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무지"

관리자
  • 2607
  • 2012-07-04 03:49:37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지
                          로마서 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세상에서 가장 바르게 살고자 할지라도 생활의 기준이 없이는 바르게살기가 어렵습니다. 세계적인 좋은 시설을 갖춘 운동장을 만들려고 건물을 완성하고 운동장에 선을 그을려고 할 때에는, 아무리 유능한 화가나 페인트 공들을 데리고 올지라도, 그들이 선을 그리고 회전하는 원을 그릴 때 언제나 자를 대거나 컴퍼스처럼 축을 대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재주와 기술로써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숙련된 기능공들일지라도 벽돌을 높이 쌓을 때에는 추를 대어서 수직을 측량하면서 쌓습니다.

  하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기준이 없고 축이 없이 바르고 정확하게 살아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생활의 기준이 되고 축이 되는 삶의 모범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모범이 되고 스승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우리의 스승이나 모범으로 삼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모범이나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소경을 따라가는 소경일 뿐입니다. 비록 그 스승이 유명한 위인이나 영웅들일지라도 참스승이 되지 못합니다. 철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참스승이 아니며, 역사가들이라 할지라도 참스승이 아닙니다.
  교육자나 종교가나 역사가일지라도, 우리의 영을 지도할 스승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할 스승은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에서 스승을 찾고, 세상에서 영원한 지도자를 찾으려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1:22, 헬라인은 지혜를 찾고, 사무엘상 23:13, 사울은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찾았으며, 28:7, 불안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고, 열왕기상 2:40, 시므이는 저 죽을 줄 모르고 종을 찾아 나섰으며, 다니엘 2:13, 느부갓네살 왕의 신하들은 다니엘을 죽이려고 찾았고, 시편 37:32, 원수들이 죽이기 위해 시인을 찾았으며, 40:14, 영혼을 멸하려고 찾고, 잠언 23:35, 술에 잠긴 자는 술에 깨면 다시 술을 찾는 다고 했습니다.
  아가 3:1,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며, 잠언 11:27, 악인은 악을 찾았고, 마태복음 26:59,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해칠 증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찾고, 빛의 자녀들은 빛을 찾습니다. 에스겔 34:11, 목자 하나님은 양된 백성들을 찾으시며. 누가복음 15:6, 목자가 잃은 양을 찾으며.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이 의인을 찾았고, 마태복음 18:13,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며, 누가복음 15:4, 사람은 잃은 것을 찾되, 민수기 10:33, 나그네는 쉴 곳을 찾았습니다.

  그중에도 하나님을 찾고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다고 하였고, 예레미야 29:13,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느 것을 찾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찾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가장 크고 귀한 축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운 분이시며(눅 1:5), 의로운 재판장이시며(시 7:11), 견고한 요새이시며(삼하 22:33), 거룩하신 분이시며(사 5:16), 전능하신 분이시며(사 9:6), 구원자이십니다(사 45:15).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저 무지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세상학문을 터득하고, 세상지식이 풍부하고, 세상명예와 권세와 지위가 높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운 줄 모르고 사는 인간들은 가장 무식하고 무지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잠 1:7), 지혜이며 총명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으니, 지식과 지혜의 우둔한 자들이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도 어두운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은, 남색을 즐기며 온 도성이 범죄 하면서, 롯이 권하는 말에 오히려 거역하면서 더욱 죄 가운데 난폭하였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쳐 죽인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다가 끝내 귀신들린 여자에게 가서 엎드리며 고꾸라져버린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유대의 예루살렘 성 종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사도들까지 위협하고 매로 치며,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게 한 것도 하나님을 두려운 줄 모르고 행한 악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줄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하는 죄에 대하여 아무 두려움이 없이 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제일 무서운 분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제일 싫어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셔서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인류를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죄로 향하는 인류는 멸망으로 떨어지게 됨으로, 하나님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시고, 영생 얻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려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베드로는 죄로 더러워진 자기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서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죄로 더러워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보고 “오호라 나는 죽게 되었도다. 내가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국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철부지한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운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우둔하고 답답합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운 줄도 알고 있으니 가장 지혜롭고, 은혜스러운 백성들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희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 받는 길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함이 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범죄하지 않았으나, 사탄이 유혹하여 하와의 눈을 어둡게 하자, 하나님보다 선악과에 눈을 돌렸고, 멸망보다는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욕심의 군침을 삼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이 있은 뒤에, 어떤 상벌이 있느냐? 하는 것이, 그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 작용하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운동경기에서 생각해보아도, 분초를 다투고 힘쓰고 애쓰며 등급에 열을 올리는 것도, 상벌이 없다고 하면 그처럼 경쟁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등급의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 경기에서 승부를 경쟁하게 하는 것처럼, 상벌이 영적생활에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상 받기 때문에 더하게 되고, 악을 행하면 벌이 임하고 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서 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심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벌에 대한 것에 관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사람들도, 양심이 마비되고 죄에 대한 반응이 약해지면 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두려움이 없어진다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 될 것이고, 죄인임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동차를 위시한 모든 기계에는 기어가 있습니다.
  기어가 새것일 때에는 기계의 회전이 잘 됩니다. 그러나 오래 사용하다 보면, 기어도 달아 지고 무디어져서 더디어는 기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맙니다. 기어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기계가 서로 잘 돌지도 못하고 힘을 내지도 못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양심도, 처음에는 민감하든 것이 차츰 범죄하고 악을 습관적으로 행하다보면, 양심이 무디어지고 결국은 죄를 지어도 부끄럽거나 두려운 줄도 모르게 됩니다. 양심이 마비된 인간은, 양심이 없는 인간이나 다름이 없고, 양심이 없는 인간은 기계나 로보트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개나 돼지가 길에서 주워 먹으며, 대소변을 본다면 아무도 책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이, 길에서 주워 먹고 길에서 분뇨를 배설한다면 눈살을 찌푸리고 책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짐승들과 다른 이성과 판단력이 있고, 양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양심 없이 행동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하는 상벌들을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가인과 아벨을 봅니다. 야곱과 에서를 봅니다. 모세와 바로를 봅니다. 다윗과 사울을 봅니다. 베드로와 유다를 봅니다. 스데반 집사와 니골라 집사를 봅니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운 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채워 주시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밖에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역하고 범죄 하는 자들에게는 진노하시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에게는,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범죄하고 떠난 영혼들까지 자기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다시 용서하시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으나 다시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다시 사랑하시고 아들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진노하시기보다는,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제물을 들고 하나님의 성막으로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사랑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 가운데, 1달란트 받은 종이나, 므나의 비유 가운데 책망을 받은 종들은, 모두 주인이 두려운 줄만 알았지 사랑은 몰랐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입니다.
  아는 자는 실천하고 순종합니다. 그런 종이라야 주인의 사랑과 상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상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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