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갈라디아서 34강 G.자녀의 신분 4:4b-7: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최세창
- 1514
- 2023-04-12 01:54:44
포시트(P. T. Forsyth)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있으시고, 많은 자녀들은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❶라고 하였다.
[보내사]는 엑사페스테이렌(ἐξαπέστειλεν)으로서(눅 1:53, 20:10, 11, 행 7:12, 9:30, 11:22, 12:11, 17:14 등), “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보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R. C. H. Lenski).
그러므로 [그 아들을 보내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하는 것이다(롬 1:3, 8:3, 고전 8:6, 고후 8:9, 빌 2:6-8, 골 1:15-17)❷. 불트만(R. Bultmann)은 “바울은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고, 지상에 사셨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는다.”❸라고 하지만, 실제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 구원 과정의 근본적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를 주장하고 있다(엡 1:4, 3:11, 골 1:26, 벧전1:10-11. 참조: 요 1:1, 8:58). 이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교리는 형이상학적 명상이라기보다는 구속의 평범한 사실들로부터 얻어진 확증적 추론이다.”❹라고 올바로 설명하고 있다.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J. Calvin)❺ 신의 영적인 영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셨다(A. Deissmann)❻.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셨다(골1:15).”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란 그분의 성육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완전하게 계시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선재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바르트(K. Barth)는 “처음이요 마지막인 영원하며 타락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❽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 즉 성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긍정이요, 역사 안에서의 구체적인 구원 행위의 효시이며,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다는 사실(빌 2:6-8)보다 우리에게 더 큰 영광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방법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이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는 “처녀 탄생”❾을 암시하는 것(E. Huxtable)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처럼 인간성을 지니고 탄생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창 3:15).❿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으로 탄생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인들과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인 보편적인 양심의 법의 지배 아래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법 아래 오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아들을 보내신 목적에 대해, 【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것(3:13의 주석을 보라.)과 속량하신 자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아들의 명분](휘오테시안, υἱοθεσίαν)이란 곧 양자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1:1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이어서 양자 곧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에 대해, 【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들의 영] 곧 하나님의 영(롬 8:14, 고후 3:3)이신 성령께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임하셨다고 하는데, 로마서 8:15에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여,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차이는 “논리적인 차이일 뿐 실제적인 차이는 아니다. 믿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등의 깊은 영의 세계의 문제는 시간적인 선후나 이론에 포함시킬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이상근). 오히려 성령의 내재와 아들 됨의 관계는 인과 관계로서보다는 상관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내재는 아들 됨의 보증이며”(J. Calvin, M. Henry), 또한 아들 됨이란 성령께서 내재하신 증거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신 증거는, 아들의 신분과 위치로 변화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성령을 마음에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생의 방향에 변화가 오며, 그 성령을 따라 사는 가운데 인격과 생활에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이제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아바](Ἀββά)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바 아버지]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에 세 번 사용되었다(본절, 막 14:36, 롬 8:15). 그리고 [부르게](크라존, κράζον)는 강한 표현으로 원래 야생 동물이 부르짖는 것을 표시하였다.
결국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간구하게끔 하셨다는 뜻이다(1:1의 주석을 보라). 이 사실은 우리가 초등 학문의 종노릇하던 때와 크게 대조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한다.
특히, [네가]란 2인칭 단수를 사용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유업(3:18의 주석을 보라.)을 이을] 아들이 된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4:1-7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유업을 이을 자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배 아래 있어서, 자신의 소유를 자유롭게 처리할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 종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성육 이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초등 학문, 즉 율법주의와 이방인의 모든 종교 및 윤리 체계에 얽매여 종노릇하였다. 이와 같이 종노릇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가장 적합한 때에, 영원부터 선재하신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 아들로 삼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 그리고 아들 됨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는데, 그 증거는 인격과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업의 상속자인 아들이 된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P. T. Forsyth, Positive Preaching and Modern Mind(London: 1907), p. 215, in Huges.
2) J. Calvin, R. T. Stamm, W. T. Dayton, 黑崎幸吉, 윤성범.
3) R. Bultmann, op. cit., p. 293.
4) J. S. Stewart, op. cit. p. 316.
5) J. T. McNeill, ed.,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rian Religion, Vol. 1. translated and indexed by L. Battl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6th. Rep.), p. 465.
6) A. Deissmann, op. cit., p. 236.
7) J. S. Stewart, op. cit., p. 303.
8)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p. 277.
9) O. A. Peper, 성령, 처녀 탄생, 돈, 전경연·강한표·이상택 역(서울 : 향린사, 1973), pp. 65-66. 요한과 바울은 처녀 탄생에 대해서는 분명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지나치게 평가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다 자주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고, 두 사람 다 성육신에 내포된 중대한 문제를 착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꽉 다문 침묵은 처녀 탄생을 불신임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두 사도의 글에 꽤 많이 의존했던 2세기의 문필가들이 처녀 탄생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료해진다.
10) M. Luther, J. Calvin, R. T. Stamm, W. Hendriksen, E. F. Harrson, 黑崎幸吉, 윤성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177-182.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6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