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에 내 고향을 생각하며

민관기
  • 1451
  • 2023-02-06 06:30:50
반월과 보름 달


나는 반월이란 지명을 가진 곳에서 조선초기인 약 600여 년전부터 대대로 조상때부터 나고 자랐다. 얼마 전까진 그냥 반달이란 동네 이름 뜻으로 알고 그냥 살아왔다. 반월면이란 지명은 안산, 수원, 군포 등으로 땅이 나뉘어지며 지명조차도 사라졌고 반월역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옛 반월이라하여 구 반월이라 부른다. 1,000여 년?은 넘었을 반월이란 지명이 없어져 좀 허망하던 차였다. 땅은 유구하건만 나의 반월은 사라짐에 반월인들의 마음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헌데, 얼마 전부터 이 반이란 말의 뜻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월에서 반이 제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문자이다. 바게열의 말은 [받]을 본말로 반(받은)-과거형, 밤(받음)-현재형, 발(발을, 발할)-미래형이다. 이를 통해 받은 이 과거, 현재, 미래형 모두를 담지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반이란 말은 이미 과거에 받았다는 의미이고 앞으로도 받을 것이 반은 더 남앗다는 뜻이다.

지금껏 역사속에서 반월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린 반이로구나? 뭔가 완성형이라기보다는 좀 모자라는가?라는 느낌으로 살아왔었다. 이것이 운명인가?하여 불평하지 않고 그래도 반이라도 주신 하늘과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았다. 하여, 반월인들은 도전적이거나 모험적이거나 하는 인사들이 거의 없었다. 사법고시를 패스해도 사회로 정계로 진출하는 예가 없다. 그냥 회사 법무담당, 공무원 등하고 공부 잘하는 여성들이라야 교사나 간호사, 은행원 등을 한다. 한 마디로 도전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안정이 최고다라는 자세다.

이러한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성정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추적해 보고자 한다.

민가들은 고려중기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고려왕에게 청하여 고려에 계속 남아 살기를 청한 것이 한반도 전래 최초의 민가이며, 이들은 지금의 여주(흥)를 본관으로 지금껏 하나의 본을 유지하고 살고있으며, 조선초기 3형제가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첫째는 여주(흥)에 남고 둘째는 반월로 셋째는 전남 해남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나는 둘째 반월로 이주한 민가의 후손이다. 민가들은 주로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딸들을 훌륭하게 키워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혼인시키는 방향으로 민가들의 권세를 확장시키는 전략을 우리 선조들은 채택하여 왔고,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숙종의 소현왕후, 고종의 명성황후, 순종의 효의황후? 등인데, 하나같이 문제가 있었다. 원경왕후는 절대권력의 태종의 비로 세종 등을 낳아 훗날 절대권력을 잡을 것이 거의 확실시 되자 꿈에 부풀었다가 남동생들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태종으로부터 죽임을 당했고, 소현황후는 왕자도 못낳았고 희빈 장씨와의 그러한 삶이 있었던 것은 다 아는 바이고, 명성황후 또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순종의 비야 왜정기이니 물을 것도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무슨 일인가에 연루가 되거나 하여 권문세가의 최종단계에 이르르진 못하였다.
다만, 반월 민가 조상들은 보는 눈은 있어(송의 한족보다 고려의 민족성이 더 뛰어난걸 한 눈에 알아채고 고려에 남았다) 한명회가 어릴적에 데릴사위로 들였고, 한명회는 세조의 반정공신이 되어 권력의 핵심일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고, 민씨 부인으로부터 얻은 딸 셋을 왕의 비로 차례대로 들였다.
이 때, 한명회는 자신의 장인인 민대생에게 현재, 안산시 팔곡동의 거의 모든 땅을 고려의 왕족인 왕가였다가 전가로 변신/위장하여 살고 있던 이들의 땅을 자신의 장인에게 권력을 이용하여 주었다.

이 땅을 기반으로 반월의 민가들은 400여 년 이상의 세월을 평안히 살아올 수있었다. 벼슬을 하는 이는 한양에 가서 근무하다가 옷을 벗으면 다시 반월로 오곤하는 세월에 큰 변화가 없이 살았다. 대부분은 그냥 농사 짓고 살았고,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사사나 소현왕후의 괴로운 삶속에서 그저 겸손하게 떠들지 않고 사는 것의 기본을 배웠다. 까불지 말자이다.

그런데, 1895년 사고는 터졌다. 국가발전전략의 일환으로 개화를 선택한 조선 정부는 각종 개화 전략을 펼쳤는데, 그 전략의 핵심 실세인 명성황후가 침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왜가 황후를 호혜국 상대로는 최초이자 최후의 만행을 저지르니 이를 “명겅황후시해사건” “을미사변” “을시왜란”이라 한다. 조국은 을미의병과 동학혁명의 참화로 빠져가는 등의 위기에 빠졌을 때 충정공 민영환은 한양에 살며 벼슬을 하고 있다가 반월의 민가 종친들을 찾아왔다. 형님들, 아저씨들 “우리 누님의 원수+를 갚읍시다”라고 했을 때 반월 민가들은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하여, 반월 민가들은 역시 은둔 민가의 삶을 선택한다.
+. 명성황후의 원수는 김구가 일본군 중위를 죽이므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하므로, 아들 순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우범선이 처단됨으로 부분적으론 갚아졌다. 이 대목은 할 말이 더 많아야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처음, 송나라에서 즉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성씨이니 이 땅에 그 바탕이 약해 얌전하게 살았었고, 원경왕후때 까불다가 몰살 당했고, 왕자도 생산하지 못하고 죽은 소현왕후에 의기소침한 반월 민가들은 역시나 조용히 살기로 한다. 반면, 한양과 여주의 민가들은 민영환 지사처럼 궐기하여 민긍호, 민종식 등 5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고, 한편, 누님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왜에 빌붙어 산 민영휘(휘문의숙 설립자) 등의 친일파 50여 명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반월 사람들은 물론, 아무도 아무 일도 안했으므로 독립유공자도 친일파도 있었을 리가 없다.

다음엔 반대로 은둔 민가의 삶을 벗어날 기회가 왔다. 때는 1919년 3~4월이었다. 조국은 독립선언 축하로 만세가 봉화처럼 피어올랐다. 반월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찍이 전래된 군포 둔대교회 1902년, 1903년 반월교회, 1907년 샘골교회 등에 개화 선각자들이 있었으므로 서울의 독립축하식을 이어받아 1주일 내내 반월면민 4,000여 명중 절반인 2,000여 명이 반월 장터에 모여 축하식을 하였다. 헌데, 운동을 주도하던 교인들은 뭐가 좀 있는 부자들이 아니었다. 면민 2,000여 명이 1주일을 모여 잔치를 벌이는데 먹을 것이 필요했고, 이 식량을 당시 지역의 부자였던 민가들이 담당을 하였다. 반월지역의 만세운동은 강렬했고 치열했으나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다.

4월 들어 지금 봉(나봉, 노적봉, 수암봉, 군자봉, ?, ?, ?)자가 붙어 있는 산(후일 봉화가 올랐던 산을 봉자로 고쳐 불렀고, 안산의 산들은 악산이 없어 대부분 산의 정상이 봉긋하다)에 서는 봉화가 피어올랐고, 이를 신호로 동네 청년들 중심으로 모두 다 모여 축하식이 거행되었던 것인데, 반월 만세운동의 특징은 비폭력적인건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서 또 한번 반월 민가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만세 시위도중 반월 면장과 순사 둘이 나와 간곡한 어조로 해산할 것을 권유하자, 이만하면 우리의 축하 뜻은 다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판단하여 다 집으로 가서 반월지역에서 50여 회의 봉화와 50여 회의 집회가 있었으나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던양 독립축하하고 밥먹고 헤어졌다.(독립운동은 있었으나 독립유공자는 배출될 여지가 없어졌다. 허나, 인근의 수원종로교회나 화성의 제암리, 수촌리, 화수리, 사강리 교회 등과는 완전히 대비된다. 이곳에선 30여 명이 순국했고 100명 이상의 투옥자, 민가 700여 호가 방화 되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지냈다.
샘골교회 최용신 선생 시대인 1930년대 생략.(반월 일대는 강력한 농촌계뭉운동의 진원지)

최용신 선생 시대의 영향으로 반월 일대엔 사회주의가 발을 못 붙였다. 이는 6.25때의 인민재판으로 증명된다. 남침한 인민군은 인민재판을 열었다. 빨간 완장 찬자는 없었다 전한다.
인민군 : “악덕지주를 고발하라”
군중들 : “여긴 지주는 있는데 악덕지주는 없습니다.“ 했다.
인민군 : 어째서?군중 중 : ”저 분이 지주신데, 저 분 가문에선 몇 해전에 정부가 농지개혁을 하기 전에 자신의 땅을 붙이던 소직인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눠주셨습니다.“ 라고 했다.
인민군 : ???.
하여, 반월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민재판을 통한 악덕지주 처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다.
이 땅을 나누어 주었던 이들이 반월 민가들이다.

그리고는 또 조용히 지냈다.
몰론, 수원에 농촌진흥청이 있고, 최용신 시대의 영향으로 농민들의 토착운동도 활발했다.
언제나처럼 교인들은 비교인들과 함께 했다.
어린아이 놀이터 개발, 공동 방앗간 운영, 공동 마을 신협 조직, 어린아이 무료 탁아소 운영, 공동 못자리 만들어 못자리없는 농민들에게 무상 제공, 농촌진흥청의 농업지도 등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이 전부터 최용신을 잇는 우장춘과 유달영 선생 등의 영향으로 교인/비교인간에 연합으로 활발히 이루어 졌다.

*. 반월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동네사람끼리 혼인관계를 거의 맺지 않는다.
*. 하여, 반월인들은 남녀를 남녀로 안본다. 그냥 동네 사람일 뿐이다. 이는 정치와 연관되어 정계 진출이 거의 없다. 사실, 동네 남녀가 남녀로 보이면 그 동네의 남녀들은 서로는 서로를 차지?하기 위함인지 선의의 경쟁보단 모함, 비방, 음해등 나쁜 행위를 통해 남녀를 차지하기 위한 행위들을 한다. 대표적으로 안산에서 반월면과 같이 붙어 있는 군자면이란 동네가 그렇다. 이 동네는 아주 많은 이들이 동네 사람간 혼인을 하며, 그래서 그런가 머리가 그 쪽으로 발달하여 안산지역 시도의원, 시장 출마자 특히, 시도의원의 90%?를 차지한다. 좋지 않은 예를 많이 본다. 반월인 중에선 자리를 차지/출세하려고 애를 쓰는(목숨거는) 사람을 못봤다. 다만, 자기 자리에서 최선만 다한다. 누구나 다 기본 이상은 하더라.
*. 반월인들은 대개가 큰 욕심없이 작게 산다.
*. 반월인중 500여 년 이상 산 성씨는 여흥 민가와 진주 정가가 있다.
*. 반월은 소단위의 성씨 마을이 다수있다. 건건리의 한씨와 조촌 그리고 장촌, 사사리의 최가들, 도마교리의 구씨들, 선학골, 남산평 등의 민가들과 심가들, 팔곡2리의 임가들이 대표적이다.
*. 반월지역의 감리교회(타종교는 없었다. 광복후 도시개발이 되며 전래되었고, 다만, 천주교회의 공소가 작은 규모로 2개 있었다) 선교는 둔대교회가 최초이며 초대교인은 토착인 박용덕++이란 부자였었고, 이 분은 배재학당 출신의 교사를 개인적으로 채용하여 자녀 교육 및 교회 교육을 하게 하였고, 반월교회는 토착인 홍마태가 주역으로 활동했고, 샘골교회는 토착인 홍**이 초대 교인으로 활동했다. 당시 교회는 개화 및 근대 교육의 주역들이었다. 한편, 서울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경기도의 수부도시인 수원지역 선교를 위해 먼저, 안양, 시흥, 안산을 거쳐 전도를 하게 하였다. 이를 위해 스크랜턴 의사와 이화학당을 설립한 모친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인 전도인 김동현, 이명숙 등을 파견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도록 하였다. 이 때 반월/안산지역 사람들은 선교여행을 나온 서양인들을 난생 처음 목격하였다. 또한, 1903년대가 넘어서면서는 수원지역에 수원종로교회와 삼일남학교와 매향여학교가 세워지고 서양인 여선교사가 주재하게 되어 반월지역을 서양인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어 반월지역의 선진개화는 더욱 촉진되었으며, 1924년 반월초등학교 설립 전엔 이 학교를 하루 8시간을 뛰어 다녔다 한다.
++. 박용덕 : 최용신 전도사의 농촌애국계몽 활동을 위해 현재, 샘골교회에 자신의 재산 1,050평을 무상기부하여 샘골학원이 이루어지도록 후원하였다. 최 전도사는 농촌운동 활동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제5등급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허나, 재산을 기부한 이에 대한 공적 예우는 아직 없다.
1902년부터 활동한 배재학당 출신의 교육활동으로 안산지역은 처음으로 본격적인 근대식 한글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서당이 몇 개있었다.

한편, 반월/안산은 북학파의 영향으로 인한 실학의 중흥지로 성호 이익 선생과 수많은 실학자들과 양명학의 하곡 정제두(정몽주의 직계 후손)가 교유하여 근대 개화선비들을 양성해 낸 핵심지역으로 토양/정신 자체가 유학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근대개화화 되어 있었던 특징을 강화지역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성호 이익과 하곡 정제두의 학맥은 그대로 조선 근대화에 적중하여 정약용을 거쳐 넘어서서 정인보, 이건창, 이건방,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여병현, 최병헌 남지사 등과 여지사들인 황애덕, 최용신 등에게 흘러 근대화와 독립운동 전선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기독교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반월의 위상이다. 물론, 우리가 성호 이익은 알지만 제자들은 모르고 더구나, 하곡 정제두의 제자들은 더 모르니 반월지역에서 위의 인물들이 직접 활동한 바는 없어 까맣게 모르는 것일뿐으로 이 사실은 정확히 발굴/설명되어 반월/안산인들의 민족정기 선양에 이바지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학의 융성기는 1800년 정조 임금 사후 순조/헌종/철종기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더구나 안산은 이익의 사후 그 근대개화의 사상적 중심지역이 서울 및 강화 그리고 근기지역으로 이동/확산되었었다. 하여, 역사가 감추어진 것이다.

민족을 새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충일해 있던 실학의 고장 반월/안산은 1800년 후로 거의 200여 년간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장이 되었고, 여전한 그냥 위의 글과 같이 은둔 민가들을 비롯 토착인들이 살아왔으나 그 은둔 성향으로 인한 진보의 둔화로 나타나 다시금 옛 정신의 부활을 위해선 새로운 피의 수혈이 요구되어 졌었다.
이에 하늘의 섭리인가?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울지역 구로공단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한 반월신공업도시 개발 정책으로 지금에 이르르고 있다.
근대화 이 후에도 베일에 가려져 살왔던 것은 학문을 한 이들이 고향(농사는 아니라서)에선 할 일이 없어 머므르지 않고 여성은 당연히 거의 모든 이들이 타향으로 혼인하여 가고, 남성들은 일부만 남고 도회지로 떠났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허나, 이젠 세상이 달라졌음을 모두는 안다.


*. 불교는 유학/실학의 영향과 큰 규모의 산이 존재하지 않아서인지 수리산의 수리사나 수암봉 자락의 청룡사(비구니 사찰), 칠보산의 칠보사 등 아주 작은 규모의 사찰 밖에는 없어 융성 한적이 없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5만여 개의 사찰이 폐사되는 시기에 살아남은 것이 용할 정도이다. 허나, 세 사찰이 아주 오랜 세월 반월인들의 정신적 수양에 기여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산신당 : 전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산신당이 팔곡동에 존재한다. 약 500여 년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때가 되면 제를 드린다. 이 산신당을 섬기던 주민들이 반월교회 등 교인들과 최용신 사후 해방후 농촌계몽운동을 실행한 주역들이다. 교인과 비교인이 지금껏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군자지역의 군자봉데도 산신당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곳은 군자지역에서 기독교를 믿는 이들에 의해 안타깝게도 미신이라하여 파괴되었고, 그 산신당은 지금은 공단안에 존속되어 있다.
군자지역은 유학자들은 향교는 없어지고, 교회당을 연애당이라 공격하며 조상도 몰라보는 후레자식이라 욕하고, 교회당은 산신당을 파괴하고의 악순환의 후폭풍/영향력은 여전히 군자지역 토착인들을 지배한다.

하지만, 반월지역의 교인들과 유학자들과 산신당 신앙인들은 부딪혀 싸운적이 없다. 왜 그럴까? 위에 답이 있다.

*. 한편, 민백기의 선학골 집은 광무황제 때에 지어진 가옥으로 안산에선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람들이 왜 그 가치를 몰라볼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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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간략히 반월인들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선비의 고장, 실학의 융성지, 실학과 양명학의 교유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주요 인물들의 사상기지이며, 이로인해 배출된 수 많은 유수의 독립 유공자들과 이름이 별로 없지만, 그 고유의 특성대로 이바지하며 산 반월의 민가들, 교인들, 비교인들, 농민들, 여성들, 청년들, 어린아이들 등 가리지않고 이미, 반은 받은 것에 감사하여 산 이들의 빛삶이 오늘 만월의 대보름에 더욱 찬란히 빛난다.

이 참에 반월인들에게 한 마디하자. ”시작이 반이다를 우리가 잊고 살았다. 아직 반은 더 가봐야 한다. 그러고보니 반은 된 것이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아직은 우리 후손들을 위해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군“ 하는 깨달음을 가져 본다.
"반월인들아~ 반만 더 가자~!"
"없는 듯이 티 안나게 남은 반은 더 차지하자"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 우와~ 신난다!“
"어디엔가 반은 남겨져 있을테니 친구들~ 힘 내!"


하여, 나는 반월인들이 나머지 반을 완성하여 가는 길에 도움이 될 4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1. 하루에 2시간 이상 걷는다.
2. 아침식사를 해뜨기 전에 하고, 저녁식사는 해지기 전에 한다.
3. 하루에 두 번(아침, 저녁으로 약 10~20분) 정도 가만히 앉아있는다.
4. 밤 9~10시면 잠자리 든다.


이 글은 반월인들과 교인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2023년 1월 5일에 민관기 목사에 의해 작성되었다.

혹시, 반월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전화주세요.
010 3082 7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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