 길들을 시시각각으로 경험하며 걸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에 맡기며 위로 받기도 하지만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굴곡이 없이 지나간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등산을 할 때에도 많은 굴곡과 변화 있는 자연의 형태에서 감상하고 찬사를 하게되고 기분이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 늙으면 이마에 주름이 늘고 피부가 늘어나는 것은 그 많은 인생의 굴곡을 보여 주는 것만 같습니다.
한 평생 살아온 수많은 사연들이 희비가 교차되어 흘러갈 때 남겨주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아닙니까?
한번 패어진 세월의 굴곡은 더 깊어지고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청년의 모습은 마치 우리 인생 길의 단막극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꿈을 안고 돋는 태양을 향해 도시를 찾았던 그들이 지금은 실망한 채 석양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시골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 그때 이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었으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놀랍고도 감탄할 일 대 전환기의 순간이었습니다.
1, 실망의 석양 길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위로의 동반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대망의 아침도 약진의 한 나절도 실속 없이 끝나버린 석양 길에 실망과 좌절을 않고 내려가는 나그네들은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시야에서 꿈을 품게 했던 예수님은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의 혁명적 지도자였어야 할 예수님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분봉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일찍 들었으나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것은 무엇이나 이적을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기대하고 요구하였습니다(마 12:38).
그러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 고침의 이적, 부자가 되는 표적, 재수가 좋아지는 능력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즈음 신앙의 상태는 차츰 기복 신앙으로 인본주의 적으로 세상 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찬란한 것, 사치한 것, 향락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7-8)고 예수님은 나무라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 하리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온 것이라“(요일 2:15-16).
세베데의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찾은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신령한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 적이고 육신 적인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표적과 이적을 기대하고 찾기도 하고 병을 고치고 부자 되는 목적을 두고 찾기도 하고 인간적 사귐을 위하여 찾는 사람도 있고 정치적인 목적을 두고 찾기도 하지만 이들 중에는 곧 실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급한 마음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찾고 얻으려 한 것은 모두가 동물적인 것이고 본능적인 것이고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두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미국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양 도둑이 있었는데 양을 훔쳐간 사람에게는 이마에 양 도둑의 약자인 S.T.(Sheep thief)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일생 동안 다른데 가서도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너무도 잔혹한 청교도적인 형벌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 양 도둑질을 해서 이마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먼 곳으로 도망 다니며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마을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있으면 가서 도와주고 대신 아파해 주고 대신 매 맞아 주었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있으면 대신 처해 주고 슬픈 사람 옆에 사흘이라도 같이 있어 줍니다.
그래서 그 동네와 이웃 마을에서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살맛이 없어질 정도로 그는 동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보다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친아버지처럼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게되자 양 도둑질을 하던 때 그에게 낙인을 찍었던 사람들이 다 죽고 그들의 2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장수를 합니다.
2세들이 자라서 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초등학교나 중학교 입학식 때에는 으레 훈사를 하는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마에 낙인을 찍는 풍속은 없어졌습니다.
할아버지 이마에 어째서 S.T.가 붙었느냐고 묻습니다.
땅만 내려다보며 세상만 생각하던 이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나사렛 예수, 그 이상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것만 집착하던 이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모습 이상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슬퍼하던 가슴들을 말씀으로 뜨겁게 하셨습니다.
로마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제나 다시 나라를 찾아 독립국이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열광적으로 따랐던 무리들은 기대하는 바가 컸고 무리들은 늘어갔습니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며 고난을 겪고있는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적 가난에 굶주렸던 사람들이 두 차례나 떡과 고기를 얻어먹고 배불렀던 시간을 못 잊어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기에 약삭빠른 경제 가들은 예수님을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면 모든 경제적인 문제들이 풍부해 지리라고 생각하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 영적 고뇌에 빠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식적 율법주의가 아니라 진실 된 삶의 방법으로 영적 생동감 있는 태도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상에 그리는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품격, 진리와 생명의 말씀, 새로운 가르침과 권능으로 행하시는 이적과 기적, 조용하고도 평화로우며 담대하게 모범을 보여주시는 위엄과, 힘있고 강하게 전진하시는 그의 삶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나라보다는 천국을 가르치셨고 이 땅에 속한 일 보다는 하늘에 속한 일에 더 힘을 쓰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 그러기에 육신의 나라가 귀한 것처럼 하늘에 속한 나라는 더 귀한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게 보리떡을 먹으려고 찾아오면서도 신령한 생명의 양식은 찾으려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기근과 기갈에 처해 있으면서도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근과 기갈”임을 알지 못하고 동에서 서에까지 비틀거리며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다시 복귀시키려 구테타를 준비하던 성삼문은 배반자의 밀고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붙잡혀 한강변에서 목이 잘려 까마귀의 밥이 되고 백골은 노량진에 묻혔으나 신숙주는 배반하고 영의정에까지 올라 62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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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 하셨습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형식적인 종교행사에 외면 당하는 것을 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증오로 대신 갚으려고 불법 재판으로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에 능하신 선지자를,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하던 대제사장이 처형하는 데 앞장선 것을 볼 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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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지금까지 본 것은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종교의 지도자들이 무참하게 죽여버린 사건에 대한 슬픔과 분함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3, 절망과 좌절의 밤길을 다시 되돌아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누구신줄 알지 못했으나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자 길을 지나쳐 가시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기들의 거처로 영접합니다.
.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식사 분배 방법은 특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다 같은 지체를 가졌으나 신령한 능력을 받지 못해서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며 입으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 뿐이요 결코 신령한 음성이 없는 것도 아니요 신령한 세계가 없는 것도 아니요 신령한 증거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의 죄악과 허물과 부족함으로 영계의 어두움으로 가득 차서 가려진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은 예수님의 손으로 주시는 떡을 받았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흘 전 죽으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떠나셨습니다.
아마 좀더 머무르고 계셨더라면 변화산에서 베드로처럼 그 곳에 머물러 살자고 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결코 한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지금까지 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마음에 뜨거웠던 것을 기억하고 즉시로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시고 자기들에게 보여 주신 모습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임한 사명입니다.
그 밤에 자기들이 느끼고 보고 체험한 것을 증거 해야겠다는 염원,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상상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증거 해야겠다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천동설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지구 공전 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는 종교법정에서 부인하고 나왔으나 법정 문 앞에 나서면서 “그러나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목사는 끝까지 지구의 공전 설을 주장하다 사형을 받은 것은 진리를 증거 하고자 하는 그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 한 것도 그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밤에 즉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열 한 사도들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과연 살아 나셨고 자신들이 만나 함께 길을 걸었으며 말씀을 풀어 주셨고 떡을 떼어 주셨다고 증거 하였을 것입니다.
사명의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사명을 받았을 때 즉시로 증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명 받은 자들이 되십시다.
석양의 엠마오의 길은 실망과 좌절과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들에게는 그 밤에 사명에 불타는 담대한 가슴으로 어둠도 뚫고 되돌아 올라가는 소망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십시다.
주안에서 사명에 불타는 뜨거운 가슴이 열려지시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