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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19-21(설교: 하나님 사랑의 일환인...)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274
- 2025-06-28 17:26:17
우선적으로, 요한은 우리의 사랑의 근거에 대해,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사랑함(ἡμείς ἀγαπώμεν)은 A, B 사본 등을 따른 것인데, א 사본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τὸν θεόν)으로 되어 있고, K, Ψ 사본 등에는 “우리가 그를 사랑함”(…αὐτὸν)으로 되어 있다.① 나중 두 가지는 의미상으로는 같은 대상(하나님)으로 볼 수 있다(R. Bultmann).
원래 목적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앞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4:11-12)과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서의 형제 사랑을 언급하는 4:20-21을 미루어 후자를 택해야 할 것이다.
불트만(R. Bultmann)은 “무엇보다도 4:20-21이 후자의 경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 구절은 인간의 사랑이 직접 하느님에게로 향할 수 있다고 하는 영지주의적 생각을 반대하고 있으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오직 형제에 대한 사랑 가운데서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주요한 질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4:10 상반절의 사상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이 설명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에서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 설명에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죄인들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받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는 프로토스(πρώτος)로서, ‘첫째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선 먼저’란 뜻이다(R. Bultmann).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4:10을 되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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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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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로서,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자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을 의미한다(사랑의 본질 및 속성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은 저자의 「고린도전서」 13장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 및 그것과 관련된 인간의 사랑을 논해야 할 것이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상대에게 상대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 곧 사랑이다.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고전 13:6)과, 또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분출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더욱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다(롬 5:5, 15:30).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딤전 1:5).
믿는 자가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막 12:28-3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요일 5:3), 나아가 전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시금석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요일 4:12, 20, 21, 5:2).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느끼고 있든 없든 간에 영적인 면에나 정신적인 면, 또는 육체적인 면에나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줌으로써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느냐 함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와 복을 받아야 할 이유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복을 주시는 목적이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남을 사랑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며, 또한 남을 사랑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오는 대로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란 영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이다(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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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또는 인간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자기 의나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지체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부터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참조: 갈 6:10).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마 22:40), 율법의 성취요(롬 13:8), 율법의 완성이요(롬 13:10), 최고한 법이요(약 2:8),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34)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에 대해,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확언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라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그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
거짓말하는 자(프슈테스, ψεύστης)는 이 서신에 다섯 번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죄 없다 하는 자”(1:10),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2:4),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2:22),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본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5:10) 등이다(참조: 1:6).
여기서 이 말은 거짓된 것을 진술할 뿐만 아니라, 거짓된 주장에 의해서 실제로 거짓의 특성을 드러내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인데, 너무나 타당하다. 구체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형제의 안타까운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 사람들의 믿음의 눈 곧 영안이 열린 자녀들에게만 보이는 존재이시다.
끝으로, 요한은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결론짓는다.
이 구절은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4:7부터 계속되고 있는 형제 사랑의 권면을 계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권면은 이미 2:7 이하와 3:23에서도 나타났으며, 5:2-3에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R. Bultmann).
실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이웃)를 사랑하는 것은 분리되는 두 가지가 아니라, 구분되는 한 가지인 것이다. 즉, 형제 또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의 일환인 것이다(참조: 마 25:31-, 막 12:31, 요 13:34).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형제(이웃)를 사랑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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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요한일·이·삼서·유다서(서울: 글벗사, 2000년 1판 2쇄), pp. 75-77. 172-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