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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향적인 이들이 더 성실하고 탁월하게 목회하는가?
관리자
- 2505
- 2012-07-10 07:24:06
필자는 2005년 목회신학에 관한 집중적인 관심을 갖게 된 이후에, 목회자의 성격과 목회의 질이 분명히 함수관계가 있다는 감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 데, 목회자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외향적인 성향보다 내향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이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데에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계속해서 이 판단은 후학의 입장에서 교회규모와 상관없이 존경할 수 있는 선배목사님들의 목회를 입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한 이후로 더 확고해 졌다.
2. 그럼, 내향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이 오히려 더 깊이 있고, 탁월한 목회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콰이어트>에서는 이 지점을 부각시켜서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내향적인 성향을 지닌 목회자들은 선동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를 경계하지만,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꼼꼼하고 차분하게 음미하는 목회를 지향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본다.
3. 그러나, 가장 중요한 특징적 지점은 <거리감의 유지와 존중>에 있을 거라는 확신은 더 또렷해져간다. 거리감이 거의 사라진 친밀한 관계는 실은 매우 위험한 관계로 접어든 징후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목회자들이 특히 젊은 시절에 실수를 하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도 바로 이 목회자간에 목회자와 평신도간에 평신도와 평신도간에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실패하면서 발생된다. 흔히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모토는 실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그리고 그 위험한 말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선거결과로 드러나곤 했다. 성찰이나 분별력이 상실된 <우리는 하나>라는 모토는 목회에서 매우 위험한 상황들을 초래할 여지를 두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는 남이다!>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적절한 거리감은 창조적인 긴장으로 공동체를 각성시키고 이 적절한 거리감은 멀어지다가 소원해져서 방치되기 쉬운 상황이 초래되는 것을 감지하고 그 직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4. 외향적인 성향이 목회자에게 끼치는 긍정적인 지점들은 무수히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 탁월하게 자폐적인 복음이 아니라, 열린 복음을 지향하면서 영성집회를 주도하는 이들에게 이런 장점들은 잘 나타난다.
5. 그러나, 고 박정오 목사님(청파감리교회) 말씀처럼 목회의 팔할은 사람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라는 관점에 동의하게 되면, 외향적인 성격과는 또 다른 지평에서 내향적인 성격의 목회자들만이 지닌 탁월성이 접목되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목회신학이 접근되어지고 정립될 여지가 있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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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입니다. 온라인-오프라인 서점에 가게 될 기회가 있으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책과 삶]세상은 외향성을 선호하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이 ‘내면의 힘’으로 세상을 변혁
2012.06.29
▲ 콰이어트
수전 케인 지음·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480쪽 | 1만4000원
‘조용한’ 사람들은 조직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일쑤다. “오늘 회식!”이라는 부서장의 말에 한숨부터 나오고, 억지로 간 회식에서도 할 말이 없어 구석에서 조용히 안주만 축낸다. “왜 분위기 못 맞추느냐”는 동료들의 타박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기도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천근만근 피로가 쌓인다. 학교라고 다르지 않다. 초·중·고교와 대학에서 집단으로 하는 학습 방식이 많이 도입되면서 조용한 사람들은 힘들게 됐다. 가까스로 발표조에 끼어 자기 역할을 해보려 해도, 작고 주저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동료는 많지 않다. 발표 방향에 대해 내심 “이게 아닌데…” 할 때도 있지만, 이미 주도권은 목소리 큰 학생에게 넘어간 상태다. 선생마저 발표를 잘하고 주장이 뚜렷한 학생을 선호하니, 조용한 학생은 더 설 자리가 없다.
수전 케인도 그렇게 조용한 사람이었다. 여름캠프에도 책을 한 가방 싸들고 갔던 이 ‘책벌레 소녀’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 한다”는 교사의 말에 텐트를 나와 뒤뜰로 향했지만, 왜 이상한 춤을 추고 떠들썩한 노래를 부르며 놀아야 하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프린스턴과 하버드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된 뒤에도 고객을 만나기 전날 밤이면 불안, 초조에 시달렸다. 결국 케인은 월스트리트 변호사를 포기하고 작가가 되기로 했다. 그의 첫 책 <콰이어트>는 ‘왜 세상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고, (나같이) 내향적인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자, 비판이다.
세상이 원래 이렇지는 않았다. 가난하고 깡마른 시골 아이에서 탁월한 세일즈맨이자 유명한 대중연설가로 변신한 데일 카네기는 말했다. “피아노와 화장실이 사치품에 해당하던 시절, 사람들은 말하는 능력을 특이한 재능으로 생각하여 오직 변호사나 성직자나 정치가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오늘날 우리는, 첨예한 사업 경쟁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무기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즉 ‘말하는 능력’은 미국식 물질주의, 자본주의의 팽창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 됐다. 19세기에 개인이 가져야 할 자질이 명예, 도덕성, 예절, 진실성 등이었다면 20세기에 개인은 매력, 에너지, 카리스마 등을 보여줘야 했다. 혼자 있을 때도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인격의 문화’에서 타인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신경 쓰는 ‘성격의 문화’로 전환한 것이다.
이후 현대인들은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됐다. 조직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대해 승진시켰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모습을 보자. ‘세상을 바꾸는 지도자들을 가르친다’고 자부하는 이곳을 미국 대통령, 세계은행 총재, 뉴욕시장,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 등이 거쳐갔다. 이곳에서 ‘내향성’은 악, ‘외향성’은 선이다. 모두가 누군가와 어울려야 하고, 심지어 화장실도 팀으로 움직인다. 불완전한 정보밖에 없다 하더라도, ‘지도자는 자신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곳 교수와 학생의 지론이다. 자주, 강하게 발언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확신 있게 말하라. 고작 55%만 믿어도 100% 믿는 것처럼 얘기하라” “수업을 혼자 준비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완벽한 대답을 고민하지 마라. 아무 말도 못하느니 가서 뭐라도 얘기하는 게 낫다”는 것이 흔한 팁이다.
그래서 가끔은 바보 같은 일이 생긴다. 직장 생활에서의 회의 시간을 떠올려보자. 가장 활발하고 말 많은 사람의 의견이 채택됐으나, 결국 모두에게 해로운 결과가 나온 경험은 흔하다. 뒤늦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고 자문하지만, 상황은 이미 끝났다.
2008년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외향성 인간이 주도해서 나온 최악의 상황을 목도했다. 외향적인 사람은 보상에 민감한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경고 신호에 주의를 기울인다. 심리학자들은 ‘보상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보상을 찾는 데 강한 의욕을 보인다고 말한다. 복권이나 도박을 좋아하고, 승진에 강한 의욕을 보이며, 많은 사람과 사귀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이런 보상 민감성은 인간이 용기 있게 높은 사다리로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만, 반대로 명백한 위험을 무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 투자은행 사람들은 FUD(Fear, Uncertainty, Doubt·두려움, 불안, 의심) 위에 빨간 X를 그어놓은 티셔츠와 모자를 맞춰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 사업을 따냈다. ‘사업이 위험하고 투자 전망이 불확실하다’는 의견은 묵살됐고, 이런 의견을 낸 사람은 차츰 월스트리트 바깥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프레젠테이션에 환호하고 비판을 싫어하다가 월스트리트는 파국을 맞았다. 반면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시골에 묻혀 살며 인내하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경고 신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내향적인 노인 워런 버핏은 돈을 잃지 않았다.
현대의 앞서가는 회사들이 채택하는 ‘열린 사무공간’이나 ‘집단 브레인스토밍’도 ‘신화’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창의성과 지적 성취는 시끌벅적한 장소에서 나온다”는 신조 아래 많은 회사가 사원 사이의 칸막이를 없애고,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열고 있다. 그러나 기업에 대한 실제 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시끄러운 도심을 걸을 때보다 숲에서 조용히 산책할 때 더 잘 배운다는 점을 알아냈고, 어느 애플리케이션 회사의 설문 조사 결과 디자이너·프로그래머·작가 등은 자기 사무실만 빼면 어디에서든 일하겠다고 답했다. 어느 심리학자는 광고 기획자들이 집단으로 브레인스토밍을 했을 때보다 혼자 했을 때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심지어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성과는 더 나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협력은 창의성을 죽인다’ ‘고독은 혁신의 촉매다’라고 할 수 있다. 뉴턴, 아인슈타인, 쇼팽, 프루스트, 스티븐 스필버그는 모두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애플의 공동창립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첫 PC를 만들 때까지 늘 혼자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타민족의 손에서 구원해냈던 지도자 모세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끔찍할 정도로 소심했고 말도 더듬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약혼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은 언젠가 내가 글을 쓸 때 옆에 앉아 있고 싶다고 말했죠. 내 말 잘 들어요. 그러면 나는 전혀 쓸 수가 없어요. 글쓰기란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낸다는 뜻이에요. 그 궁극의 자기표현과 투항, 그 순간에 한 인간이 다른 사람과 관계한다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끼고 따라서 제정신인 한 언제나 그런 일에서 움츠러들게 돼요.”
왜 내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일까. 20세기의 손꼽히는 발달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은 오랫동안 인용되는 실험을 했다. 케이건은 4개월 된 신생아 500명에게 녹음된 목소리, 풍선 터지는 소리, 색색 모빌이 움직이는 모습, 알코올 묻힌 면봉 냄새 등의 자극을 주었다. 20%의 아기는 기운차게 울며 팔다리를 휘젓는 ‘고반응’을, 40%는 차분한 ‘저반응’을 보였다. 나머지 40%는 그 중간이었다. 케이건은 이 아이들이 2살, 4살, 7살, 11살에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고반응 아이들은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내향성 인간으로 자랐고, 저반응 아이들은 자신감 있는 외향성 인간이 되고 있었다.
내향성 인간은 사회, 타인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반응성 높은 아이는 난초 같다. 외부 반응에 따라 쉽게 시들기도 하지만, 적절한 조건만 갖춰지면 멋지게 자란다.
물론 성격은 바뀐다. 그러나 저자는 “자유의지는 우리를 상당히 멀리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유전적 한계를 넘어서까지 무한대로 멀리 데려가주지는 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향을 직시하고,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케인은 제안한다.
몇 가지 실용적인 팁이 있다. 인간에겐 ‘딱 맞는’ 수준의 자극이 필요하다. 책을 읽다가 같은 문장을 다섯번쯤 반복해 읽었다는 사실을 막 깨달았을 때, 잠시 일어나 스스로에게 적당한 자극을 주어야 한다. 그 자극이 친구들과의 떠들썩한 대화인지, 혼자 조용히 마시는 커피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성향을 뛰어넘는 일도 할 수 있다. 호숫가에서의 산책을 즐기는 내향적인 사람도 달변의 대중 강연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람은 ‘자기 감시’(self-monitoring)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데, 상황에 따른 사회적인 요구에 자기 행동을 맞추는 데 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마냥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잘 맞지 않는 일을 하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성향상 내향적이지만 외향적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한 ‘회복 환경’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공간을 의미하는 ‘회복 환경’은 한적한 강가, 큰 회의 사이의 휴식 시간, 가족 없이 혼자 머무는 집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콰이어트>가 외향적인 사람을 비난하고 내향적인 사람을 찬양하는 책은 아니다. 게다가 사람의 성향은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다. 사람에게는 두 성향이 모두 있을 수 있기에, 어느 한쪽을 억누르지 않고 긍정해야 한다. 외향성의 남편과 내향성의 아내가 있다고 하자. 남편은 금요일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단둘이 보내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에게 ‘틀렸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성향을 인정하고 절충점을 찾는 편이 낫다.
“사랑은 필수지만, 사교성은 선택”이라고 케인은 말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공감해야 하지만, 그 방식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각자 자신에게 적절한 조명이 비치는 곳을 찾아보자. 누군가에게는 브로드웨이의 스포트라이트가, 누군가에게는 책상 위의 스탠드가 적절할 것이다. ‘반사회적’이란 말은 종종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제 존재의 내면을 들여다보길 즐기고 상황의 변화를 예리하게 관찰하는 성찰적인 사람에게 붙이는 찬사가 될 수도 있다고 <콰이어트>는 말한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