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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3강 2:15-21 믿음의 개요Ⓑ(2:20-21): 율법(양심) 행위 구원 아님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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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4 05:15:32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χριστῷ συνεσταύρωμαι)는 완료형 수동태로서, 현재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온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E. F. Harrison, RSV: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이 표현은 “19절의 개념을 확대한 것이다”(J. B. Lightfoot).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스탐(R. T. Stamm)은 “신비적이며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바울은 세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졌다. 이 점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로마서 6장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와 창조적인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골로새서 1:24-25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바울은 신자로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못박힌 것이다”(M. Luther).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⑴ 구체적으로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이다(롬 6:2). (2) 율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하나님을 향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롬 7:4). (3) 세상이 인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인간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갈 6:14, 골 2:20).
다시 말해서, 죄와 세상과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새 사람 곧 구원받은 인간)는 더 이상 죄와 세상 그리고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또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한다. 즉, 자기의 옛 사람(자연인)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기(옛 사람)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그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산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 스튜와트(J. S. Stewart)는 “신자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나눈다.”❶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새 생명의 근거요 터전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즉,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신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신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우리(신자)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내재는 영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롬 8:9-11). 이 신비적이고 영적인 연합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은 “광신과 비슷한 신비주의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실상의 혼연일체를 가르쳤으며, 그리함으로써 다만 한 인격만이 존재한다고 하였고, 하나만이 활동하고 의식할 수 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결합이요,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자들의 인격의 영속이다. 즉, 그리스도와 신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스탐(R. T. Stamm)도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바울의 영혼의 친밀한 동반자이시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라거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한다. 이는 그의 개성이 어떤 무한이나 열반에 흡수된 것이 아니며, 그의 주체성 ‘내’가 그리스도의 그것에 몰입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의 영의 개념을 채우고, 그의 양심을 인도한 것이다(롬 8:9-11)”라고 같은 의미의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독특한 신비주의와 일반적인 의미의 헬라적 신비주의와의 결정적 차이에 대해서는 1:22의 주석을 보라.
‘인간 안에 있는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에 참가한 신비적 연합을 요약하는 것으로❷ “그리스도인의 감정과 의지와 지성의 전 삶이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R. C. H. Lenski, S. J. Mikolaski).
그리스도인이란 곧 영적 인격(의인)이 된 것이다(고후 5:17). 바꾸어 말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증거란, 내 모든 삶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일 3:24). 렌스키(R. C. H. Lenski)는 “같은 인간 바울이지만 이제는 같은 바울이 아니다.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변화된 존재이다. 즉,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 변화는 새로 태어남, 또는 거듭남이라고도 불리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란 “육체적 몸 안에서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다”(R. T. Stamm).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적으로 볼 때에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으며, 그의 자연적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에 의해서 유지되었다”(M. Henry).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삶의 원리는 믿음이었다. 신자의 삶의 원리로서의 [믿음](1:23의 주석을 보라.)은 신자의 생활을 거룩하게 해 주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단순히 ‘믿음으로’(E. Huxtable), ‘믿음에 의해’(E. Huxtable, R. T. Stamm), ‘믿음의 근거에서’, 그리고 ‘믿음을 따라’(M. Luther, R. C. H. Lenski)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또한 의미상으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1:3-4의 주석을 보라.)라고 하였다.
모든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막연하게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사랑하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객관적 이해가 아니라,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 체험이요 확신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폐하지]는 아테토(ἀθετώ)로서 ‘거절하다’, ‘헛되게 하다’, ‘폐기하다’, ‘무효화하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란 바울이 율법주의를 고집하는 신자들처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M. Luther, C. R. Erdman). 더욱 자세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행위나 의무 이행, 고행이나 금욕, 양심 행위나 하나님의 [율법](2:16, 19의 주석을 보라.) 등으로 말미암아 의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M. Luther, J. Calvin).
2:15-21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란 율법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오히려 죄에 대한 충동을 주며, 죄를 알게 함으로써 인간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다고 한다. 이 말은 율법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는 뜻이고,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 우리는 방해가 되는 율법과 죄와 세상성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분과 함께 못 박힌 우리(옛 사람)는 그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산 것(새 사람)이다. 이제 우리가 산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요, 그분 안에 우리가 사는 것이므로, 우리의 전 삶은 그분에게 지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서의 삶이요, 믿음안에서 사는 삶이다.
끝으로, 바울은 이러한 은혜로 사는 내가 믿음의 의가 아닌 다른 주장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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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J. S. Stewart, op. cit., p. 186. 참조: A. Schweitzer, op. cit., p. 98.
2) 참조: A. Schweitzer, op. cit., p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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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11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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