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

관리자
  • 2713
  • 2015-06-04 19:22:55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
사사기 6:36-40, 사도행전 10:9-16.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매우 지혜롭고 복된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그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지혜를 짜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잘못 오해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행동을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에게 화가 임하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믿음으로 시작하려든 일이 불신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이 대체로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자기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지은 뒤에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결정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계획이나 시작이나 진행과정이 철저히 자기의 뜻에 따라 행하여집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가 하는 일에 개입되어 효과 있게 진행시키고 결과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자기의 계획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불평합니다.
다행이 자기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자기의 지혜와 능숙한 수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롯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뜻에 맞게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이 나고 맙니다.
열왕기상의 아도니야도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 왕이 늙어서 나라를 통치하지도 못하고 죽을 때가 되니까,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의 신복과 동생들을 청하고 다윗 왕의 신복들을 청하여 잔치를 배설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아도니야의 생각은 한 번도 부친 다윗에게 “네가 왜 그렇게 했느냐?”고 하는 섭섭한 말을 들어보지도 않은 체용이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더욱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다는 교만으로 가득 했던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 된 뒤에 부친 다윗 왕의 윤허가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첩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자기의 뜻대로 한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되어지는 일도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의 삶은, 세상조류에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함께 하신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되어지는 환경들이 하나님의 징계나 채찍으로 인하여 환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였든지 시험이었든지 전혀 하나님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모습을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 본토와 친척의 집에서 불러내시어 가나안땅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이동하여 갔습니다. 마침 그 때에 기근이 심하므로 아브라함은 애급에까지 내려가 이방 땅에 거하였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다가 애급 왕 바로에게 빼앗길 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머물러 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라 해도 가나안에서 떠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은 애급으로 내려갔다가 더 큰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 체포되었고 로마에까지 죄수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세 번째 방법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위험도 고난도 손해도 그리고 생명까지 바치는 삶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비록 계획이 늦어지고 손해가 되고 위험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며 따라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은 가장 모범적인 삶입니다.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고 유대인 동족들의 미움을 받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생활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끄시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뜻을 나타내실까요?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는 가끔 예기치 못했던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길을 갈 때나, 고민할 때나, 계획을 세울 때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확신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한 체험도 있겠으나 나의 기도나 꿈이 자기 본위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가운데 옳다고 인정되어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가 생각을 흩트려 놓으려고 유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 총리가 모르드개를 미워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려고 악한 꾀를 부리다가 스스로 죽게 되고 맙니다.
하만은 꾀를 내는 것이 자기와 가족을 망하게 하는 꾀입니다.
이런 꾀는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악을 품을 때 마귀가 틈타므로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오르거나 좋은 지혜가 떠오른다고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내 생각에는 더디고 위험하고 어려운 길로 느껴질는지 모르지만 성령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이 있을 때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안에 있기에 가장 안전하고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갖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은 5대째 사사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여, 7년 동안 미디안 사람들에게 갖은 학대와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거둘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와 모두 거두어가 버렸습니다.
모든 산지와 계곡에 미디안백성을 막기 위한 요새를 만들고 산성을 쌓았으나 미디안사람들은 또 쳐들어와서 양이나 소나 나귀 등 가축도 남겨 두지 않고 끌고 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사가 기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밀을 타작하는 때였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급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미디안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은 바로 기드온 자신이라고 합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기드온은 그에게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떡과 고기 국을 끓여 가져다가 대접하여 드렸더니 떡과 고기 국을 반석에 쏟으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이 그대로 반석에 쏟아 놓을 때 그 사람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그기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떡과 국을 사루었습니다.

기드온은 그 때 하나님의 사자인 줄을 알고 두려움과 슬픔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미디안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족속과 므낫세 지파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를 불러 모았습니다.

기드온은 다시 하나님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 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하였는데 이튿날 보니 이슬이 양털 뭉치에만 있고 그 사면 땅은 말라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이튿날 그와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사면 땅만 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나아가 보니 그대로 되어 있어서 양털은 말랐는데 사면 땅은 젖어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그 때 하나님이 정말 자기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나아가 3백 명의 용사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미디안 군인을 쳐부쉈습니다.
기드온은 결코 경솔하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행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일을 분명하게 확인한 다음에 신중히 행동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기드온이 미디안을 크게 쳐부수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할 때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따르는 과정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숫자의 차이입니다.
미디안과 싸우기 위하여 모집한 군인들이 32,00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백성이 너무 많으니 두려워 떠는 사람은 누구든지 되돌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미디안과 싸우려면 한사람이라도 더 많아야 할 터인데 사람을 되돌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두려워하는 사람 22,000명을 되돌려 보내고 남은 자는 1만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내려 가 물을 마시게 하여 전쟁에 나아가 싸울 사람을 고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사람들을 물가로 데리고 내려 가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처럼 엎드려 물을 먹는 사람 9,700명을 되돌려 보내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사방을 경계하며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 300명만 남겨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남은 300명으로 미디안과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계산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숫자에 하나님의 하시는 위대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숫자에는 상관이 없이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벳새다 광야에서 5병 2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어린이가 먹을 양식으로 장정 5천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에 차도록 남겼습니다.

소돔성의 죄악을 돌아보시려는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의인에 대한 질문을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숫자에 관심을 가졌으나 하나님은 의인의 귀함을 긍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전술의 차이입니다.
기드온은 군인의 무장을 활과 창과 칼로 하지 않았습니다.
빈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항아리 안에 감추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은 기드온은 전쟁의 결과는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과 섭리와 거룩하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쳐부순 것도 칼과 창과 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 앞에 굳게 닫힌 여리고 성도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기드온의 3백 용사들은 일시에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비추고 나팔을 함께 불었을 때, 밤 2경에 깊은 잠에 빠졌던 미디안 사람들은 잠결에 놀라 일어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기들끼리 부딪히면 적인 줄로 알고 서로 상대방을 찔러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놀라 부르짖으며 혼비백산하여 모두 도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딘 것 같고 약한 것 같고 어려운 것 같으나 그 길이 지름길이요 강한 길이요 쉬운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성과의 문제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친후에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다시는 넘겨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분별하여 깨달은 지혜는 이렇게 놀라운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아가는 지혜,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자신에게는 커다란 은혜와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로 분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의 멸망당하기 직전 소돔 성을 돌아보시러 가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여 소돔 고모라에 의인을 어떻게 하실 것을 알아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기도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아무리 급하고 어려워도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가족을 살게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중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조심스럽게 행동한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범죄와 하나님의 진노 뒤에는 언제나 모세의 눈물의 기도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간구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포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구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에 맡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언제나 불을 밝히고 하나님의 법궤 옆을 떠나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처음당하는 일이라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로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나를 찾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니라 다시 누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다시 엘리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나를 찾으셨습니까?” “아니다 가서 누우라”
세 번째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다시 엘리 제사장에게로 갔더니 하나님이 부르신 줄로 알고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 하옵소서”라고 대답하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사무엘이 누웠을 때 하나님은 부르시고 앞으로 엘리 제사장의 집안과 나라의 앞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언제나 가까이 지내던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목수 요셉이나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여 출산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받을 복입니다.
세상은 모두 어두워지고 강퍅해져도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알려지고 나타나게 하십니다.
비단 요셉이나 마리아 뿐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일을 감당하고 감당하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은 나타나고 알게 됩니다.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도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뜻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지붕위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네 귀퉁이가 묶여진 보자기에 온갖 가증한 짐승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말씀하시기를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 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이방인 로마의 이탈리아의 군대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와서 베드로를 초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며 또 하려고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할 사명을 환상가운데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자기의 명예를 위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큰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도 더욱 영광을 돌리시고 주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전 유삼봉 2015-06-04 세상은 광야, 시험하는 자에게
다음 함창석 2015-06-05 감리회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