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원대 도인권 목사의 말씀 - 시간을 아끼라.

민관기
  • 1694
  • 2022-12-26 06:59:20
알고 부르는 아리랑

이 글자와 말은 아주 매우 오래된 연원을 가진 것이다.
이 말은 학교 – 서당 – 성황당 - 서낭당 – 아리랑이 차례대로 그 시대와 성격에 따라서 변한 것이다.

그럼 추적해 볼까.
1. 아리랑 시절 : 한 1만년은 되었을까? 지금 여기 이 땅보다 더 위쪽에 살던 우리선조들은 소빙하기의 도래로 오랜 세월동안 점차 남하하여 여기에 까지 이르렀고, 같이 살던 족속들이 한 곳으로만 이주한 것이 아니어서 지금의 남북 아메리카, 일본 섬, 대만 섬,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헝가리 등의 유럽, 카자흐 등의 중앙아시아, 티벳이나 아프간, 부탄, 네팔 등의 산악지대, 이란이라크의 메소보다미아 지역으로 지중해의 팔레스틴으로,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리비아 선상까지 이동...

빙하기로 남하를 시작했지만 단번에 이주한 것은 아니어서 삶을 살다보면 탄생과 죽음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 – 우리 선조들은 선조들이 돌아가시면 돌아가신 시신을 묻고 나무를 심었다. 그것은 당시의 자연환경이 지구의 여러곳에서 화산활동 등이 활발하여 대기가 매우 않좋았을 것이라는 상황이다. 하여, 선조들은 유언으로 “나를 묻고 나무한 그루 심어다오”했다.
자신 한 몸이라도 후손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였으랴! 장소는 대개 있는 곳이 잘보이는 산의 언덕!

선조들을 묻고 한동안 살았는데 또 이동을 해야할 이유가 생겼다. 그들은 아쉽지만 심은 나무인 선조들의 뫼를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고, 떠나는 아쉬움을 마음의 가락에 담아 인류역사상 최초와 최후이며 앞으로도 없을 산자와 죽은자의 교창을 만들어 내었다.
-. 산자 : 아리랑 라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사자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이 말과 상황이 이해가 들 가시나?

곧, 아리랑은 알잇낭의 변화어인 것이다. 이 말은 알은 나의 몸을 이어준 선조들을 이르며, 리는 잇을 말하여 이며, 랑은 낭이 변한 말로 지금도 나무를 낭구라고 하는 것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있다.

정리하면.
아리랑은 선조들의 뫼이며 이 말은 알잇낭에서 변한 것이다. 이 나무 아래는 제사터, 공동회의, 자녀들 공동배움터 등으로 쓰였다.
= 이 나무아래서 하늘의 선조들께 제사드리는 모습을 본 이 민족들은 생각했다.

1) 저 사람들은 나무를 숭상하는 구나. 근데, 나무는 푸르고 싱그러우니 그런 것이 좋은거라고 느끼고 자신들도 따라한다는 것이 여성을 숭배한다여겨 여근숭배사상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노자대에 이르러 도덕경에 일부 반영되었고, 이 도덕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민족들이 소녀경이나 인도의 카마수트라 등으로 까지 전락시켰다.
2) 한편, 우리의 제사모습을 본 어떤 무리는 우리가 나무의 우람하고 힘 쎈 기상을 숭배한다 느껴 남근숭배사상을 가지게 되었고, 인류역사 이래 나타난 모든 문명/종교/특히, 전쟁과 여성폄하와 남성우월주의는 2만% 이 사상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것의 유산을 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쇼 등 부지기수로 많으로 부른다.
모든 주의나 이념도 나은거 하나없이 그러하다.
= 고대 왕조들의 왕관 등을 보면 나무모양이 있는 것이나 신전 등에 우람한 기둥을 세우고 모스크를 세우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3) 우리와 언어가 통했던 어떤 족속들은 생명체의 빛문화를 듣고도 착각하여 하늘에 떠있는 해가 빛인줄 알고 그걸 찾아 끝까지 따라 떠난 족속들이 지금의 남북 아메리카의 토속 족속들이다. 지금은 몽골리안의 본 원류를 가진 사람은 20여 년 전 100% 소멸했다.
일본 섬 애들도 비슷한 것이고.


2. 서낭당 시절 : 후일 약 5,000여 년전일까? 아리랑은 서낭당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오래된 선조들의 아리랑이 개수가 많아지고 이동하게 되니 구분하여 불리어질 필요성 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말은 변했지만 여전히 나무는 심겨지고 그 나무는 경배의 대상이되었다. 선조의 뫼였으므로 선조앞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 이 정도 시대에서 인더스, 메소보다미아, 이집트 문명 등이 등장했을 터이고, 유리하던 이스라엘족들도 거기 지금 그 땅으로 이동중이거나 이동했거나...


3. 성황당 시절 : 2~3,000여 년 전일까?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모든 것은 달라져 있었고 세대도 너무 바뀌고, 이민족과의 만남과 다툼 등의 과정을 거치며 문화가 교류되어 한문어가 전달되자 서낭당은 성황당으로 선조의 뫼가 아닌 종교시설과 같이 옛 무슨 귀신들의 집마냥 전락했다.
= 이 시절까지도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때 정도는 옛 배움방식대로 조의선인, 두레, 화랑 등으로 밖에서 문무를 겸비시키는 배움이었다.
= 아마도, 동예, 옥저, 부여, 마한, 진한, 변한 등의 부족국가 시절에는 소도나 민족문화가 전수되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3국시대라는 것이 민족의 문화소멸을 왜래종교의 유입으로 가져왔다.



4. 서당시절과 학교시절은 같아졌다. = 왜래종교인 불교와 도교, 유교의 전래되며 교육의 방식과 내용이 무척 변했고,
문무를 겸비시키는에서 문무를 구별하고 신분의 차별도 생기고 등인데,
제일 중요한 변화는 배움이 네모 안에서 가둔채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즉, 고려때부터 들어온 유학은 통치이념이 되었고, 교육은 배움이 아니라, 교육화되었고, 배움은 문자교육으로 한정되게 전락햇고, 이렇게 500여 년 지나니 몽골에 거의 망하고,
또 500여 년 지나 또 왜구들에게 망하고?..에서 1919년 민족정부의 수립후 1948년 정부수립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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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여 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예전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500여 년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10여 년일 수도 있다. 도인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광음을 아끼라, 이 때가 악하니라”


*. 도인권 목사는 평남 출신으로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어 연해주 동포, 러혁으로 동포와 만주 이거, 광복으로 동포들을 이끌고 제주로 남하하여 제주에 최초의 감리교회를 세우고 6.15전쟁후 목원대 설립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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