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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復活
함창석
- 1420
- 2023-03-22 13:23:32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되거나 그렇게 함이다. 기독교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일이다. 한 번 행하여지지 않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행하여지도록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난 예수(Jesus)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구주 그리스도(Kristos)로 되살아난 일이다. 톨스토이가 지은 장편소설이다. 세계적 명작의 하나이다. 공작 네흘류도프가 여주인공 카추샤를 유혹하였으나 뒤에 양심에 가책되어, 창부로 전락한 그를 갱생시키고 자신도 종교적인 사랑에 의하여 부활했다는 줄거리이다. 죄악과 허위에 찬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復자는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复(복)이 합하여 「돌아오다」, 「다시」를 뜻한다. 复(복)은 아래 위가 같은 모양이고 중배가 부른 그릇과 발의 모양과를 합한 글자이며 본디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일,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는 가는 일, 復(부)는 오가는 일, 나중에 돌아가다→돌려보내다→거듭하다→다시→또 따위의 뜻으로 쓰였다. 复자는 성을 되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돌아가다’나 ‘돌아오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复자 이미 ‘돌아오다’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 彳자를 더한 復자는 ‘(길을)되돌아오다’라는 뜻을 좀 더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復자는 후에 ‘회복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는데, 몸이 아팠다가 낫는 것도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活자는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을 나타내는 舌(설→활)로 이루어진다. 活(활)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물결이 합치고 하여 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흘러가는 것, 전하여 힘차게 활동하는 일을 뜻한다. 舌자는 뱀의 혓바닥을 그린 것으로 ‘혀’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活자는 혀(舌)에 수분(水)이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다’를 뜻하게 된 것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舌자가 아닌 ‘원활하다’라는 뜻을 가진 ‘氏+口(괄)’자가 쓰였었다. 이것은 ‘물의 흐름이 원활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의 흐름이라는 것은 몸속 혈액이 원활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글자의 조합이 바뀌면서 해석 역시 달라졌다.(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의 법에는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결혼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둘째가 형수와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셋째도 그랬으며 일곱이 모두 그렇게 자식 없이 죽고 맨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도 시집도 안 가며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 너희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하여 모세의 떨기나무 기사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막 12:18-27)
부활은 자가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특히 역사의 종말에, 전 역사에 걸쳐 살았던 의로운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 부활이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적 부활 개념은 육체를 무조건 죄악시하는 빗나간 신비주의적 사고방식들을 배척하고, 육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바램이다. 그러나 성도들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도 최후에는 부활하게 된다. 부활한 후에 성도들은 천국의 축복을 영원히 누리지만, 불신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류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인류의 부활에 대한 예고였다.
Ⅰ. 구약과 초기 유대교
부활 개념이 구약의 앞부분에는 거의 나타나 있지 않으며,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묵시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은 음부(스올)의 어두운 곳에 거한다고 생각했으며 구약의 어떤 구절들은 죽은 후의 싫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예. 욥 14:12-21). 그러나 골짜기의 마른 뼈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은(겔 37:1-14),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풀려나 귀환하리라는 사실만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있을 인류의 부활까지도 예언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따라서 이 구절은 후대의 순수한 부활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이 명백하다.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을 상징하는 다른 구절들 역시 부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시 16:10, 49:15은 부활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역경 속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욥 19:25-27에서는 욥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또한 단 12:2도 죽은 자들 중에 '많은'(또는 모든) 자들이 살아날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의로운 자들(특히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자들)은 상급을 받을 것이고, 악인들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부활 사상이, 포로기 동안에 이스라엘인들이 접하게 되었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지나친 역설이다. 신 • 구약 중간기에 유대교에서는 부활교리가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한 견해들이 난무하였다. 곧 어면 사람이 부활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로운 자의 일부나 전부, 또는 의로운 자와 악한 자 모두의 견해가 주장되었다. 그리고 부활이 영적인 부활인가, 또는 죽을 때의 육신 그대로 다시 부활할 것인가, 또는 천사들과 같이 새롭게 변형된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하는 것도 그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부활에 대한 신앙을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두개인들 같은 경우는 부활을 부인하였다.
Ⅱ. 신약
신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토대 위에서 기록되었다. 예수께서도 마지막 심판 날에 의인과 악인 모두가 다시 부활한 것이 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문자적인 의미의 육체적 부활. 곧 이 세상에서 상함을 입은 육체 그대로 영생에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부활한 의인은 마치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은, 부활한 후에는 결혼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악한 부자가 음부(Hades)의 화염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의로운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죽음과 최후 심판 사이에 '중간 상태'가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도 부활이 죄와 사망의 굴레로부터 해방과 구원이며,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에 대한 준비이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증거라고 말하였다(롬 8:19-23; 고전 15:23-28, 35-49). 바울 서신에는 악인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사도행전에서는 바울도 악인의 부활을 언급하였다. 죽음 때문에 비롯된 질문을 대답하면서 바울은 죽은 자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 '중간 상태'를 가리키는 것 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 11:11-14).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죽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인식한 바울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도 은연중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밧모섬의 요한은 순교자들이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할 것과, 그 후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시 살아나 자기 행위가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했으며, 사도 요한도 순교자들의 불안정한 중간 상태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신약은 장차 있을 인류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일어날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모델이며.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도구인 부활의 첫 열매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성도의 구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신약을 기록한 저자들에게 믿음을 갖게 만드는 중심적인 사전이었다. 그런데도 신약 기자들은 이 부활의 성격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묘사하였다. 때때로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전의 주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구별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났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 전과 달리 닫혀 진 방 안으로 들어오시거나, 갑자기 사라지시거나,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육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점 또한 강조되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여러 사람들에게고 모습을 보여주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특히 제자들과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강조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신자들에게만(또는 신자가 될 사람들도 포함하여) 그 모습을 나타내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이 초기 설교자들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장산 지냄과 부활 후에 나타나신 사례들이 그 분의 부활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로 언급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심을 증명하는 증거로도 간주되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앞으로 올 일반적인 부활은 성도들의 영적 체험에 대한 비유에서 함께 사용되었다.
R.H. Fuller, The Formation of the resurrection Narratives (Philadelphia: 1980)M.J. Harris, Raised Immortal (Grand Rapids: 1985)G.E. Ladd, I Believe in Resurrection of Jesus (Grand Rapids: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