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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뜻을 바로 알고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현종서
- 1518
- 2023-03-14 15:00:25
그의 강의는 더듬 더듬 생각하면서 말하는, 쉬언치 않은 듯한 강의로, 변 선생의 침튀기는 열정적 강의에 더 매료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윤박사님의 강의의 한마디 한 마디는 풍부한 학문과 경험을 거쳐 나오는 진수들이었다.그분의 강의는 알토란 같은 것들이었다. 그 강의를 필기했던 것을 재 음미해도 배울 것이 많았다.
감신에서 나는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 보았지만, 결국 감신을 감신되게 하는 분은 윤박사님이란 결론을 얻어 나는 늦게 나마 그분의 학문을 배우려고 애를 썼다. 나의 대학원 졸업 논문은" 칼 바르트의 인간론"이었다.
나를 또한 인정해 준 분은 김용옥 박사였다. 그분 역시 내게 늘 높은 점수를 주셨다.
나는 윤박사와 변실존의 강의를 다 듣고 비교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윤 선생님은 급소를 찾아 치는 분인가 하면 변 선배는 몸짓은 화려한데, 급소를 잘 못찾아 엉뚱한 곳을 때리다가 여러 클릭조정을 통해 급소를 비로서 찾아내는분이었다. 그분에게는 윤박사님 과 같은 스승이 같이 계셔야 길을 잃지 않고 제길을 가실 수 있는 분이고, 공부를 좋아하여 많이 알고 있는 상식이 비로서 매력의 빛을 낼 수 있게 되었을 터인데, 한동안 윗 분들의 충고나 견제 없이 당신의 생각대로 나아가다가 큰 걸림돌에 부딛친 것이 변박사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윤박사는 윤태현 목사라고 하는 부친의 영적 지도력과 모친의 깊은 기도가 그의 배경으로 있는 까닭이라는 것을 윤 남옥 목사의 글을 보고 이해 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변박사는 그의 신앙이력과 배경이 든든하지 못하였다. 당대 신앙인에다가, 그를 위해 기도로 뒷받침해줄 부모나 또는 식구. 주변인들이 없었던 것이 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서양학문은 자기 스승을 밟고 올라서야 남이 알아주는 독자적인 학문을 한다고 인정해 주는지 모른다. 동양 학문은 또 자나치게 스승의 말이면 무조건 다 진리라고 생각하여 패거리를 형성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엔 사색 당파가 많지 않았는가? 서양에서는 칸트를 공부하다가 그에게 계속 올인하기 보다는 중간에 다른 아이디어를 얻어 옆으로 샌다. 그리고 어쨋든 보다 진보되거나 다른 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학문이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의 배경은 진화론적인 사고인 것 같다. 그것이 서양철학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죄를 마틴 부버가 잘 지적해 주었다. 그는 한 때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생노병사의 굴레를 벗어보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길로 나섰다. 금욕으로 더나아가 극기훈련을 통해 무욕으로 까지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를 부르는 윗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거나 들어도 무시하였다.그는 "영원한 너"와의 대화의 통로를 발견하는데 까지 나아갔으나, 그 통로를 택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 끝내고 만 것이었고 그는 결국, 천국문앞에서 멈춰 선 자가 되고 말았다.인간으로서는 최선의 경지에 까지 갔으나 초월적인 윗분의 부름의 소리에 귀를 막아 죄와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끝났을 뿐 아니라,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라는 무신론을 넘어 자기 신격화에 빠지게 된 것. 마틴 부버가 아쉬워 한 부분이다.
윤박사님은 제가 칼 바르트 공부하는중에 내 믿음이 떨어지고 메말라 진다하니(어학능력 부족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즉시, 웨슬리 전문학자를 찾아가라- 그에게 배운 학점 다 인정해 줄테니- 하셨던 말 듣고 - 나는 오히려 칼 바르트연구를 칼바르트의 직계제자인 윤박사님 밑에서 하겠노라고 마물러 대학원을 마쳤던 것이다. 당시의 감신 대학원은 이런 윤박사님을 수장으로 모신 덕에 한국 신학계의 최고의 대학원이라 자부하며 다녔었다.
윤박사님을 스승으로 한 이들은 서양 학문하는 이들이 하는 방식으로 그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다 자기의 다른 분야를 개척해 나간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실력이 부족해도, 더 공부해서 윤박사님의 유지를 받들고자 한 것이 나의 자세 였다. 그런데 그 유지를 근본적으로 받들려하고 받들고 있는 이가 나타났다. 바로 그분의 따님, 윤남옥 목사였다. 어학공부나 같은 학교 나왔다는 것이 온전한 유지 받듦이 아니었다.
본인도 늦게 라도 또는 자습하여 웨슬리를 공부하였고, 그리하여, 칼 바르트와 웨슬리의 인간론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랑할 것은 없다. 70에 얻은 결실이니.(대신 순수학문만이 아닌 다양한 실존경험을 한 이후의 학문의 결실이라 말할 수는 있다)
" 소년 이로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이라"
젊은 이들이여, 교만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부지런히 공부들 하시어 한국신학계를 넘어 세계 신학계의 빛들이 되시게. 그리고 공부는 실천을 위한 것이니 최후의 목적이 아닐 뿐더러, 잘 못하면 미혹의 길에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들 하시게.
그런데 스승중에 스승은 성령이시니, 무엇보다도 성경과 함께 가시는 참 성령을 사모하시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