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과 홍정수를 구할 수 있는 길?

현종서
  • 1635
  • 2022-12-05 14:09:53
그들 모두 도상의 신학자로서 완성된 신학이 아니라 연구과정에서 불완전하지만 일시적으로 매듭되어져 나타났던 신학으로서 더 완성된 신학으로 그리스도의 온인류의 구세주되심을 누구나( 불교도나, 이성절대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나, 유물론적 맑스주의자가 다 호응하고 순복할 수 있는 더 설득력있는 신학, 성경의 증언을 결국 더 우월한 가르침으로 긍정하고 그 증언앞에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으면 될 것이다. 그것을 변선환박사의 미완성적 다원주의사상으로 오인케하는 신학을 더 철저히 파고 들어 일반적인 다원주의신학이 아닌 일시적으로 다원주의신학인것 처럼 보이나 결국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증거하는 신학의 이해로 발전시킨다면, 그리고 홍교수의 이론도 그때 문제가 된 나의 설교들은 공산주의자들이나, 기적사건이 믿어지지 않는 이들을 위해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까지는 임시로 인정하지 하지 않고 보류해 두었던 것으로 결국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몸의 부활을 더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한 역설적인 설교였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불명예를 벗을 수 있는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변박사의 다원주의적인 구원의 주장은 그 자체로서는 이단을 벗어버릴 수 없는 논리 였다. 그런데, 그것을 더 발전 시킬 수 있는 길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이 불러 가시어 그 이론을 발전 시킬 수 없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의 약점과 문제점이 무엇인가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을 뛰어넘는 이론을 찾아내야 한다.
그분이 원래 불교를 연구하게 된 동기는 불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의도였으리라고 본다. 또 홍교수의 경우도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맑시스트들에게 결국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의도에서 출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연구과정에서 그들의 이론에 심취한 면도 생기고 동의한 면도 생기어 자기의 정체성과 자기의 본래 의도를 잃어버리게 된 자리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타종교, 무신론적 과학주의) 나름대로 정교한 이론을 준비하고 있기에 그들의 이론에 따라가다보면 거기에 설득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종교와의 대화라든가 불신철학과의 대화는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제가 있어 그들을 돕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론의 싸움 이전에 영적인 싸움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내가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성령충만하여) 그들의 영적 세력에게 굴복 당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쯤 되면, 현실적으로 분명하고 상식적으로 분명한 사실도 그들의 이론에 빠져 내가 믿던 것을 양보하며 자기 정체성을 잃고 헤메게 되는 까닭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할 때, 학문이 많은 철학자들을 택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생활인들을 택하시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이론 대신 실제를 보여주시었고, 결국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고 그들이 성령이 충만할 때 비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부활의 증거자가 되었던 것이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류 대속의 주님으로 오신 것을 죽기까지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바울도 내가 복음을 전하는 데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의 증거와 더불어 증거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변박사의 기독교적으로 볼 때에 성공하지 못한 신학, - 즉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증거하지 못한 -을 결국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로서 불교도에게도 증거할 수 있었더면, 그의 불완전한 신학도 하나의 신학연구과정- 불교를 연구하는 과정상의 신학으로 그의 제자들이 불교를 넘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학으로 발전시킬 때, 그의 노력도 헛되지 만은 아니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밟고 넘어가라고 하였다. 그 의미를 잘 깨달아 주기를 바란다. 홍정수 교수의 경우는 아직 살아있는 까닭에 자기의 지난날 발언이 신학적인 미숙에서 나온 것이며, 역시 그리스도는 몸의 부활을 하시어 제자들과 음식도 나눠잡수시었고. 도마에게는 창자국을 만져보라고도 하셨던 것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는 몸으로도 부활 하신 게 확실하다고 지난날의 자기의 미숙과 그릇됨을 시인하고 나서면 된다. 기독교는 역시 기적의 종교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가 아직 살았을 때 그런 증거를 꼭 해주기를 바란다. 그럴때 기독교-맑시즘-기독교로 그의 신학이 완성될 것이며, 변박사의 이론은 기독교-불교의 자리에서 끝났는데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독교-불교-기독교로서 발전시켜야 된다고 본다. 신학의 연구는 케리그마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케리그마에 대한 설명을 그 시대에 또는 그종교 그 불신사상에 빠져 있는 이에게 사상에 더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출발이 칸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본인은 오히려 칸트이후의 헤겔- 신까지도 이성의 발전단계속에 집어넣은 까닭이라고 본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의 한계를 말하였고, 실천이성을 통해 윤리까지는 말할 수 있었으나. 그것의 원천인 신(하나님), 영원한 세계, 영적인 세계는 신앙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 하여 이성세계를 넘어서는 차원이라고 분명히 말했고 자기의 이성의 노력으로는 인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 무엇을 알 수 있는 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가? 하는 인간학적인 질문에 대해 그 대답을 못 찾고 말았다. 그런데 그 대답을 1-2세기후? 칼 바르트에 의해서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가 특별계시로 신구약의 주인공임을 밝힘으로서 그리고 타락이전의 인간의 모습, 그리고 타락된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인간의 구원의 길,구원받은 후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간상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믿음을 가져야 마땅히 알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고. 타락되어 죽을 수 밖에 없고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예수 믿고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야 성령받아,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고 또 구원받아야 영원한 복락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믿음이 아니고는 순수이성이나 실천 이성만 가지고는 인간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칸트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의 극복의 전제를 알려준 분이고, 그것을 바르트가 신학으로 보여 준 것이다. 헤겔의 이성지상주의적인 사상이야 말로 자유주의신학의 원조역활을 한 것이다. 초월적인 신을 절대 이성으로서, 인간의 정신속에 내재화 하려 했기 때문이다.
깨달을 자는 깨닫기 바란다.
변박사에게 할 줄기 빛이 있는 데 그것은 홍교수에게도 마찬가지인데 " 나는 사도신경을 믿는다"고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해석을 성경이 중언한대로 믿지 않는 것이 문제요, 사도신경을 철학의 명제로 보아 새로이 해석할 수 있다고 본 것이 그들의 문제인 것 같다. 변박사에게는 불교의 구원론이 가지지 못한 기독교의 구원을 말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즉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의 용을 처치한 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이 방면을 잘 설명해 주기 바란다. 불교도가 말하는 구원론과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론은 같을 수 가 없다. 혹 일부- 죄를 지어서는 안되고, 죄값은 반드시 치뤄야 없어진다고 하는 진리, 그리고 인과응보같은 것들은 비슷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은 죄문제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원의 진리이다. 이것은 불교만이 아니라 타종교에서는 해결해 주지 못한 기독교의 독특성이요, 유일성이다. 결국 이것 때문에 불교와 비슷한 점이 있고 유교와 비슷한 점이 있고 힌두교와 비슷한 점이 있어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그동안 비슷한 것들을 많이 연구하여 거의 같은 것인양 말하였다면, 이제는 서로 다른 점을 분명히 하여 결국, 그리스도교리의 독특성과 우월성과 실천성을 찾아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칸트가말하는 실천이성의 윤리를 넘어서는 영적인 진리가 있음을 크리스쳔들은 믿고 체험해야 하는 것이며, 최고의 증언자요, 복음의 토착화의 실제 원조는 철학자나 신학자가 아니라, 성령이시라는 것을 명심해 야 하는 것이다.
정희수 감독의 성령이해가 궁금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하며, 한 본질이신데 그리스도를 떠나 더 넓게 일하신다는 사상은 위험하다. 웨슬리가 말하는 선재은혜를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과 동일시하는 위험을 변박사에게서 보는데, 선재은혜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작은 보트일뿐 구원의 기선과 같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 조성(나는 죄인이고 나를 죄로 부터 구원해 줄 분이 필요하다고 느껴 구주를 찾도록 하는) 역활을 하는 정도로 보는 것이다. 타종교속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것은 거기 그냥 머물러 있어도 되는 구원 선이 아닌,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는 작은 보트역활을 하는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보나 거기에서 나와 결국 그리스도까지 가야만 구원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선재은혜를 구원에로 이끌지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으로 보지는 않았다. 유대교에 율법주의에 빠진자도 그대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후 음부에 내려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은 복음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자들에게 대한 기회주심으로 보여진다. 빛을 찾고자 타종교에 깄다가 참빛되신 그리스도앞으로 돌아 온 이들이 종종 있다.- 회개치 않고 복음을 믿지 않아도 거듭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매력적인 설로 구태어 전도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이다.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하는 명령에 정 반대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신 까닭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아담의 피를 받은 아담의 죄성을 가진 인간 그대로 있는 것이고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성령받아 하나님의 새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성화되어가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의 롭다함 받는 것은 구원의 현관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인도에 따라 순종하다보면 구원의 안방인 성화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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