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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혈루병에서 고침받은 여인
관리자
- 2895
- 2012-07-09 09:00:00
레위기 15:25-30, 마가복음 5:25-34.
언젠가 어느 수석 전시회에서 하얀 돌 속에 까만색의 돌들이 박혀있는 수석들과 까만 돌 속에 하얀 돌들이 박혀있는 수석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돌들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기라”고 했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요즘 사람들은 “돌보기를 황금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석 속에 보석이 박혀있다고 하면 얼마나 값지고 가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믿음을 “금”(벧전 1:7)으로 상징하였고 “보배”(벧후 1:1)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믿음을 “진주”와 밭에 감춰진 “보화”로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믿음 속에 믿음”이며 보물 속의 보물이 분명합니다.
마가복음 5:21-43,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데가볼리에서 배를 타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믿음을 가진 회당 장 야이로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회당 장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 중에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 장은 예수님이 계시는 바다까지 찾아와서 초대한 것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회당 장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 앞장섰고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친다고 비난하고 죽이려고 했는데(요 5:18), 야이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가진 행동에 거절하지 않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따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주위에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4)고 설명합니다.
그때 어떤 여인 하나가 에워싸 미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아온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러자 그 혈루 병의 근원이 즉시 치유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의 행위는 회당장 야이로의 사건 속에 기록되어 더욱 돋보이는 믿음을 빛내며 다시 야이로의 딸을 살려준 이야기로 마무리 짓습니다.
12년을 혈루 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이 치유를 받았고, 12세의 죽은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아름다운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 속에서 “보석중의 보석” “보화중의 보화”보다도 더 값진 “믿음중의 믿음”으로 부각되고 있는 여인의 축복된 사건임을 보게됩니다.
① 회당장이라는 직위와 믿음 속에 병들어 소외당하는 여인의 믿음을 봅니다. ② 야이로라는 이름의 믿음 속에 고통당하는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의 믿음을 봅니다. ③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한 남자의 믿음 속에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여인의 간절한 믿음을 봅니다. ④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간절하게 구하는 믿음 속에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줄로 믿로 ale는 여인의 믿음을 봅니다. ⑤ 예수님을 오시도록 초청한 믿음 속에 예수님을 쫓아가 결사적으로 붙잡은 여인의 믿음을 봅니다.
이것만 보아도 믿음의 사람 야이로의 기사 속에 혈루 병든 믿음의 여인의 기사는 가치와 빛을 더해주며 교훈을 더하여줍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회당 장 야이로는 칭찬하시지 않았으나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사는 불쌍한 여인에게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게 놓여 건강할 지어다”하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럼 그 여인은 어떤 믿음이 있었기에 칭찬을 받았습니까?
1. 소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즘 뉴스를 들으면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생활고를 비관하거나 병고에 시달려서 혹은 고독해서 자살을 하기도합니다.
심지어 성형수술을 잘못하여 후유증으로 고민하다 15층 옥상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뛰어내려 죽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외에도 사소한 일들로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을 너무도 단순한 이유로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교하면 혈루 병으로 12년이나 고통 받으며 사람들에게 소외 당하며 살아온 여인은 이미 오래 전에 삶을 포기했었어야 합니다.
날마다 피를 쏟으며 12년을 살아온 여인의 삶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괴로운 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몸에서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습니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가족들과도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받는 고충이 이 여인의 생명을 조여드는 것만 같습니다. 육체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 여인은 결국 수분부족과 영양부족으로 곧 죽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은 이 여인에게 더욱 절망하게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의사들을 찾아 다녔고 재산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좋다는 약방과 유명하다는 의사를 다 찾아 다녔으나 병은 더욱 중해졌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절대로 그의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왔고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파고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결사적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야이로의 집에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포기했지만, 이 여인은 극한 절망상태에서도 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는 믿음입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소망을 않고 꿈을 키워 나가는 사람들은 결코 망하지를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독일 폭격기들이 영국 땅에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런던의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다우닝가 1번지의 지하실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독특한 표정으로 입에 담배를 물고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불타는 런던 시가지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이를 깨물고 다시 들어가서 17시간씩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 처칠경의 위대한 의지는 마침내 영국을 위기에서 건져내었습니다.
1947년 8월 후임 애틀리 씨에게 수상 직을 넘겨주고 그는 찻트윌에 돌아가서 저술생활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처칠 경에게 헬로우의 모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교장은 모든 학생들에게 처칠경의 연설을 하나도 빼지 말고 노트하라고 준비시켰습니다. 마침내 처칠 경이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돋보기안경을 끼고는 옛날 자신이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감개가 무량한 듯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이것이 그 처칠경의 연설이었습니다.
위대한 삶의 푯대를 향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으로 계속 전진하는 생애가 되어야합니다.
누가복음 18:1-8절에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구 하는 과부의 비유에서 밤낮 부르짖고 매일 부르짖어 원한을 이룬 과부를 통해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혈루 증에 걸린 이 여인의 믿음도 참으로 끈질긴 여인입니다.
죽음의 직전에 이르렀어도 고침을 받아야겠다고 하는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소문을 듣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 소문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찾을 때는 의사를 찾을 때 보다 힘도 없고 경제력도 약해졌습니다.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으며 몸도 더욱 쇠약해 졌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증오와 멸시를 받는 자들을 더욱 긍휼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세리들을 맞아 주셨습니다. 창기들을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강도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찾아야 사는 길이 있고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을 붙잡았습니다(27절).
찾아 나온 것만 가지고는 아니 됩니다. 구경하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 확인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예수님도 나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내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생명의 위험을 느낍니까? 예수님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과 두려움이 떠나지 아니합니까? 예수께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고독과 초조 속에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과 동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실망과 실패가 연속됩니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혈루 증으로 앓는 여인처럼 예수님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붙잡듯이, 마지막 차가 떠나려고 할 때 붙잡고 늘어지듯이 붙잡아야 합니다.
혈루 증에 걸린 여인처럼 예수님을 붙잡아야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지난날들의 사정을 모두 고백하는(33절) 기도의 삶이 은혜를 덧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모두 아시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자기의 사정을 아뢰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당신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가운데 돌이켜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인을 보고 싶어서 찾으셨던 것입니다.
혈루 병든 여인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 떨며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지난날에 행복했던 시절부터 병에 걸려서 치료하느라고 고생하였던 12년간의 고통스러웠던 세월들을.......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더니 깨끗이 치유 받았다는 사실들을 모두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칭찬 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회당장의 믿음도 크지만 혈루 병든 여인의 믿음은 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믿음 안에 소망이 이뤄진 것입니다.
2. 생명과 연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회당 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찾아가 초청하는 믿음이었으나 혈루 증에 걸린 여인은 말없이 뒤에서 몰래 따르며 옷을 붙잡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만져주시기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모든 행동을 스스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를 쏟으며 예수님께로 달려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인은 중풍병자처럼 들것에 실려 나아가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자들처럼 멀리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여리고의 소경 바디메오처럼 부르짖고 응답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대신 아뢰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녀는 불편한 몸이지만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힘이 되었던 건강도 물질도 가정도 친구도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남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서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붙잡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거나 망설일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일어서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고보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행함이 없으면 헛수고입니다.
홍수가 나서 온 마을에 물이 들어차 있을 때, 한 사람이 그의 집 2층 창문 밖을 내다보며 배를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태연히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배에 탄 사람이 그에게 “이 배로 와서 생명을 구하시오!” 하자 그는 “아니요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2층에 물이 차게 되자 곧 그 불쌍한 친구는 3층으로 올라가 창문으로 내다봅니다. 다시 배에 탄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생명을 구원하라고 했으나 그는 다시 “아니요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완강히 대답을 했습니다.
층마다 물이 차고 그 사람은 옥상까지 올라갔습니다.
헬리콥터가 날아와 그의 머리 위에서 배회하며 조종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로프를 내려 보내겠소 그걸 타고 헬리콥터로 올라와 생명을 구원하시오”라고 말했으나 그는 “아니요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물속에 빠져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천국 문”에서 그는 베드로 사도를 만났습니다.
“사도님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저는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천국으로 들어가지 전에 제 마음속에서 이 불만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불평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이제까지 하늘의 전능을 굳게 믿어 왔는데, 하나님은 저를 죽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너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그 밖의 다른 대책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배를 두 번, 헬리콥터를 한 번 보냈었다”
야고보 2:13-20,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책망하는 말을 합니다.
아무리 가슴속에 용광로 같은 뜨거운 믿음이 활화산 같이 타오른다 할지라도 그 여인에게 붙잡는 행동이 없었더라면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권능을 힘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스치거나 만지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믿음이요 예수님 안에 소망이요 예수님 안에 사랑입니다. 예수님 안에 삶이 있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신축하고 아무리 전기시설을 잘 했어도 발전소와 전선이 연결이 되어있지 않으면 전기는 들어오지 아니합니다.
전선이 발전소와 연결이 되어있어야 전구에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수도 시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 파이프가 수원지로 연결이 되어있지 않으면 수도 물이 나오지를 아니합니다.
야이로의 딸이 예수님과 접촉이 되지 않을 때 죽어있었습니다.
야이로가 회당장이고 믿음이 있었으며 큰절하고 초청을 하였으나 예수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죽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 훤화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아 “달리다꿈(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서 걸으라)”하시니 곧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혈루 증에 걸린 여인은 스스로 예수님을 붙잡았을 때 생명이 연결되었고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께 붙잡혔을 때 생명이 연결됨으로 살아났습니다.
혈루 병든 여인은 예수님을 붙잡기 전에 많은 사람들과 접촉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도 그의 부모와 훤화하며 슬피 우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접촉과 만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이 많은 사람들과 접촉이 됐었고 만진바 됐을 것이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접촉되고 만진바 되었어도 생명과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을 공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과 접촉이 되어있을 때, 이들에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과의 접촉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접촉은 삶을 얻습니다. 생명의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혈루 병으로 앓던 여인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여자가 14-16세가 돼야 월경을 하는데, 결혼생활 후에 혈루 병에 걸린 것을 본다면 12년이라고 했으니 36세 전후의 여인이 아니었겠나 짐작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이 죽었다고 했으니 이 여인은 야이로의 딸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혈루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야이로의 딸이 회당장인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귀엽게 자라는 기간에 이 여인은 혈루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동안 이 여인은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가족들과도 헤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부모에게서 신앙을 배우며 사는 동안 이 여인은 회당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아버지의 지위의 보호로 약방과 의사들의 왕진을 받는 동안 이 여인은 약방과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시달린 채 살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병에 걸려 부모와 친지들의 문안을 받는 동안 이 여인은 가족들과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회당 장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인정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38절에서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고 슬퍼하며 위로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의 형편은 마치 거지 나사로와 자색 옷을 입고 호의호식하는 부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야이로의 딸은 집안에서 침상에 누워 예수님을 초청하여 치료를 받으려 했으나, 이 여인은 길에서 병든 몸으로 예수님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간호와 위로를 받았으나, 혈루 병든 이 여인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었으나 정면에서 예수님의 손에 붙잡혔는데, 이 여인은 죽음의 직전에 예수님의 뒤로 가서 스스로 옷을 붙잡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의 손을 통하여 능력이 나갔으나, 혈루 병든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통하여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으나, 혈루 병든 여인은 위독한 중에서 병의 근원이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능력이 앞뒤의 구분이 없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손이나 옷이나 차이 없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병의 증세와 경중의 차이가 없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장소에 구애됨이 없고 신분의 차이도 없이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든지 붙들리든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어떤 형편에서든지 예수님과 접촉이 되어야 합니다.
야이로의 믿음도 크고 놀라운 사람이지만 병든 여인은 야이로 보다 더 훌륭하고 더 끈질기고 적극적인 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만약 이들이 고난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죽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훤화하며 우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 저희는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것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고 하여도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