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독교인의 죽음-문상길 중위 이야기

이경남
  • 1923
  • 2023-04-05 21:11:56
제주 43과 9 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 폭동의 원인이 좌우의 이념적 문제보다 해방후 미군정의 실패와 경찰과 서청의 난폭한 행동에 대한 도민들의 분노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며 항쟁 지도부와 평화 협정을 맺으며 선의적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그러나 미군정 사령과 딘 소장과 이승만 그리고 경무국장 조병옥은 이것을 좌익 폭동으로 단정하고 단호한 진압을 명령한다
김익렬 중령은 직위해제되고 대신 김익렬의 절친한 친구인 박진경 중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하는데 성품이 비열하고 출세지향적이었던 그는 잔혹한 진압으로 악명을 떨치다 이를 보다 못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7명의 하사관들의 손에 의해 살해된다
문중위를 포함한 7명의 군인들이 군법회의에 넘겨지고 그중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두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는데 모두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들이었던 이들은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총살을 당하였다 (김익렬의 43 회고록)(1948.9.23 서울 수색에서 사형 집행)
우리나라 정부 출범 이후 제 1호 사형수들이 이런 양심수들이었다는 것은 이후 반복된 국가 범죄를 예고하는 불길한 시작이 된다
문상길 중위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나 48년 8월 15일 출범한 이승만 정부가 제주 사건을 다급히 진압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도 참고해야 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48년 9월 9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출범시키지만 이미 소련의 지원을 받아 20만의 인민군과 무장을 시작하고 남한 해방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1년 반 후 드디어 남침 625의 참화가 일어난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사정이 이렇게 다급히 돌아가다 보니 친일파 청산도 할수 없었고 또한 제주 43같은 사건도 이렇게 서둘러 진압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이 되었다

*사진은 제주 폭동에 대하여 선의적으로 이해하며 온건하게 진압을 하다 직위해제된 김익렬 중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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