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율법아래 있는 자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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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5 21:08:46
율법 아래 있는 자들
                      로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는, 사람의 존재를 인간의 방법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정신, 이성, 지혜, 총명,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나, 우리는 감각으로나 과학으로 증명을 하지를 못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피부와 느낌으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 중에, 전파, 방사능, 공기, 시간,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라디오 TV 시계 방사능 측정기 같은 도구들이 아니라면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 속죄, 구원, 영생, 천국, 지옥, 등은 인간의 도구나 수단으로도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증명됩니다.

  사람들이 운동을 잘 하는지 웅변을 잘 하는지 공부를 잘 하는지 실력이 있는지 기술이 있는지 각자의 소질들을 알아보려면, 실력을 시험하여 측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기와 소질들을 잘 알지 못하면서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일을 맡기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의 상상과 생각을 초월하셔서, 우리가 예기치 못했던 일들까지 하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목동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시고, 그 에게 성령을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뽕밭에서 일 하는 농부를 들어서 선지자로 삼으시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폭도를 들으셔서 사도로 삼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리를 들어서 사도로 삼으시고 사명을 주셨으며, 어부들을 들어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우리의 이성이나 지혜로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부인하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지식이라고 해서 모두를 긍정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무한하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안다고 하는 말은 우리 모두가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들이 상식이든지 지식으로든지 믿음으로든지 우리 모두가 동의하고 인식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지식가지고 증명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과학이 그들에게 유일한 증명방법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전문적으로 터득한 깨달음 안에서 주장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아는 것이 있다고 하면, 자기 자신들의 율법주의 입장에서 아는 것들을 주장하고 아는 것들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을 한 사람은, 로마서를 기록한 저자이면서도, 로마에 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바울이, 자신을 중심한 모든 성도들을 일컬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고 진리는 능력이 있는 자를 찾고 있으나, 하나님은 약한 자와 낮은 자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지혜와 지식이 많은 사람은 이유가 많고 핑계가 많고 요령과 꾀를 부립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내었을 때, 상대방들이 어떤 부류에 속하였든지 바울의 증거 하는 편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동역 자와 협력자들의 동의와 찬성을 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우리라고 말하는 사람을, 로마서 16:21-2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① 디모데를 일컬어서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1:2절에서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아들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권면하며 지도하고 있음을 디모데전후서를 통하여서 보게 됩니다.

  ② 누기오입니다.
  누기오는 루기오라고도 불렀는데, 사도행전 13:1절에는, 안디옥 교회의 예언자들과 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구레네 사람 누기오라는 이름이 나오고, 로마서 16:21절에는, 바울이 친척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③ 야손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건달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서 성을 소동케 하고 야손의 집으로 가서 바울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이 사람들이 이곳에 오니까 야손이 끌어 들였다고 큰 소리로 소란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무리와 읍장들은 그 소란함을 무마하기 위하여 보(保)를 받고 야손을 풀어 주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 후 야손은 바울이, 로마서 16;21절에서 문안 중에 이름을 기록할 때에는, 고린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도 바울의 친척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④ 소바시더 입니다.
  소바더라고도 불리는데, 사도행전 20:4절에 나오며,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이고,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금을 가지고 그리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을 하는 중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바울을 동반했었습니다.

  ⑤ 더디오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대필하게 했던 인물로서, 로마서 16:22절에 자신의 이름을 삽입하여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가이오, 에라스도, 구아도도 있습니다.

  바울은 혼자만이 알고 느끼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라고 하는 많은 무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증명하려고 하는 사실들은, 어느 구석에서나 숨겨진 사실이 아니라 만천하에 드러난 너무도 분명하고도 정확한 사실들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바
  율법이란 구약성경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모세의 율법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전체는 율법을 중심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율법은 그만큼 중요한 구약성경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양심으로 살아갈 기준이 약해지고 죄악이 극에 달하여, 노아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심판이 일어난 후였습니다.

  인류 탄생이후 선한양심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하나님은 양심시대를 더 지속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극도로 부패 해지고 악이 범람하면서, 인간생활을 방관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신 하나님은, 물과 불로 심판하시고 노예의 고통도 담당하게 하심으로 깨닫기를 원하셨으나, 백성들은 죄를 깨닫지 않고 생활의 기준마저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죄를 지은자의 형벌이 어떻게 무서운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中保)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19-24).
  율법이 인간의 죄를 가르쳐 주셨으나. 하나님이 주신 법 중에 가장 기초적인 법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법 사랑의 법 그리스도의 법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율법의 완성을 보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율법에서 정죄하는 죄를 사함 받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정죄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끄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희생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율법으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비유를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8:9-14, 성전에 기도하러 나온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시작하면서, 자기의 놀라운 선행과 율법적인 삶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세리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성전 문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율법적으로는 바리새인이 단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만한 것입니다.

  또 부자 청년의 경우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자신 있게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도 율법적으로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는 아직 미달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세리는 긍휼이 여기고 응답하시며, 부자에게는 미달된 생활을 지적하십니다.
  율법은 행위를 중하게 여기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겸손과 회개를 더 중하게 여기고 계시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참으로 자기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같은 수준을 보는듯합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과 통하듯이, 율법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상통하는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의 사고로서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부자 청년의 생활이 의롭고 경건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는 미달된다고 했는데, 율법아래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아래 있는 사람의 견해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아무런 해당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이조시대에 종의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진 국민 미국의 법이라고 할지라도, 총기 휴대 법 조세법 민법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해당되지 아니합니다. 그 나라의 법은 그 나라에만 해당되고, 그 시대의 법은 그 법이 존재하던 시대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내리는 모든 규정들도 율법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범위 내에서만 해당이 됩니다.

  바울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율법만을 내세우며 스스로 인정하려드는 자신감에서 끌어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경건을 말하고 율법을 가진 자의 권위로 주장하지만, 바울이 보는 입장에서는 아직 초등학문이며 몽학 선생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유대인들의 모든 주장을 반박할 수도 있고, 모든 반론을 침묵시킬 수도 있을 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나이다.”고 자기 자랑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게 있는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부자 청년의 입은 막아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싶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의 법은 그들의 입을 봉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칭찬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자들의 입은 예수님의 사랑의 법 앞에서 더 이상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욥이라는 사람도 3사람의 친구들 앞에서는 참지 못하고 자기변명을 하였으나, 하나님의 면전에 대하게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자기 손을 가지고 자기의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과 위엄과 거룩함과 자비로우심을 인식했을 때, 가련한 욥은 한 마디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나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 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임을 생각할 때, 할 말이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연구하여 가는 동안,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상태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과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쳤다는 것” 우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는 것, 우리의 혀는, “속임을 베푸는 혀”임을 발견하였으며, “입술에는 독을 머금은 것”을 알았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 찬” 입을 발견하였으며, “피 흘리는데 빠른 발”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의 길에는 파멸과 고생이 있고, 평강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  함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 때, 우리의 입은 침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야만인도, 헬라인도, 죄인임을 발견할 때, 우리의 입은 막히게 됩니다.

온 세상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통 털어서 가리키는 말로써,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정죄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 형벌아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법정으로부터 나온 용어로써 혐의나 고소가 사실로서 드러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은 일언반구의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부터 나온 논증과 사실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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