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난해 성구:...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관리자
- 1988
- 2012-07-13 05:26:39
인사와 자기소개를 마친 바울은 본론에 들어선다. 그는 대체로 본론을 시작할 때에, 편지를 받는 대상에 대한 감사(고전 1:4, 살후 1:3) 및 감사와 기도(롬 1:8-9, 살전 1:2, 빌 1:3-4, 골 1:3, 딤후 1:3, 몬 1:4)를 나타낸다. “특히, 널리 퍼진 당파 정신과 날카로운 비난을 받게 하는 중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애정 어린 말을 하고 심지어 감사의 말을 한다.
그러나 본서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을 떠나는 근본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므로, 만일 그대로 허용된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E. H. Perowne).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본 서신에서는 감사 또는 기도 대신에,【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온화하기는 하나 책망과 비난으로 시작하는 것이다”(M. Luther, J. Calvin, E. Huxtable).
黑崎幸吉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이 변절한 것에 대해 참지 못했다.”고 하며, 이상근 님은 “격렬한 질책의 말을 퍼붓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바울이 격렬하게 분개한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시킨 유혹자들에 대한 것이었다”(M. Luther, S. J. Mikolaski). 이 사실은 바울 자신의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그는 유혹자들에 대해서는 저주를 말했으나(8절 후반, 9절 후반), 변절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는 이상히 여기노라(6절 후반)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설1)과 그리스도라는 설2)이 있다. 루터(M. Luther)는 “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H. Alford, “Chrysostom”(in 이상근), W. Sanday, J. B. Lightfoot, E. D. Burton, M. Henry, E. Huxtable, R. T. Stamm, W. Barclay, C. R. Erdman, F. Rendall, 黑崎幸吉, 윤성범.
2) M. Luther, J. Calvin, “Jerome, Grotius, Olshausen”(in 이상근), J. A. Bengel, R. C. H. Lenski, 內村鑑三.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로 앞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과 동등하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자요, 또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이라고 했기 때문에 부르시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주장하였고, 렌스키(R. C. H. Lenski)도 로마서 1:6을 들어 갈라디아인들을 부르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진술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훅스타블(E. Huxtable)과 스탐(R. T. Stamm)이 잘 지적한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을 부르시는 것은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진다(1:15, 롬 4:17, 8:30, 9:12, 24, 고전 1:9, 7:15, 17, 살전 2:12, 4:7, 5:24, 살후 2:14)는 점과, “부르다(칼레인, καλείν)라는 말은 바울의 용법으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사용하였지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윤성범)는 점과, 로마서 1:6의 “그들과 함께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공동 번역)라는 말씀은, 5절의 “······사도직을 받은 것도 그분을 통해서였습니다”(공동 번역)라는 말씀과 7절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셨습니다”(공동 번역)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렇다 할 의미가 없다는 점 등으로 보아, 부르신 이를 그리스도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즉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목적은 “칭의, 화해, 영생과 내세의 행복과 같은 최대의 복과 유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M. Henry).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 안에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R. T. Stamm).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사랑에 대해 인간이 할 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있는 일이란, 다만 깊은 감사와 감격에 넘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적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보여 주신 사랑의 행위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망각하고, 이같이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속히 떠나”가 거짓 교사들의 유혹을 받자 이내 떠난 것인지(Chrysostom, De Wette),1)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고 떠난 후 곧 떠난 것인지(J. A. Bengel), 그들이 회개한 후 이내 떠난 것인지(H. Alford)가 문제가 된다. “속히 떠나”라는 말 앞에 “너희를 부르신 이를”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회개한 후 속히 떠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
“떠나”(메타티테스테, μετατίθεσθε)는 현재형 수동태로, 그 유혹과 그로 인해 배교하는 일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배교 도중에 있기는 하나, 아직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단계에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을 그토록 빨리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복음”은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준 보상(Homer, W. Hendriksen, 마경일)과 전쟁에서의 좋은 소식(E. Schweizer)을 뜻하였고, 여기서 왕자의 출생이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이상근.
2) M. Luther, J. Calvin, J. B. Lightfoot, R. T. Stamm, E. Huxtable, S. J. Mikolaski, 黑崎幸吉,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황제의 즉위의 고지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의 경우에는 하나님에 의해 파견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인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도 포함되는 것이다}(막 1:1의 주석).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죄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철학 체계,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 그리고 어떤 생활양식의 형태에 대한 훌륭한 충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C. R. Erdman).
바울을 통해 이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끌려 다른 복음을 좇고 있었다. 칼빈(J. Calvin)은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한다고 주장했으나, 거기에 그들 자신이 고안한 것들을 섞음으로써, 복음의 주요한 힘을 파괴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거짓되고 부패하고 위조된 복음을 주장했다.”라고 하였다. 거짓 교사들이 구원의 조건으로서 첨가한 내용은,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모든 관습과 규례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의 노력과 행위에 의해 의,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도우(J. Dow)는 “만일 인간이 완전한 율법 준수에 의해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신의 은총은 불필요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무의미해진다. 만일 인간이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들은 그들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를 의존해야만 한다.”라고 함으로써, 율법 준수에 의한 구원이란 믿음에 의한 구원과 양립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전혀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위장하여 가르친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간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루터(M. Luther)는 “이단자는 오류 혹은 마귀라는 꼬리표를 달고 오지 않는다. 또한, 마귀 자신도 마귀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 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3-14)라고 경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을 통한 사단의 간계에 의해 많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당했지만,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은 바울은 단호하게 그들의 간계를 논파한다. 즉, 그들은 복음이라고 주장하여 가르쳤으나,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한 마디로 ‘다른 복음’이라고 단정짓는다.
“다른”(헤테론, ἕτερον)은 질적으로 전혀 상이한 것을 의미하므로),1) “다른 복음”이란 사실상 복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히 여기노라”는 타위마조(θαυμάζω)로서, ‘이상한’과 같이 괴롭게 느끼는 것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실망시키는 어떤 일을 의미한다(S. J. Mikolaski).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가장 큰 놀라움과 슬픔과 불쾌와 고통으로 얼룩졌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