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무표정한 얼굴의 종이 동물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리자
- 2531
- 2015-04-27 21:30:48
사냥개가 되었던 꿈은 행복했으며 깨어나기 싫을 정도로 달콤했다.
외로운 늑대는 진짜 사냥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어 있는 주인의 품에 안겨 외로운 늑대는 잠이 들어 있었음을 비로서 알게 되었다.
현실이 싫었다.
다시 꿈 속에 들어가 멋진 사냥꾼인 주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잠도 오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죽어 있는 주인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할 뿐이었다.
저 숲속 밖으로부터 불어 오는 바람은 이들을 하나가 되게 해주었다.
그리고 따뜻한 햇볕은 이들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따스하고 보드라왔다.
외로운 늑대는 죽어 싸늘해진 주인의 품 속이었지만 왠지 주인의 온기는 아직도 자신을 감싸주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너무도 행복했다.
그리고 너무도 감사했다.
삶의 아이러니였다.
살아 있는 동안은 서로 오해하고 멀리하더니 죽은 후에야 서로를 알고 서로를 그리며 서로 가까이 하길 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모습이리라.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실이며 이것이 또한 구원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리라.
외로운 늑대는 한 참의 시간을 죽은 주인의 품에 안기어 지난 날들을 회생했다.
이젠 좋지 않았던 지난 과거는 다 잊고 좋았던 옛 기억들만이 새록새록 새롭게 되살아났다.
주인은 외로운 늑대의 곁을 떠난 듯 했으나 이젠 영원히 외로운 늑대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때론 절망과 이별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며 영원이 되기도 한다.
또 다시 한 참의 시간이 지났다.
외로운 늑대는 고개를 들어 숲을 둘러 보았다.
여기 저기에 숲속의 동물들이 주인과 외로운 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라 생각했던 외로운 늑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숲속 동물들로 인해 마음이 놓이고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외로운 늑대는 과거에 즐겁게 뛰어 놀던 숲속 동물들이 보이는 쪽으로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달려 갔다.
아니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숲속에서 같이 뛰어 놀던 다른 동물 친구들이 변해 있었다.
여우를 찾아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여우는 안사를 하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가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여우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여우가 아니었다.
너구리를 찾아 갔다.
너구리도 예전의 너구리가 아니었다.
곰을 찾아 갔다.
곰도 더 이상 예젼의 곰이 아니었다.
팬더를 찾아 갔다.
팬더도 마찬가지였다.
당나귀를 찾아 갔다.
당나귀도 그랬다.
토끼와 다람쥐 등등도 모두가 변해 있었다.
모든 숲속의 동물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동물들이 아니라 무표정한 얼굴의 종이 동물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정 살아 있어 생기가 넘치는 동물은 이 숲속에서 사라진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숲속의 동물들이 다 종이 동물들로 변해 버린 것일까?
숲속 저 건너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햇빛은 따사롭고 보드라웠으나 깊은 숲속 그늘진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매섭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