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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와 21c 교회의 방향
관리자
- 2479
- 2012-06-26 07:06:43
재세례파의 교회관
\" 이들은 신약성경 시대와 콘스탄틴 이전 시대의 교회를 참되고 순수한 교회로 보고 이 시대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도하였다. 그래서 리텔(Franklin Littell)은 이를 ‘원시주의’(Primitivism)라고 명명하였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국가와 타협, 야합하여 교회의 독립성을 누리지 못한 국가교회제도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이 비록 교회와 국가 간의 분리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념상의 분리이지 실질적 분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여전히 중세적이며 로마가톨릭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타락은 4세기 곧 콘스탄틴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교회와 국가 간의 타협 혹은 결합을 교회 타락의 가장 중요한 징표로 보았다. 이 타협을 통해서 교회는 더 이상 신자의 자발적인 모임이기를 거부하고 국가적 의식(유아세례)이나 강압과 무력정복에 의한 집단적 개종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세바스치안 프랑케(Schastian Frank)나 카스파 쉬웬크펠트(Caspar Schwenkfeld)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황제권의 개입의 결과로 영적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보았다.
재세례파가 말하는 타락한 교회의 두 번째 표징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수행된 전쟁이라고 보았다. 폭력은 어떤 이유나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며 또 무력을 사용하여 종교적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분명한 타락의 징표로 보았다. 그래서 저들은 무저항주의와 절대평화주의를 견지했던 것이다.
재세례파가 보았던 교회타락의 세 번째 표징은 삶과 예배에 있어서 형식주의(dead formalism)였다. 내적 진실성보다는 의식, 외적 웅장함 등 제도화된 교권체제는 교회가 타락한 증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저들은 단순한 의식과 간략한 성찬식 거행을 시행했다.
재세례파는 교회는 믿는 자들의 자의(自意)에 의한 모임이어야하며, 국가나 권력의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믿는 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통해 구성된 회중은 형제들(Brotherhood of believers)이며 이 신자들의 순종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통해서나 혹은 공동체 안에서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순종하는 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상을 살펴볼 때 재세례파는 당시 자연스럽게 수납되었던 국가-교회 제도를 거부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국가와 구별된 전적으로 중생된 자의 모임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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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가 4년여 사법부에 끌려 다니며 \\'가이샤의 개\\'가 된 슬픈 역사를 기록한 채 내일 총회가 열린다.
아말렉의 후손 하만에게서 이스라엘을 지켜낸 모르드개의 일로 구약성경의 역사서가 마감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웰덴스파의 모라비안교도의 영향으로 회심한 바 있는 웨슬리의 후예로서
413년부터 로마 국교에 의해 처절하게 핍박받고 순교하면서 \\'신약교회\\'를 지지한 재세례파의 모체 웰덴스파의 모라비안을 기념하는 2012. 6. 26. 총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