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결국 지옥을 선택하는가?-1-1

관리자
  • 2438
  • 2012-06-28 00:11:31
인간은 왜? 결국 지옥을 선택하는가?

1. 본성(유전자)이냐? 양육(훈육+교육)이냐?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체계가 수학적인 뒷받침으로 라이프찌히의 중국견문이 0과1의 이진법의 계산체계를 확립시키면서, 수학으로 뒷받침되는 과학이 기지게를 펴면서, 유럽의 근대문명은 엄청난 가속도의 파죽지세로 인간을 삼키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과 무엇보다도, 철도가 전신과 전화를 연결시키면서, 유럽과 콜럼부스 이후의 아메리카는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18세기 말 19세기 내내 과학자로서 언칭되는 이들과 소위 말하는 유럽과 미국의 지성인들은 이제 과학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본산지인 유럽에서 엄청나게 기대와는 다른 유토피아를 배반하는 디스토피아의 현실이 초래되기 시작했다.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지 못한 6~7살의 어린이들이 하루 15~16시간의 노동을 감당해야 했고, 칼 마르크스는 이런 현실을 독일은 물론 영국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자본주의라는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나름 런던도서관에서 정치한 이론체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자본>이라고 명칭하고, 소위 말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적 지평에서의 자본주의 분석과 이 체제를 혁파하기 위한 <공산당 선언>이후의 신문과 책을 통해서 엄청난 저작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로 인정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을 찌 모르겠지만, 또 그 후대의 학자들이 그런식으로 <마르크시즘>을 언칭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칼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작금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소위 말하는 유물론 좌파사상가들이 이토록 마이크를 계속해서 잡으면서 깝쳐델 수 있는 여지의 근본적인 토대는 마르크시즘이 실은 전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궁극적으로 인간의 분노만을 가지고서 변혁하려는 방식이 대부분 실패한 현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20세기 1960년대 이후로 한국의 지성인들에게 소위 말하는 그 <앙가주망>참여적 지식인이라는 모토로 널리 알려진 장 폴 사르뜨르의 이중적 처신과 문학가로서의 삶과 철학사상가로서의 삶이 전혀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설득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문학자는 물론이고 독문학자 영문학자 주구장창 사르뜨르를 을퍼 데었다.

  적어도 이 분위기는 그가 생존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라고는 결코 언칭될 수 없는 실존임에도 그 아우라를 먹고 들어가면서, 소위 말하는 해체주의 다시말해서 포스트모던니즘의 초입단계가 1980년대 말 대한민국에 수입되기 전까지 상당히 압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차대전 후의 유럽의 지식인들은 사르뜨르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나치게오랜동안 그토록 영향력을 대한민국에서 유독 특히나 더 행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가 소설이나 희곡을 통해서 발표한 작품의 문학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철학적 지평에서 사상가 행세를 하면서 생산해 낸 <존재와 무>를 비롯한 저작들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독소들과 한계들은 왜? 제대로 대한민국 학계에서 톱아보고 평가되지 못했던 것일까?

  캄보디아라는 앙코르와트 관광지 유적지를 관광한 이들의 탄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같은 나라에서 불과 4~50년전에 자행된 <킬링필드>의 현실에 대해서는 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고 성찰해 보지 않을까? 그럼 킬링필드와 사르뜨르는 어떤 관계가 있기에 필자는 갑자기 뜬금없이 캄보디아를 언급하는 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사르뜨르가 68혁명전후로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바로 전에, 20대의 캄보디아 엘리트들은 프랑스에서 유학시절을 보낸다. 그들이 프랑스에서 접한 가장 압도적인 영향은 인류역사를 질곡에 빠뜨리는 세력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폭력은 불가피하다. 아니, 그렇게 행사되는 폭력은 미학적인 지평에서조차 평가받을 수 있다고까지 규정했던 사르뜨르의 얼치기 사상이였다.

그들은 적당히 학위를 마치고 캄보디아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아무런 죄책감이나 거리낌없이 캄보디아 전역을 <킬링필드>로 만들어 버린다. 안경을 낀이는 모두 허위적인 이중적인 위선적인 이들임으로 모두 처형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로는, 1980년대 초 전두환이라는 이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진행된 도시와 농촌을 떠나서 각 마을에서 약간의 불량끼만 있다고 규정되었던 모든 이들을 군용트럭에 태우고서 보냈던 삼청교육대와 다를 바 없다.

  적지않은 이들은 그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돌아와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시절이였다. 중요한 지점은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당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이런 현실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문화혁명의 그 잔혹함과 극단성에 대해서, 그토록 적지않은 당시 `1960대의 사르뜨르나 이제 70을 한참 넘긴 알랭바디유까지 그들은 왜? 마오쩌뚱 모택동의 사상에 열광하면서 문화혁명을 찬양했을까?

  작금의 대한민국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파가 부재하다. 수시로 표리부동하면서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수구꼴통들과 이들의 욕심을 간파하고 떡고물을 챙기려는 기회주의자들의 연합이 있을 뿐이다.
또한 작금의 대한민국에는 몽양 여운형선생과 늦봄 문익환목사님의 뒤를 이어갈만한 진보적 세력도 부재하다. 통합진보당사태는 실은 대한민국역사에서 2008년 촛불집회를 명박산성이라는 불통의 가림개로 넘기고자했던 이명박정권의 해괴함보다도 더 참담하다.

  그것은 이석기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지난 10년동안 그가 어떤 역할을 해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위원으로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는지를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진보적 입장은 어쩔 수 없이 물적토대의 확보와 유리한 지점의 불리를 최대한 전략적이고 치열한 집단지성을 통해서 돌파구를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실존임을 강변해야 무슨 소용이랴~ 이미 그들은 더 음험하고 더 추악하게 돈에 돈이되는 시장에 돈이 되는 시장에 투항하는 이들을 간파하고서 그 지점에 도달한 이들이라는 것이 드러난 마당에 말이다.  

본성(유전자)이 결정적으로 아니 결정론적으로 치명적일 만큼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은 그 자체로만 보면, 삶의 입체적인 우여곡절을 반영할 수 밖에 없는 실존에서 그렇게 타당성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존 로크가 논했듯이, 인간은 백지로 태어날 뿐이고, 어떻게 교육되느냐?가 더 중요한 것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작금의 인문사회과학은 아직, 이 관점에 유보적이지만, 최신 생물학과 정신의학의 성과들은 본성(유전자)의 영향력에 대해서 더욱더 힘이 실리는 관점의 과학적인 학문적인 성과들이 보고 되고 있다. 일간의 생로병사에서 가장 힘겨운 과정을 꼽자면 우선순위로 병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실은 태어남 자체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고서 진행되는 것이지만, 세상에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임신되어서 10달이 못미쳐서 산파의 도움이던 산부인과의 도움이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하는 인간은 없다. 설사, 전생은 기억한다해도 타인의 출생을 지켜볼수 있는 여지는 부모의 실존이든 산부인과 의사 간호사의 실존이든 아직 이런 의료적인 체계가 미비한 채 태어나는 지구상의 70%가 넘는 출생과정을 뒤돌아 보아도, 타인의 출생은 지켜볼 수 있지만, 자신의 출생을 지켜볼 수는 없다.
병은 사실, 신체적 질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에 장애에 관한 학문적인 성과들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는 데, 이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전제도 일단은 병이 있으냐? 없느냐?의 차원에서 접근된다. 물론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예측할수없는 사태를 통해서 병을 앓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부모 조부모를 포함한 집안의 내력인 유전적인 질병같은 경우에는 차원이 많이 다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외형적 차원에서, 소위 대머리라고 칭하는 지극히 심한 탈모현상은 80%이상 유전적인 요인이 압도적이다. 부계인가? 모계인가? 의학적으로 세밀하게 규명해 볼 수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눈의 시력이 지극히 출생때부터 좋지 않은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집안에는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당뇨도 그렇고, 혈압도 그렇다. 최근에는 비만도 그런 차원에서 의학적으로 규명한다. 이미 유전자의 형질이 그런 질환을 담고 있는 데, 어쩔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신체적인 유전적인 질병은 최신의 의학의 도움으로 상당부분 극복될 수 있는 차원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이 유전적인 질환이 정신적인 차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지점에 도달하면, 전혀 다른 차원이 펼쳐진다. 우울증 조울증 조현증 분열적 성격장애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정신건강과적인 병명분류체계를 통해서 확인된 의학적 보고는 매우 충격적이다. 소위 말하는 <금이간 유리창의 비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왠만한 충격에도 적당한 두께의 유리창은 금이가거나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금이 간 유리창은 작은 충격에도 파손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조물주께서는 인생을 그렇게 편향적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술가 특히 화가나 배우같은 경우 65%가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겪고 있거나 겪을 확률이 크다. 그 정도의 차이는 물론 중요하지만, 예술가들에게서 특히 흔히 이야기하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표현에도 어느 정도는 선재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해야 함이 전제되어져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여지가 존재한다. 예술가의 범주를 좀더 넓게 해석해서 역사상 이런 인물들을 찾아 보자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화가들
바흐를 유럽에 알린 역할 못지않게 순식간에 작곡가의 역량을 드러냈던 멘델스존
슈베르트보다 더 천재적인 가곡을 순식간에 작곡했던 슈만
무엇보다도 크리스챤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할렐루야의 헨델
때이른 사망을 통해서 그의 천재성을 더 인정하려는 모짜르트

그러나, 분명하게 명토박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정신건강적으로 취약한 질병을 앓았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다 천재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전기를 면밀하게 읽어보면, 이들은 당시 작금의 2012년 여름보다 훨씬 더 열악한 의료체계로 큰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고 계시적인 영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수도자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고흐의 전기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고흐는 전도사로 칭해지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실, 엄정하게 논하자면, 존 가트너가 저작한 <조증-살림출판사>을 보면, 청교도들의 환상과 그 엄청난 에너지가 결국은 미합중국을 세울 수 있었음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서술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천재성과 정신적인 힘겨움이 동반되는 유전적인 질환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의견을 구하면 대부분 평범하게 무난하게 큰 힘겨움없이 인생을 살다 마치고 싶다는 입장을 밝힌다. 당연하다. 인간은 고통을 피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1. 본성(유전자)이냐? 양육(훈육+교육)이냐?
2. 명분의 찬란함으로 소유(소비)적 속성이 달라지지 않느다
3. 기가막힌 핑계거리들- 먹고살아야? 자식들 교육시켜야?
4. 성서가 제시하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5. 정말 죽음이 두려운데, 자살을 할까? 실은 죽으면 끝이고, 비참해지는 것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6. <너의 너로서의 나>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서의 나? 어느 나가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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