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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마이너리그 천상의 메이저리그
관리자
- 2169
- 2012-07-03 07:30:21
왜냐하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하니까요.
저 세상에 가서도 좋은 일만 있다면, 그건 공평하지 못하니까요.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1. 스펄전의 시편강해를 읽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뭔가? 알고 있다는 것이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 말이다. 스펄전은 역사비평을 수용한 목회자 신학자가 아니였다. 사실 웨슬리(1703-1791)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시 압도적으로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존 로크의 성과들을 웨슬리는 정통하고 있었지만, 쉴라이어마허 이후 펼쳐진 현대신학의 중심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비평적 지평을 성서의 연구로 전혀 연결시킨 바가 없다. 그러나, 스펄전도 웨슬리도 그렇고, 이들의 성서에 대한 지평을 폄하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2. 일단, 시편만 한정해서 보자. 시편이 씌여져서 집대성되어서 39권의 (히브리성서-구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본문을 차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작금의 창조론의 지평을 논하는 구약성서학자를 비롯한 신학자들은 창세기만을 연구하고서 창조론의 텍스트를 산출하지 않는다. 아니 산출할 수 없다.
3. 욥기와 시편의 텍스가 제대로 합체되지 않고, 창세기만을 논하는 창조신학은 앙꼬없는 찐빵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에 다시 감신 조직신학자 심광섭 박사의 그동안의 연구 궤적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는 데,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예술신학>을 통해서 제시되는 미학적 지평에서의 신학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통과의례가 있는 데, 그것은 칸트미학에서의 숭고미(장엄미)에 관한 지점이다.
4. 신학자 심광섭의 감신 대표학술지 <신학과 세계>를 통해서 그동안 단편적일 수는 있지만, 어느정도 완결성있게 제시된 지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점은 바흐가 종교개혁적 신학자의 지평에서 음악의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게 된 지점이다. 실제, 바흐의 탁월한 성과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멘델스존의 발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멘델스존 전에 바흐의 음악은 연주되거나 논의된 적이 거의 없었다.
5. 따라서, 시편기자들의 텍스트를 미학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여지는 필수적이다. 그들은 지구만이 모든 것이라는 구체적으로 천동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들였다. 그런데, 그들이 밤하늘의 별부터, 창조주의 피조물로서의 온우주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의 감수성은 천동설이니 지동설이니 무엇이 맞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6.중요한 것은 시편의 기자들이 온 우주를 향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평이야말로 칸트가 미학적으로 제시한 숭고미(장엄미)가 아닐까?
7. 과학의 정밀하고 엄밀한 측정과 증거제시를 통해서 현존하는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도, 우주에 관해서 엄청난 지식을 축적했다. 그리고 실제로 달까지 1969년 이미 43년 전에 착륙했다가 지구로 이륙했으며, 이제 유인왕복우주선의 이륙과 착륙은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8. 그런데, 이토록 인간의 지식은 축적되었지만, 왜? 이토록 현존하는 All over the world에 존재하는 인류의 삶은 팍팍한 것일까?
9. 불트만이 현대인을 위해서 제시한 비신화화한 신약성서의 지평은 그 자체 그대로 소중하지만, 이제 인류는 다시 신화적 미학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길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는 듯 싶다. 경의로움과 놀라움이 상실된 현존하는 인류의 척박한 실패는 확인하지 않으면, 측정되지 않으면, 볼수 없으면, 믿기는커녕, 인정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고의 프레임에 의식하지 않으면서 갇혀져 있기 때문이다.
10.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는 분명 다른 리그임으로 분리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야구든지 축구든이 마이너 리고와 메이저 리그의 수준은 엄정히 다르다. 그러나, 처음부터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들은 드물다. 마이너리그에서의 실력이 메이저리그 수준에 도달했을 때, 지켜본 감독 코치와 이들의 실력을 인정하는 경기를 관전하는 이들의 승인이 있어야만 한다.
11. 그럼, 지상에서의 삶을 마이너리그라고 하고, 천상에서의 삶을 메이저리그라고 해보면, 비싼돈을 드려서 부적을 마련하고 그것을 지갑에 속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안정감을 넘어서 행운을 기대하는 심리나, 십자가의 목걸이나 귀걸이를 하면서, 뭔가를 기대하는 심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
12. 성서는 계속해서 반복한다. 우리 주님이 피로사신 구원의 확증으로서의 십자가를 소유적으로만 봐서는 안되며, 가신 길을 따라가는 바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는 마이너리그에서 어느 순간 메이저리그에 도달하는 바로 그것이 구원에 관한 보다 적절한 견해일 수 있음을...
13. 글의 서두의 <키다리 아저씨> 한 부분은 많은 뉘앙스를 담고 있다. 천상의 삶에 저당잡혀서 지상의 삶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결코 성서가 제시하는 구원론이 결코 아니다. 또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제시하듯이, 모든 것은 이 세상뿐이라는 그 알량한 허울의 지혜스럽게 보이는 듯한 관점(-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질적인 영적인 유물론자로서 살아가는 무늬만 크리스챤들의 관점-) 또한 지독하게 치명적이다.
14. 유인원이후 약 천억명의 인류가 현재에 도래하기까지 현존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지난 주 이후 공식적으로 70억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300여년전에 유럽의 스베덴보리라는 영성가는 이렇게 일갈한 적이 있다. 자상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천국문은 점점 더 좁아 지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