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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의 자식들
관리자
- 3628
- 2012-07-16 02:24:49
시편 140:1-5, 누가복음 3:7-14.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위해 모여 오는데 버라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당시에 권위 있는 위치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정면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일반 계층도 아니요 중산계층에 속하며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하였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모독이요 멸시의 말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뜻은 “성별된 자”라는 말로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고 철저히 지켰으며 경건한 생활을 하여 조상들의 전통, 즉 장로들의 유전을 중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구약 중간기와 신약성경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정신적 보존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①역사는 신적 목적에 의하여 신적으로 다스려 진다고 믿었습니다. ②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고 인간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상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③바리새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④종말에 대한 희망과 지상 낙원을 믿었습니다. ⑤메시야의 도래를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23:8절에 보면 바울도 바리새파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주의 또는 율법주의적 엄격주의 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율법해석에 있어서 엄정성과 철저한 고수가 유명했다고 합니다.
사두개파들은 귀족에 해당하는 대제사장의 가족들로 이들의 관심은 성전에 집중되어있고 바리새파들과는 반대되는 견해와 관습을 가지고 율법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율법을 준수하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다윗 시대의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고 솔로몬이 대제사장으로 삼았던 사독(왕상 2:26)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두개파는 하나의 제도로서 유대교의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측면에 치중하였고 성전과 그 제사장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사두개파인들은 로마의 지배아래 있을 때, 때로 마지못해서 로마의 행정관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생활을 칭찬하지 않고 왜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의 욕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과 위선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고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형식과 외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외모는 뱀의 껍질처럼 매끈하고 번듯하여 거룩하고 아름다웠으나 그들의 속은 독을 가득 품고 음모와 술수로 가득찬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뱀과 독사의 껍질은 윤기가 흐르며 매끈매끈하고 아름답습니다.
뱀들은 소리 없이 접근하고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쉬지 않고 두 갈래의 혀를 날름거리며 상황을 파악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접근하고 약한 것들을 단숨에 물고 독을 쏘아 통째로 삼켜버립니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외형과 내실이 다른 자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 책망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하였습니다.
남에게는 거룩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온갖 더러운 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향해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화 있을 진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 화 있을 진 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기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화 있을 진 저, 화 있을 진 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들은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 뱀은 최초의 인간 인류의 조상 하와를 속였습니다.
하와를 속여 인류에게 범죄 하게 하였는데 말세에도 성도들을 유혹하고 괴롭히며(계 9:19), 죽이며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계 12:9). 그러나 그 뱀은 결국 천사에게 붙잡혀 큰 쇠사슬에 묶인 채 무저갱에 1천년 동안 던짐을 받게 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계 20:2).
속이는 뱀의 정체는 기어이 드러나 무저갱에 던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뱀과 같이 속이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몰몬교, 여호와 증인, 통일교의 문선명, 일가공회의 양도천, 신천지 등 등.......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까?
1. 간사한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였습니다.
뱀의 혀는 두 갈래로 갈라져서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을 뿌리듯 계속 날름거립니다.
야고보 3:7-12,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간사한 자들은 한편으로 친절한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냉혹합니다.
그 혀는 두 갈래로 갈라진 뱀처럼 이곳에서는 이 말을 하고 저곳에서는 저 말을 하며 이간을 붙이고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뱀의 기어 다니는 모습만 보아도 이리 저리 꿈틀거리며 기는 모습은 좌우로 허리를 흔들며 어느 편에나 잘 적용하는 것 같고 융통성이 있는 것 같지만 자기의 목적만을 찾아 이기적인 욕심만을 위해 좌로나 우로 비위를 맞추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담대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사랑이라도 나누려는 듯이 포옹을 하지만 먹이의 숨통을 끊고 질식시켜서 통째로 삼키기 위함입니다. 약한 자들에게 소리 없이 접근하고 강한 자들에게는 소리 없이 뒤돌아 도망을 갑니다. 간사하고 부도덕한 자들은 이렇게 뱀처럼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미워하고 협력하는 것 같으면서 분쟁을 일으키며 충성을 하는 것 같으면서 불성실하고 경건한 것 같으면서도 부패합니다.
입으로는 사랑하면서 행동으로는 미워하고 입으로는 구제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인색하며 물욕에 탐하는 자들입니다.
세금이 들지 않으니까 말로만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신을 하는 자들입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친절한 사람입니다.
가장 두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칭찬하는 사람입니다.
아담을 넘어뜨린 사람이 그의 아내 하와입니다.
모세가 첩을 얻었을 때, 비난한 사람이 그의 누이 미리암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제자 가룟인 유다이며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씨저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사람이 그의 친구 부루터스 였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타락하게 한 옛 뱀, 사탄 마귀의 간교한 수단과 유혹으로 넘어간 독사의 독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관계는 불안합니다.
성령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믿음의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고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물욕에 치우친 인색한 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했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무리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사치와 연락에만 치우친 자들을 향하여 요한은 책망하였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문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가 개들에게 시달리며 고통을 당하는 데도 무관심하며 살았습니다.
그 부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뜨거움과 목마름으로 탄식하며 후회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죄가 되어서 창조주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신명기 14:29, “고아와 과부들을 배불리 먹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주는 종교이며 나누는 종교이며 불쌍한 자를 돌보고 베푸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첫째는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나오는 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인색한 부자처럼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책망하였습니다.
부자들에게 “두벌 옷이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합니다.
아모스 8:4-8, 에서 선지자도 인색한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것을 탐낸다고 책망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급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고 피하여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정성을 다해서 치료해주고 돌보아준 어떤 사마리아 사람을 더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사에게 너도 이와 같이 알고 있는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공평치 못하고 부정한 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했습니다.
정당하고 공평한 율법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공평해야 할 자들이 정도를 무시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양심을 속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착복하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법을 잘 아는 자들이 오히려 법을 이용하여 약한 자들을 협박하고 착취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이기에 안간힘을 쓰는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공평한 것을 원하십니다.
자신이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남을 속이고 공평치 않은 저울추와 이중 되와 말로 사고파는 자들을 저주하십니다. 당을 지어 분당하며 편당하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신명기 1:16, “재판할 때 양방 간에 공정하게 하라” 25:15, “공정한 저울추를 사용하라” 예레미야 5:28,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라” 에스겔 45:9, “공평과 공의를 내 백성에게 행하라” 했습니다. 재판장이 부자에게 뇌물을 받고 가난한자의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을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미국의 법원 앞에는 한 손에는 공평한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쥔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법이란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고 만약 부정부패한 것은 단호하게 칼로 잘라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공평하게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4. 권력으로 약한 자를 울리는 자들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시는 것은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권력을 잡으면 만족하고 감사하기는커녕 교만해지고 패역해 집니다. 그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에게 강포하며 무소함으로 독사의 자식들로 변하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권력의 축이 되는 자들 앞에서는 양과 같고 갖은 교태를 부리면서 일부 계층들에게는 배도하며 무례합니다.
권력을 과시하려는 듯 폭행하고 강제로 착취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권력을 잡은 자들을 보면 권력을 얻기 전에는 갖은 감언이설로 사회와 국가와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하겠다고 공약합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잡고나면 온갖 방법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하고 만용 함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좌절하게 합니다.
힘없는 서민들을 권력의 힘으로 짓밟고 울리고 빼앗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자들을 책망합니다.
정한 봉급에 만족하지 못하고 착취하고 부정하게 치부하는 자들이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불쌍한 자들 서민들과 협력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군병들에게 책망을 한 것입니다.
사랑과 축복의 말씀만 폭포수같이 흘러나와야 할 선지자의 입에서 이처럼 무서운 저주와 책망이 왜 쏟아져야 합니까?
그것은 군병들의 생활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저주와 책망에서 피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입이나 혈통이나 외모의 모양이나 형식으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었어도 자신이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의 성직을 감당하는 제사장이라도 봉사 직으로 선택된 레위인이라도 성전에서 충성하듯 세상에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입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봉사하며 성전에서 충성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행동의 거룩함이나 예배의 경건함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외형적인 육체의 아름다움이나 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걸음을 느릿느릿 걷고 긴 옷을 입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얼굴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관계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족보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 외치는 수많은 충성, 봉사, 헌신, 구제, 사랑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실속 없는 흉내도 가치 없습니다.
확신 있는 신앙이라야 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갈 5:21-22).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변화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희랍 신화 중에 프로메티우스와 에피메테스라는 이름의 신들이 등장합니다.
프로메티우스는 “생각하다” “조급하다”는 뜻으로 즉시 행동한다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대로 프로메티우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를 속여 불을 훔쳐다 인류에게 전했다는 전설적인 영웅입니다. 그러나 에피메테스는 뒤에 생각하는 신의 이름입니다. 에피메테스는 뒤에 생각만 하고 머뭇거리다 인류에게 아무 공헌도 한 것이 없는 신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프로메테스 적입니까? 에피메테스 적입니까? 즉시 행동합니까? 망설이기만 합니까? 이미 도끼는 나무뿌리에 놓여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도 족보와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후손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들 수 있다고 요한은 외칩니다.
여기서 돌들이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말합니다. 천하고 쓸모없는 인간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쓸모없는 인간들도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돌들로도 거룩하고 귀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십니다.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혈통도 후손이 되지 못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기에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에 따라 구원받느냐 멸망 받느냐 좌우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심판이 다가온 것입니다. 위기에 놓인 나무와 같이 심판이 눈앞에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열매의 여부에 따라 도끼의 재앙이 내려질 것입니다. 긴박한 심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혈통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열매가 없으면 심판의 도끼에 찍히는 것이요 돌 같은 죄인과 창기와 세리라 할지라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열매를 맺으면 정성스럽게 가꾸어지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가온 심판 앞에 당신은 열매가 있습니까?
열매가 있다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면 속히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혈통도 방심하면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어떻게 맺어야 합니까?
그들은 요한의 무서운 책망에도 부인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핑계대지도 않았고 거역하지 않았으며 항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책망과 저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책망하고 채찍질하는 사랑의 채찍질로 요한의 책망을 받아 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요한의 책망을 받고 분내고 돌아섰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고 저주를 받아 뿌리부터 말라죽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요한에게 열매를 맺을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부자들에게 말합니다. “옷 두벌 있는 자들은 옷 없는 자들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인색하고 사랑이 메마른 부자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여 나누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돌아보며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는 여유와 덕을 지니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리들이 요한에게 물어 왔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오리까?” 물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질문입니다. 요한은 “정한 세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습니다. 남은 고난과 어려움에 처해도 자기만 부자가 되면 그만 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이들에게 과도한 방법으로 재물을 빼앗지 말라는 말입니다.
합법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하되 억울하게 착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심을 속이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고 마음의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울리며 그릇된 방법으로 자기 돈 전대만 부풀리려고 욕심 부리는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평불만보다 주어진 일에 만족하며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작은 것을 가지고 만족하면 부자이고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만하면 가난한자 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군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합니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료를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힘을 의존하여 악질적인 행동으로 미워하고 참소하고 고소하며 위협하여 착취하는 월권행위를 금하라는 것입니다.
뇌물과 부정 축재를 금하라는 것입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정당한 법에 의존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남용하여 남에게 착취하며 고소하며 빼앗고 도적질하는 자들에게 악랄한 행위를 금하라는 것입니다.
주는 봉급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악랄한 행위를 버리고 선한 신앙양심으로 살 때, 그것이 열매 맺는 삶이요 축복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