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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 토착신학이라는 것이?
현종서
- 2736
- 2015-05-01 00:34:18
동양사상을 대치함으로 복음이해를 달리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토착화라 이름지었다. 그 결과 인간의 죄인됨, 그리스도 대속의 불가피성 -회개와 죄사함 그리고 칭의와 성화의 구원론에서의 순서가 사라지게 된다. 회개나 성령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거듭남,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라는 과정의 설명이 없이도, 그리스도를 가장 큰 스승으로 받아들이거나 언행일치의 모형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누룩의 영향을 끼침, 복음을 한국의 자생종교 나무에 접붙이는 유형 등으로 해석하다보니 우리가 믿고 체험하는 기독교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너무 축약, 형식화 해 놓음으로 성경자체가 담고 있는 그 숨어있는 깊은 진리를 다 버려 버리게 되고 가장 중요한 근본 체험까지도 단순화한 설명속에 사라지게 하고 있다.
불교와의 대화에 있어서도 선불교의 공을 인격적인 하나님과 유비하나, 하나님은 아부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해온 이유속에 엄청난 진리가 숨어 있으니 바로 부성적 인격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감리교회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충분한 표준이라 믿고, 웨슬리의 설교문을 교리의 중심에 두고 있고 교회사의 기독교 개신교의 전통으로서, 초대교회의 교리형성과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 오직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를 지켜 오고 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감리교회의 토착화가 아니라 기독교복음의 토착화라는 거창한 이름속에 성경과 그 충실한 해설로서의 신학을 서양사상을 활용한 설명이라 하여 동양사상과 문화속에 재해석한다 하여 그리스도의 케르그마에다가 한국 재래종교나 토착종교 사상을 여러방식으로 접하고 교류시키는 과정속에 기독교의 근본진리가 심하게 생략 훼손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소위 부흥사들은 신학 이전의 사람들이라 보아 그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상을 그대로 받고 체험하여 가르치는 것을 근본주의 자라 비난하며 배격하는 일은 옳은 일인가?
토착화의 근본의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이민족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여 민족을 복음화하겠다는 의도 였겠으나 그 과정에서 그 근본에서 벗어날뿐만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기 보다 기독교 근본교리를 비판하거나 와해시키는 데 일조를 하는 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휴머니즘이 모든 종교의 핵심인듯 기독교를 비판하는 근본 이념으로 무신론적 휴머니즘을 이용하고 있다.휴머니즘만으로 본다면 불교가 더 우월한 종교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화해 없는 인간간의 화해와 평화는 지극히 임시적이며 근본적인 것일 수 없으며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수양도덕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임시적이고 표면적일 뿐인 것이다.
신학대학에서 종교철학을 하는 이유는 무신론적 세속 철학을 유신론적 철학으로 유도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몽학선생의 역활을 하도록 하라는 것인데 그 존재이유를 모르고 반기독교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의 활동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신학대학 교수나 총장의 판가름은 문교부에 그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단에 있는 것이고 교단은 신학교 이사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유리되고 신앙고백이 빠져 있으며, 신학은 신앙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교수들은 그리스도앞에서 자기가 신자인지 확인을 먼저 한 이후에 강단에 서야한다.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가 하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등, 그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노력,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빙자하여 기독교의 독특성과 절대성을 버리려 하는 자세는 구속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을 법한 자세일까?
이때문에 교회지도자가 윤리적인 허물이 다소 있다손 치더라도 이단사상을 정설인양 주장하는 자에 비해서는 교회에 덜 피해를 주는 것으로 보게 된다. 물론 더 높은 지도자 일 수록 성결면에 있어서 더 본이 되어야 한다. 일반목회자보다 감리사가 감리사보다 감독이 감독보다 감독회장이
더 높은 도덕기준에 맞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용서받은 죄인으로 성화되어가는 과정중에 있는 존재로 나를 용서하듯 상대를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자기를 반성하며 상대 비난과 낙마에 목숨거는 행위는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