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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9강 2:1-10 예루살렘 회의(2:2b-5)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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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0 20:38:20
한 마디로 말해, 바울이 제출한 복음이란 할례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 즉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 특히 유명한 자들에게 제출한 목적은 “그들의 인정을 받고자 함”(E. Huxtable)도 아니고, “외적이며 부수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수정하고 더욱 확신할 수 있는 자료를 얻기 위함”(O. F. Blackwelder)도 아니며, 다만 자신이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달음질하는 것]은 경기 용어인 트레코(τρέχω)로서 바울이 즐겨 사용하였다(5:7, 롬 9:16, 고전 9:24, 26, 빌 2:16, 3:13, 14 등). 여기서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한 열심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힘써 전도한 결과가 헛것이 될까 염려되어 복음을 제출한 것이다. 즉, 그의 복음 선교의 열매인 그리스도인들(특히, 갈라디아의 이방인 신자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교훈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므로, 그것을 막고 복음의 진리 가운데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 그의 복음이 원 사도들의 복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재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유명한 자들에게 그의 복음을 설명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의 복음이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함이었다”(W. Barclay). 그리고 이 시도는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행 15:7-11, 13:32).
그러나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여, “디도에게 할례를 받으라는 압력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E. Huxtable, 黑崎幸吉).
아마도 이 압력은 율법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인 거짓 형제들(2:4)이 가했거나, 혹은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적 지도자들이 가했을 것이다”(E. F. Harrison).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라는 표현을 들어, 디도가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억지로가 아니라 자의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❶이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4절과 5절의 설명을 미루어 볼 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압력이 있었으나 바울이 단호하게 거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❷
[할례]는 페리트메테나이(περιτμηθήναι)로서, {고대의 애굽과 앗수르와 바빌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셈족 사이에 널리 행해진 포경 수술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이유, 즉 질병 예방과 결혼 준비를 위한 것과 히브리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희생의 한 형태였다.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할례는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증거요 선민의 표로서, 난 지 팔일 만에 행한 종교 의식이었으며(창 17:10-14), 이스라엘의 종들도 할례를 받았다. 또한, 외국인 거주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다(출 12:48-49).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경우처럼, 율법의 요구 중 하나인 할례에 대해서도 그 의식(형식)을 부당하게 신뢰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유대교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게헨나 문 옆에 앉아서 할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책임져 준다고 한다(Gen. R, xlviii). 일반적으로는 오직 할례 받은 어린이들만이 내세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례를 통하여 중생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세례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두 부류로 나눔으로써, 사실상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분류하고 있었던 것이다”(하리슨). 이 점에 대해 “랍비 메나켐(Menachem)은 자신의 「모세 오경 주석」에서 ‘할례를 받은 자는 아무도 지옥을 볼 자가 없다.’고 하였고, 메드라쉬 틸림(Medrash Tillim)은 자신의 주석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할례받은 자는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다”(Hodge)}(롬 2:25의 주석).
그러나 바울은 문자적 의미의 할례를 영광으로 알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할례 의식을 비판하여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엡 2:11), 또는 “손 할례당”(빌 3:2)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 성경 자체도 문자적 의미와 대조하여 도덕적 또는 영적 의미에서 마음(레 26:41, 신 10:16, 30:6, 렘 4:4)과 입술(출 6:12, 30)과 귀(렘 6:10)의 할례를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는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7:19. 참조: 갈 5:6, 6:15).
그러므로 할례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이 점에 대해 루터(M. Luther)는 “바울은 할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받게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그가 인식시키려고 애쓴 것은 할례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에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또, 어드만(C. R. Erdman)도 “바울은 율법을 의식적 또는 사회적인 의미에서만 용인하였을 뿐이지, 구원의 조건으로는 용납하지 않았다.”라고 같은 의미의 설명을 하였다.
실제로 바울은 복음 선교에 도움이 될 경우에 할례를 행하기도 하였다(고전 9:20-23). 그 예로 디모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한 디모데(행 16:1)에게 할례를 행하였다(행 16:3).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이유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은 “바울은 장차 자신이 전도해야 할, 개종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의 감정을 쓸데없이 상하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마이어(Meyer)는 “바울은 반대자들이 할례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진하여 인정할 때, 아직 잘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들을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라고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순수한 이방인이었으며, 특히 거짓 형제(교사)들이 바울의 교리를 비방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한 이유에 대해,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라고 설명하였다.
[가만히 들어온]이란 파레이삭투스(παρεισάκτους)로서 ‘암암리에 숨어서 들어온’을 의미한다(E. Huxtable, R. C. H. Lenski), 따라서 몰래 숨어서 들어온 형제란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를 배격하는 거짓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 [거짓 형제]들이 들어온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22의 주석을 보라.)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진 자유]―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의무로부터의 해방―로 인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엿보고](카타스코페어, κατασκοπέω), 즉 몰래 조사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금 율법의 종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참조: 4:25, 5:1). 다시 말하면, 거짓 교사(형제)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데에 할례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는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함정을 알아챘으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이다”(J. Calvin, M. Henry).
바울 자신은【5】[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잘라 말하였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하는 요구에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한 이유에 대해, [복음(유앙겔리우, εὐαγγελίιου: 1:6의 주석을 볼라.)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하였다.
[복음의 진리]를 가리켜, 루터(M. Luther)는 “거짓된 복음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라 하고, 훅스타블(E. Huxtable) “복음에서 구체화된 변하지 않는 확실한 교리, 즉 복음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은 진리이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복음과 진리를 동격으로 보는 것이 옳다.
바울은 복음 곧 진리가 할례 등의 추가로 부패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그 진리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특히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항상 있도록 하기 위해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은 할례이었다. 그와 유사하게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많은 규칙들 때문에 구원의 길을 막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복음의 진리가 온 교회와 성도들에게 항상 있도록 하기 위해 융통성 있게 규칙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복음 선교를 위해 개방적으로 타종교와 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거나 타협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차선의 것으로 인해 최선의 것을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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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R. T. Stamm, “zahn, Bousset, Beet”(in 이상근).
2) “Chrysostom, Theodoret, De Wette”(in 이상근). M. Luther, J. A. Bengel, J. Calvin, F. Rendall, E. Huxtable, J. B. Lightfoot, E. H. Perowne, J. Dow, S. J. Mikolaski, W. T. Dayton, 黑崎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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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96-101.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6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