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이 자란 사람들...

오재영
  • 1612
  • 2023-04-18 18:29:10
저사람 왜 저래?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신의 위치와 범위를 벗어나 유난스레 자신을 드러내며 지나친 모습으로 본분을 망각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그에게도 남다른 열정과 머리는 있으나 주변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어른이 없이 성장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한 부분이 있다. 그 연약함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채워가는 것이 인생이다. 보완하지 않으면 그 연약한 부분이 그의 생애에 치명적인 독이 되어 생을 파멸 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여 지난(至難)한 자기와의 싸움으로 인격도야(人格陶冶)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 또한 주변에 자신을 통하여 말과 글로 배울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친다. 이러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른이 자신의 주변에 존재함은 행복한 일이다. 누구나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귀하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야구단의 감독으로 여러 차례 우승한 이가 이제는 해설자로 등장하여 하는 말이, 선수에게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말을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닫기가 쉽지 않다. 감독의 그 조언이 아닌 선수 자신이 절실하게 느껴야 하는데 쉽지 않고, 계속 팀을 바꿔 실패하다가 이제는 선수 자신이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 그때는 이미 은퇴를 하게 된다고...비단 야구 선수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인가?

나의 아버님께서는 일본 징용(노무대)의 후유증으로 말년에는 10여년의 병으로 자리를 보존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이후로 어머님께서는 긴 세월을 장기간의 질병의 산물인 부채를 갚으시며, 4남매를 키우시는 생활을 홀몸으로 살아오셨다. 이제는 나 자신이 70대 중반에 이르러 돌아보면, 어린 철부지의 생각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투정을 한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속죄하는 심정으로 어쩌다 예상하지 못한 자녀들의 불평도 감내하고 있다. 저들도 언젠가 나와 같은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당시에는 언어가 대부분 직설적이어서 학교의 선생님들도 뺨과 손바닥, 종아리 가리지 않고 폭력으로 겁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성장기를 거치면서 가장 두려워 한 험한 말의 표현은 물론 내가 직접 듣지는 않았으나 “애비 없는 호로 자식”이라는 말이었다. 어른 없이 제멋대로 성장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물론 어머니 등에서 부터 교회를 떠난 적 없기에 험한 소리 멀리한 편이지만 부모님 계신 또래보다는 더 조심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40여년의 聖職者의 삶을 마치고 사역의 무대를 내려와 관조(觀照)의 자리에 있으니 더 잘 보이는지 주변을 보면 직(職)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을 떠는 이들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즉, 한 인간의 사용하는 말은 그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박한 말을 하는 자가 신중한 사람일 수 없고, 사려 깊은 자가 천박한 말을 할 수는 없다. 하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라면 두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 말이 있다. “막 말은 듣기엔 시원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지금도 정치권이나 애국 운동에 본인은 대단한 것 같아도 그의 함부로 내뱉은 말의 구설로 그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이에게 직접 질문하면 말이 막혀 전전긍긍 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목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서로 각자 다른 이들끼리 더불어 산다는 것은 “예의 범절”에 관한 문제다. 더불어 살기 위한 타율적 장치가 법이라면, 예의란 공생을 위한 자발적 규범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법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법의 전문가는 아니다. 여기에서 예절의 필요성이 대두 된다. 우리말 사전은 “예의 범절”을 “일상생활에서 갖추어야 할 모든 예의와 절차”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교회의 위기가 무엇인가?

교회의 역사와 함께 위대한 신앙의 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위대한 설교자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세상이 관심을 갖고 우러르는 스펙이 아니라, 그분 곁에 머무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와 기운이 배어 있었다. 오늘처럼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신다는 개념이 서서히 희석이 되고 제도에 의하여 양산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인을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이들 모두의 가장 큰 불행이다.

구도자와 성직자로서의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 함부로 내뱉는 말, 경솔하고 천박한 행동, 무책임하고 예의 없는 언사, 저속한 처신, 모두가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장애가 되고 있는 암적존재 들이다. 주님 앞에서 결산함은 모두에게 동일하기에 너나 없이 모두가 부단히 신앙의 인격적인 덕성 함양에 힘쓰지 않으면 세월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반면에 정상적인 한 사람의 설교자가 세워지는 일은 본인의 시대와 역사가 주목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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