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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큰 적을 보아야 합니다.
현종서
- 1482
- 2023-01-08 00:21:25
루터가 성서신학하며 깨달은 진리를 칼빈이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기독교강요(조직신학)이고,
그들이 깨달은 진리에 교부신학이나, 믿음은혜 말씀만이 아니라,선의 실천도 중요시한 캐톨릭의 장점을 수용하며, 무엇보다도, 개인과 사회성화를 강조한 웨슬리 신학, -웨슬리는 한동안 비신학자로 한낮 부흥설교가로만 알았지만(특히 장로교인들이) 새로이 빌견한 웨슬리는 가장 포용력있는 종교개혁의 완성자로서의 신학을 설교와 목회로 한 실천신학자였음을 알게 되었지요.
웨슬리의 설교는 논리적이고 전문적 신학을 용해하여 평신도들도 알기 쉬운 평이한 언어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18세기 독일에서 출발한 이성중심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나온 자유주의 신학영향과 그런 흐름에서 나온 성서 역사비평학과 그로 인해 을 성경의 축자적 영감설이 도전받아 신앙인들의 자기사상들을 기록한 인간의 신학사상집으로 이 것을 모아 놓은 책인양 취급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해 그 시대 전의 사람으로 그러 흐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과학실증주의나 역사비평학을 수용하여 성서의 권위( 하나님의 영감과 계시의 책이라는)를 무너뜨릴 때, 그들의 비판 내용을 수용하면서도, 성서의 권위와 기독교의 교리를 지키려 노력이한 이들이 있으니 그 대표적인 이들이 신정통신학자들(칼바르트, 틸리히, 불트만) 이었지요, 인간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며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를 죽이는 신학”으로 보고 성서가 가르치는 구원근본교리를 지키려고 투쟁한 보수 장로교회들의 신학자들(메이첸등)이 있었고, 독일의 자유주의의 흐름에 대해 미감리회의 13개 교단 소속신학교는 이성도 중시하는 감리교회의 전통에 따라 일단 발전 신학으로 받아들여 소화해 내려 하였지요.감리교회도 성령을 체험한 학교(엘에이 아주사 ,캔터키주의 에즈베리신대)는 체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이었지요. 자유주의 사상을 기초로한 신학은 성경도 시대적 문화적인 산물로, 당시 인간들의 신앙사상을 표현 책들이며 그것들의 체계화 한 것이 교리신학 교의학, 조직신학으로 본 것이지요. 그러한 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을 현대과학 교육(진화론 바탕의)을 받은 현대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철학사상에 맞추어 다양하게 변신해 보았자, 코카 콜라 수준을 넘지못하며, 그러한 비효율적인 신학하에 교회는 병들고 쇠약해 가게 되었다고 보게 된 것었지요.
성경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언제나 형제형인 4차원적 진리의 말씀이라면, 성경의 내용을 이시대 문화에 그대로 적용해도 별 무리가 없고, 생명소생과 인격변화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본다면, 우리는 그동안 애써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만들어 온 현대신학에 대해서 그것출현의 초기와 달리, 그 자체를 성과와 더불어 반성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젊은 목사는 그 현대신학의 건물이 신학이라고 믿고 있는 세대로서,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를 쓰지 않거나 그들이 사용하는 신학방법을 쓰지 않으려 하면 신학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현대신학의 대부분의 방법인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철학의 눈, 또는 자기 민족 고유의 철학의 문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적인 방법과 그로 인해 새로이 생겨난 신학을 한국교회가 성경적 진리를 그대로 비판없이 받아들인 수준의 피선교지의 역사가 짧은 어린 교회였지요. 종교개혁으로 기독교구원교리의 재발견하여 발전해온 개신교회 정통신학은 동시대 르네 상스의 영향으로 이성존중의 시대의 역사실증적, 비평적 신학 활동을 기존신학세계내에서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요, 내용이므로 일단 학계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적 신학의 문제점은 마치 그러한 철학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거나 기독교의 보려하기 때문에, 참신한 듯 보이나 그 색깔있는 안경을 통해 봄으로 실제자체를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당히 왜곡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방법은 현대에 다양한 신학들을 만들어 내었고, 계속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것이긴 한 대, 교회내에 진리 설명과 교회밖의 진리변증에 효과 대신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식한 듯 한데 핵심을 놓쳐버리고, 휘황한 몸놀림을 하였는데, 적의 급소를 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젊은 목사는 현상학이라는 철학을 배워 그 눈으로 신학세계를 보려한 시도를 감지 하게 됩니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보다 한 두 단어를 자기 식으로 이해 하고 판단하여 원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자기 주관적으로 상상을 섞어 이해하여 독한 언어를 써가면서 마구자비로 비판을 해 대고 있습니다. (주사파들이 얼론 플레이 하듯)
여기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보아 하나님의 계시가 그러하듯 그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항상 진리이므로 성경을 읽되, 여러성경으로 읽고(한 부분에서 이해 안되는 구절이 있으면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된 곳이 있으니, 찾아 읽고)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니(성령이 원 저자) 성령의 감동으로 읽으라( 원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읽되, 맑시즘이나, 하이데거 철학이나, 무슨 인도철학, 무슨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 철학으로 읽지말고, 성경을 성경으로, 어느 성경의 부분을 전체 성경의 정신으로 지금도 그 성경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따라 읽으라 하는 것, 그러다 보니, 기도하며 읽어야 하고, 통독하여 읽어야 하며, 때로 원어를 찾아 읽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신학이 연원하였고 발전 확장 발전해 간 곳에 기독교가 쇠약해 져 있고 점 점 더 쇠약해 하여 없어져 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 성경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체험적인 신앙인이 늘어가며, 교회가 부흥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지국의 북반구를 버리고 남반구 쪽으로 역사해 가며, 그들이 기독교회이 주변 변두리 세력이 아니라, 주도세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새로운 선교지에 가서 현대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자체를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전하고 있는 데 그곳에 성서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이 시녀의 노릇하던 위치에서 주인노릇을 하며 초월적 계시신학을 자기 입맛대로 자기 이해의 한계속에 집어넣으려 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그리고 초월적인 성령의 역사가 불신앙적인 이성에 의해 제약당하고 변질되고 있는 모습인데, 선교현장에서는 성서속의 기적적인 사건들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한 참 조용기 목사가 순복음을 주장하며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다 하면서 성서속의 기적 사건이 오늘에도 변함없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자, 한국교회 대부흥의 한 시대를 열었고 세계여러 나라에서 이교회와 최자실 금식기도원을 부지런히 방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십년 좀 더 윗 세대로 올라가면, 백시응 전도사의 삼각산 특별기도원 집회, 그리고 경남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의 여름 산상성회, 그리고 이성봉 목사의 전국 순회부흥운동, 감리회 철원수도원의 집회(박경룡,유재헌,이성해,전진)는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요람들이었다.
젊은 목회자들은 이런 한국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들을 잘 보존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철학은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신학도 직업적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깊은 영적 체험을 한 이들의 성령의 감동하에 성경과 대화속에 체득한 체험적 진리들은 소중한 신학의 재료들이라고 나는 봅니다.
WCC의 다원주의 신학에 인도의 토착신학이나 한국의 토착신학이 어느정도 기여한듯 보이나, 실험신학을 넘어 더 완성된 신학으로 그들을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구미를 따라가던 신학에서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기독교의 구원의진리를 더분명히 이해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부활승천하시어 하나님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장차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하는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을 재 발견하여, 그들을 설득 바른 구원의 진리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