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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566
- 2022-12-23 21:16:48
[태초에]는 엔 아르케(ἐν ἀρχῇ)❶로서 “창세기 1:1의 서두를 상기시키고,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동등을 암시한다”(W. F. Howard).
여기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시초라는 설❷과 초시간적인 영원한 태초❸라는 설이 있는데,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❹ 이 점은 아르케(ἀρχή)의 의미를 보면 분명해진다. 아르케(ἀρχή)는 {시간이나 공간 또는 연속의 ‘처음’, ‘통치’, ‘탁월’, ‘수위’(首位), ‘주권’, ‘근본’ 등을 의미한다(골 1:18, 벧후 3:4, 계 3:14, 21:6, 22:13). 특히, 이 낱말은 “기원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처음’을 뜻한다. 즉,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W. Barclay).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즉 창조 행위와 새 피조물인 교회의 아르케이다. “그리스도는 권위와 능력의 근원이시며,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계획된 모든 것을 시작하신다”(A. Barnes)}(골 1:8의 주석).
불트만(R. Bultmann)은 “태초에(ἐν ἀρχῇ)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세계와 시간을 넘어선 존재와 만남을 의미한다는 것이 사실이다.”❺라고 하였다. 이 설명에 대해 바레트(C. K. Barrett)는 “세계와 시간 너머에 있는 존재가 예수 안에서 알려졌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계시니라](ἦν ὁ λόγος: 로고스가 있었다.)의 [말씀] 곧 로고스(λόγος)에 대해 레이놀즈(H. R. Reynolds)는 “이성 또는 지고하신 내재의 하나님 사상과 이야기 또는 말이라는 이중 의미가 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로고스(λόγος)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로고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을 나타내기 위해 스토아 철학에서 즐겨 쓰는 말이다. 둘째, 로고스는 지성 또는 이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헬라어이다. 셋째, 로고스는 말씀을 의미하는 헬라어이다}(벧전 2:2의 주석). 바레트(C. K. Barrett)는 “그 말 자체는 범신론적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보다 초기의 스토아학파는 로고스 외에 다른 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로고스는 합리적 원칙으로서 그에 따라 우주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정도로 ‘종자 로고스’(σπερματικοὶ λόγοι)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합리적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형성해야 했다.”라고 하였다.
필로(Philo)는 {신은 세계 창조자이나 초월자이므로 로고스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질서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 로고스에 대해 (1)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신의성으로 아직 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로고스, (2) 이렇게 내재하는 순수 관념으로 세계를 창조한 로고스로 이데의 총체, (3)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는 세계 법칙으로서의 로고스로 이해한다}(롬 4:17의 주석).
물론, 여기서는 영원부터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1:14, 요일 1:1, 히 4:12)❻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그분이 만물,❼ 특히 새 생명의 창조자이시고(약 1:18, 고후 5:17), 성부 하나님의 뜻이자 계시(히 1:2-3)이시기 때문이다. 오리겐(Origen)은 그분이 성부의 비밀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라❽고 하였고, 칼빈(J. Calvin)은 그분이 성부의 영원하신 뜻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반즈(A. Barnes)는 “그분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공표하고 명령을 발하시는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이다(히 1:1-3).”라고 하였다.
[계시니라]는 ‘존재하다’(ἔστιν)의 미완료 과거형인 엔(ἦν)이며 ‘존재해 오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태초에 태어나셨다’(ἐν ἀρχῇ ἐγένετο)가 아니라, ‘태초에 존재해 오셨다’(ἐν ἀρχῇ ἦν)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의 [함께]는 전치사 “프로스(πρὸς)로서 ‘~을 향한 방향’, ‘~의 맞은편에’, ‘~의 곁에 서 있는’을 의미한다”(H. J. S. Blaney).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그러한 의미로 볼 수 없다. 바레트(C. K. Barrett)는 “목적격과 함께 쓰인 ‘함께’(πρὸς)는 고전 그리스어의 ‘~면전에서’를 뜻할 수는 없는데 신약성서의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의미는 확실하다(막 6:3. 참조: 잠 8:30).”라고 하였다. 이 전치사는 단순한 정적인 공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거나 바라보며”(Abbott)❾ 부단한 교제를 하는 동적인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다(17:5, 막 9:19, 14:49, 눅 9:41).❿
이 문장에 대해 칼빈(J. Calvin)은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구별함으로써 삼위일체의 교리적 기반을 마련한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17:5에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말씀] 곧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표현이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우열 관계나 상하 관계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라고 밝히고 있다. 바레트(C. K. Barrett)는 “관사가 없는 ‘하느님’(θεὸς)은 서술적이며, 말씀의 본질을 서술한다. 관사가 없다는 사실은 말씀이 곧 하느님이시지만 말씀만이 유일하게 신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만일 [관사가 있는] ‘하느님’(ὁ θεὸς)이라는 말이 씌어졌다면 그것은 삼위의 두 번째 인격[위격] 외에는 어떠한 신적인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역으로, 즉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다’라고 읽을 수는 없다”(H. J. S. Blaney)라고 하는 점이다. “말씀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M. R. Vincent).⓫
반즈(A. Barnes)는 “제 이위가 똑같은 명칭 곧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과 똑같은 속성을 가지며, 똑같은 일을 수행하시며, 제 일위와 똑같은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똑같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라고 하였다(참조: 1:18, 14:9-10, 17:5).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고린도후서 4:4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와 빌립보서 2:6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와 골로새서 1:15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와 히브리서 1:3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등이 있다.⓬
요한은 1절을 반복 강조하여,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하였다. [그]란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영원 전부터 제 이 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말씀(로고스)과 만물의 관계에 대해,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물]은 판타(τὰ πάντα)로서 인류를 포함한 피조물들 전체를 뜻한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의 [말미암아]는 전치사 디아(δι’)로서 ‘통하여’라는 뜻이 있고, [지은 바 되었으니]는 에게네토(ἐγένετο)로서 ‘존재하다’, ‘창조하다’, ‘무(無)에서 어떤 것을 형성하다’, ‘생기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인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다 말씀(로고스)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즉, 제 이위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제 일위의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있어서 대행자이시며(D. A. Carson) 중보자이셨다는 것이다(고전 8:6, 골 1:16, 히 1:2, 10).
이 구절을 필로(Philo)의 로고스(Logos) 및 다른 영적 중재자들에 의한 창조설과 관련지을 필요는 없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는 전반절을 소극적으로 반복한 것이다. 버나드(J. H. Bernard)는 “앞줄에서 적극적으로 말한 내용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 흔한 구조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없이는]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이것은 ‘그분의 행위나 능력이 발휘되지 않고는’, 또는 ‘그분이 알지 못하고서는’을 뜻한다.······이것은 강한 어조의 표현으로 그가 방금 했던 말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들이라도 예외 없이 그분을 통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다.”라고 하였다.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에 대해 말한 사도 요한은, 이어서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하였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는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생명은 조에(ζωὴ)로서 ‘생애’를 뜻하는 비오스(βίος)와 다르고, 죽음(롬 6:22)과 멸망(갈 6:8)의 반대인 신적 생명 곧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다(5:26, 11:25, 14:6, 요일 1:1, 2, 5:11, 행 3:15, 골 3:4). 물론, 이 생명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덕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βίος κατ’ ἀρετήν)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적 실체로서의 불멸은 결코 아니다.⓭
반즈(A. Barnes)는 “그분이 생명이시라는 표현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새 창조 또는 인간을 새롭게 하는 일과 죄의 상태로부터의 회복 등은 종종 첫 창조에 비교된다. 로고스는 생명의 원천이므로 유사하나 보다 고귀한 의미에 있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엡 2:1).”라고 하였다.
바울 역시 사도 요한과 같은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생명의 존재 근거요 의의요 목적이시다(빌 1:20, 갈 2:20).⓮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이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인간을 지시하는 것이다(롬 5:17, 딤후 1:1). 즉,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의 “참 생명”(T. K. Abot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원받은 자의 생명은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참조: 요일 5:11-13).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실제적이고도 심오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C. Vaughan, p. 172, A. Clarke)}(골 3:3의 주석).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의 구원과 관련되는 모든 것인 기쁨, 평화, 능력, 성장, 도덕적 승리 등은 생명이란 말에 포함된다.”⓯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 이후의 영역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 누리는 생명은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⓰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이 생명으로 사는바(롬 6:4)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갈 5:16-17). 그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빌 3:20).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초월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나 신령한 삶을 살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장차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이므로(딤전 6:19), 세상에서 이 생명의 은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생명을 부여하고(6:33-, 8:12, 20:31), 또 누리게 하시는 이는 절대적인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1:4, 14:6, 행 3:15). 바울은 이 생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빌 3:20)로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롬 6:4)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자(갈 2:20)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가리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하였다.
[생명](ζωὴ)이나 [빛](φώς)은 복음서에서 매우 특징적인 말들 중 하나인데, 이 복음서에는 ‘생명’이란 낱말이 54회, ‘빛’이란 낱말이 23회 사용되었다. 이 두 낱말과 60회 사용된 ‘사랑’이란 낱말은 이 복음서의 그리스도론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태초에 신의 말씀의 첫 행동은 빛의 창조이었다(창 1:3). 이것은 우주에서의 생명의 첫 표명이었으며, 따라서 시편 기자는 동시에 신의 생명과 신의 빛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⓱
여기서 사도 요한은 우주의 빛으로서의 말씀의 생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영적 창조로 넘어가는 것이다. 즉, 태초에 말씀의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셨다는 것이다(참조: 8:12, 9:5, 12:46).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표현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을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ὁ θεὸς φώς ἐστιν)에 대해서 불트만(R. Bultmann)은 “······그 문장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와 유다교, 그리고 또한 희랍 사상과 영지주의에 있어서도 하느님, 하느님의 본질, 신적인 것의 영역 등을 빛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형태는 모두 다르더라도 그 기본적인 이해는 빛의 본질적 의미가 인간이 자신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리고 또한 자신의 영적인 생활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성결이란 점이다.······빛은 일반적으로 구원, 특히 종말론적 구원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요일 2:8).”라고 하였다}(요일 1:5의 주석).
그와 비슷하게 {켈리(J. N. D. Kelly)도 “빛은 유대교에서 메시아 및 메시아 시대와 관련되어 있었다(SB Ⅰ, 161f.: 곧 시 36:9의 ‘주님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나이다.’에 관한 랍비들의 주석). 그리고 그와 같이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빛이셨으며(요 1:4, 8, 8:12 등),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들은 종말론적인 빛에 들어가 그분 안에서 거하는 자들로 간주되었다(요 12:35, 행 26:18, 엡 5:8, 골 1:12, 살전 5:5, 요일 1:5-2:11).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그들의 과거는 ‘어둠’으로, 그들의 세례는 ‘빛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롬 13:12, 엡 5:14, 히 6:4, 10, 32. Justin,Ⅰ Apol. lxi. 12f.; lxv.Ⅰ; Dial cxxii.Ⅰ).”}(벧전 2:9의 주석)라고 설명하고 있다.
{빛(포스, φώς)은 “하나님[그리스도]의 본질을 가장 잘 묘사한 것”(A. E. Brooke)으로 ‘존엄성과 영광’(딤전 6:16, 요일 1:5), ‘불변성’(벧전 1:17), ‘완전한 의와 진리’(시 43:3, 94:1, 요 3:20, 요일 1:5), “순수성”(A. E. Brooke, W. Barclay), “탁월한 거룩성”(M. Henry, W. Barclay)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 빛은 하나님(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잘 묘사한 것이다(시 27:1, 80:3, 7, 19, 요 12:36). 하나님은 죄의 종으로 어둠에 속한 인간에게 그의 점과 흠을 드러내 주시고, 구원자로서의 자신을 계시하신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에게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비춰 주신다.⓲ 빛만이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빛이 그대로 심판이 되는 것이다(요 3:19)}(요일 1:5의 주석).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빛과 성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특수한 계시인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빛이시자(1:4) 세상의 빛이신(8:12) 참 빛이시다(1:9).
{알란(J. A. Allan)에 의하면, “이 빛은 충분히 그리고 명백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비치므로 무지와 죄와 죽음이 극복된다(눅 1:78, 마 4:16, 요 1:1-18, 8:12, 9:1-41, 고후 4:4-6).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빛의 본질을 나누어 갖는다(요 12:35-).”라고 한다}(엡 5:6의 주석). 그러므로 빛이란 성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마 5:14, 요 3:20).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고후 4:6, 행 26:18, 골 1:13, 벧전 2:9). 달리 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요(롬 13:14, 갈 3:27), 빛의 갑옷을 입은 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참 빛이신 성자와 그 빛의 본질을 나누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약 1:17) 곧 근원적 빛이시다.
사도 요한은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해,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의 동사는 “계속적인 현재 시제인 파이네이(φαίνει)이다”(R. C. H. Lenski).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후(Wiss)나 구약 시대(De Wette)로 국한하는 견해”⓳는 옳지 않다. 루터(M. Luther)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생명이며 빛이셨다. 심지어 출현하시기 전에도, 태초부터도 생명이며 빛이셨고, 또한 끝까지 생명이며 빛으로 남으실 것이다. 그분은 항상 자신의 성도들과 예언자들과 성직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과 행위로 모든 피조물들과 성서를 비추신다. 그분은 결코 비추기를 그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이 비추어 온 곳은 어디든지 현저한 어두움이 있었고, 그 어두움은 그분을 깨닫지 못했다.”⓴라고 하였다.
[어두움](스코티아, σκοτίᾳ) 또는 밤은 은유로서 ‘영적 무지’(고후 4:4, 6, 엡 4:18), ‘우상 숭배’(엡 5:8), ‘불신앙’(요 3:19), ‘죄’(잠 2:13, 살전 5:5), ‘타락’(행 26:18), ‘고통’(사 9:1), ‘역경’(사 21:12), ‘불행’(사 8:22), ‘사망’(사 9:2, 요 9:4), ‘멸망 또는 멸망의 장소’(마 22:13) 등을 의미한다. {엘리코트(Ellicott)는 “어두움이라는 말은 사악함과 어두워진 이해력의 영역,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파멸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살전 5:4의 주석). 한 마디로 말해, 사단과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및 세상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복음서에서 어두움은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 자신이 발견하는 악한 환경이다.”라고 하는 모리스(L. Morris)의 설명은 옳지 않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의 [깨닫지](카테라벤, κατέλαβεν)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간직 또는 보유하기 위해서 ‘이해하거나 깨닫는다’는 뜻이고(빌 3:12, 고전 9:24, 롬 9:30), 둘째는 피하거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지배 하에 두기 위해 ‘달려들어 움켜잡는다’는 뜻이다. 성경의 유비는 후자를 지지한다.”라고 설명하였고; 버나드(J. H. Bernard)는 “대개 물리적으로 ‘잡다’, ‘붙잡다’를 의미하거나(민 21:32, 막 9:18, 요 8:4) 지적으로 ‘이해하다’, ‘인식하다’, ‘통찰하다’(행 10:34, 25:25, 엡 3:18 등)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사단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 또는 세상이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붙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참조: 3:19, 8:12, 12:35, 46). 반즈(A. Barnes)는 “사람들이 너무 무지하고 비천하며 깊은 죄에 빠져서 주님의 교훈을 받지 않고, 깨닫지도 못하며, 구원받지도 못하고 있다. 죄악은 항상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주님 예수의 성품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상, 모르면 뭘 모르는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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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C. K. Barrett: 이와 비슷하게 토라의 존재도 ‘태초’에까지 소급된다. 참조: 창세기 대미드라쉬 1, 2에 “토라 없는 태초”(reshith)는 없다고 하였고, Pesahim 54a에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일곱 가지, 즉 토라, 회개, 에덴동산, 게헨나, 영광의 보좌, 성전, 메시아라는 이름이 창조되었다.”라고 하였다(이러한 탈무드 인용문들에서는 잠언 8:22이 토라의 선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용되었다).
2) J. Wesley, A. M. Hunter, W. Hendriksen, H. J. S. Blaney, “Temple”(in L. Morris), R. V. G. Tasker, E. G. Dobson, D. A. Carson, L. Morris, 박윤선, 이상근.
3) J. Calvin, D. J. Guthrie, A. Barnes, A. Clarke, M. C. Tenney, R. C. H. Lenski, E. F. Harrison, “R. Bultmann”(C. K. Barrett), H. R. Reynolds, C. K. Barrett, R. E. Brown, 黑崎幸吉.
4) 저자의 요한일서 1:1의 주석을 보라.
5) in C. K. Barrett.
6) 저자의 요한일서 1:1의 주석과 히브리서 4:12의 주석을 보라.
7) A. Barnes: 그것은 갈대아어의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사 45:12의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와 같은 말씀이다. 이 구절은 갈대아어로는 “내가 나의 말을 통하여 만들었도다”라고 되어 있다. 사 48:13의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라는 말씀은 갈대아어로 “나의 말을 통하여 나는 땅을 정하였도다”가 된다. 그 밖의 여러 곳에서도 이와 같은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8) in 이상근.
9) in C. K. Barrett.
10) 참조: “Godet, Dods, Westcott, Zahn”(in 이상근), 黑崎幸吉.
11) in H. J. S. Blaney.
12) 저자의 고린도후서 4:4의 주석과 빌립보서 2:6의 주석과 골로새서 1:15의 주석과 히브리서 1:3의 주석을 보라.
13) G. Kittel, ed., op. cit., Vol. I, p. 867.
14) 저자의 빌립보서 1:20의 주석과 갈라디아서 2:20의 주석을 보라.
15) J. S. Stewart, op. cit., p. 192.
16) Ibid., p. 193.
17) 참조: J. H. Bernard.
18) 참조: W. Barclay.
19) in 이상근.
20) in R. C. H. L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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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56-66.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5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