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의사의 항일독립운동

백영찬
  • 3469
  • 2016-01-21 06:02:43
김상옥의사의 항일독립운동
김상옥의사는 감리교회의 보배이다 그 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감리교회의 전도와부흥에 큰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2년전 모 설문조사에서 천주교인에게 당신은 왜? 천주교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천주교린 36%가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인 이니까”라고 답한 데에 김상옥의사가 다닌 감리교회의 전도효과를 였볼 수 있다.

“김상옥의사독립운동93주년기념식”을 거행하오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일시) 2016년 1월 22일(금) 오전 11시
(장소) 김상옥체육관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내)
(찾아 오시는 길) 지하철1호선 종로5가역 3번 출구에서 직진 50m
※ 주차는 교내 운동장.

김상옥 의사의 독립항쟁 내역(요약)

1889년,1월5일,효제동에서 출생, 16세에 동대문감리교회에 다니신 후 34세 순국 하실 때 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시었고, 동대문교회의 헐버트목사,손정도목사,이하영목사,정희종장로 등의 지도로 독립의지를 키웠으며,의병, 애국계몽운동, 3.1운동, 임시정부, 의열투쟁, 독립군, 국내항일, 학생운동, 자금조달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거의 전부 실천한 분

1. 학생운동
- YMCA 청년부장 직분과 동대문교회에 동흥야학교 설립 등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2. 사회계몽 - 백영사 조직과 애국계몽운동
- 백영사 조직(손정도(감리교 목사, 상해 임정 의정원의장), 이종소, 임용호, 김동계 등과), 일본어 사용금지, 금주(禁酒), 금연(禁煙)운동 사회계몽과 독립의식 고취, 이종소, 임용호를 미국에 유학시켜, 사회개진당(社會改進黨) 창립

3. 일제상품 배척 및 물산장려운동
- 1917. 4. 일화배척(日貨排斥) 목적으로 ‘말총모자’를 자신이 창안 생산, 제철 농기구, 양말, 장갑 등 자사 제품과 함께 보급 판매, 일제(日帝)의 경제수탈에 맞선 국산품 장려운동 전개,

4. 3.1운동 참여
- 1919.3.1. 태극기 제작 배포(독립기념관에 보존), 독립 선언과 만세시위에 직공들을 대동 참가하고, 귀가하는 여학생을 장검으로 위협하는 일경을 가격, 장검 탈취 (독립기념관에 보존)

5. ‘혁신단’ 조직,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행
- 1919. 4.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여사 댁에서 청년학도들(박로영,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정설교, 전우진, 이혜수 등)과 함께 항일비밀 결사인 ‘혁신단’ 조직,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행,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중 종로경찰서에 피검 40여 일간 고문/고초를 당함. (혁신공보 일부-독립기념관에 보존)

6. 광복단 결성 활동
- 김의사는 삼남지방을 뛰면서, 1913년 경북 풍기에서 만난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훈, 유장렬 등 의병출신과 ‘광복단'을 결성, 1916년 5월 전남 보성의 조성헌병대 기습, 친일파 처단 하는 등 비밀활동을 시작함

7. 암살단 조직(만주 길림군정서 김좌진 장군과 연계) - 종로 시가전 추진
- 1920. 8. 미국 의원단 방한 환영행사 계기, 총독 처단-총독부 폭파 작전계획, 무기, 트럭 2대 등 준비,
- 종로 시가전 태세를 갖추었으나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암살단’-‘결사대’ (연합) 동 지 20명 전원 피검으로 거사계획 미수, 홀로 상해망명.

8. 상해 임시정부
- 1920. 11월 이후 임시정부 요인(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조완구 등)과 교제, 협력, 신문물 연수, 권총사격술 연마, 진과부(장개석총통 비서관) 등 중국인 동지들과 교제, 조소앙선생 중심 조직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 피임 활동

9. 군자금 모금활동
- 1920년 김좌진 장군의 만주 길림군정서 군자금 지원, 김동순, 유득신 등과 군자금 지원 및 상해망명 자금조달 - 1921년 7월 본국 잠입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하여 다시 상해 망명

10. 의열단 조직 및 참여
- 1920년 11월 의열단원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과 함께 밀양 한봉인 집에서 폭탄 제조, 같은 해 12월 최경학이 밀양서에 투탄 - 1921년 1월 의열단 재조직 참여,

11. 총독처단·총독부 폭파 계획, 임시정부와 협의,
1923년 1월 3차례 서울시가전 전개

임시정부(김 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선생 등) 수뇌부 및 김원봉(의열단)과 협의
총독 처단, 총독부 폭파 등을 위해 무기를 지원 받고, 동지 안홍한을 대동, 1922년
12월 초 서울 잠입, 1923년 1월 3 차례 서울 한복판 시가전 결행
① 종로경찰서 폭파 (1.12. - 10여 명 중상)
총독부 폭파를 위한 폭탄 성능 확인을 겸한 의거결행, 종로서는 독립운동 탄압
전담서로 ‘고문의 명소’였고, 본인, 독립투사들 및 가족들이 ‘혁신공보’(지하신문)
사건으로 이미 모진 고문을 당한 곳이었다.

② 삼판통(현 후암동) 총격전 (1.17. - 4명 처단)
도쿄 의회 참석차 서울역을 떠나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코자 준비 완료후,
가까운 후암동 은신 중, 당일 새벽 5시 기습한 일경 17명 중 4명 처단, 맨발로
큰눈 쌓인 남산을 가로질러 왕십리 안장사에서 / 승복에 집신 거꾸로 신고 눈길
을 내려와 수유리로 피신(일본 군경 500 명이 남산 포위했으나 추적실패) / 당일
저녁 다시 일경의 겹겹 검색을 뚫고 효제동 자신의 생가 이웃 동지 댁에 잠입,

③ 효제동 최후 대격전 (1.22. - 16 여 명 처단 )
동상 치료 중, 채소밭으로 둘러 쌓인 외딴 마을 이혜수 동지 댁(효제동 73번지)을 탐지한 일본 군경 1000 여 명 경계/ 근접 500 명 4중 포위 속 주변 민가 5동을 넘나들며/ 쌍권총으로 일기당천 3 시간여 격전/ 적 16 여명 처단하고/ 최후 1탄으로 생가(72번지)와 옆집(76-2번지) 사이에서 자결 순국하심.

김상옥의사의 서울시가전은 3.1운동 직후란 시기, 한국 심장부라는 장소의
특성상 대내외적으로 통쾌한 의거 이었다. 일제의 3.1운동 왜곡 선전
등을 전세계에 폭로하는 ‘승리한 의거’였다

⚖ 신출귀몰 - ‘동대문 철물점 홍길동’으로 전국에 구전
“사격, 변장, 잠적 명수로서, 일제 군경의 추격을 여러 차례 따돌려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이라 는 별칭이 전국에 퍼짐. 많은 청년들을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시키는 결과를 낳은 바도 있습니다.“
(증인 : 충남 홍성 출신 방경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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