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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 성구:행위(양심,윤리,종교)와 믿음과 믿음의 행위(약 2:20-22)
관리자
- 2128
- 2012-07-17 21:00:37
먼저, 그는【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자를 가리켜 허탄한 사람이라고 일컫고,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리켜 헛것이라고 단정한다.
“허탄한”은 케네(κενέ)이며 내용이 없이 텅빈 것(G. R. Berry, 黑崎幸吉),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M. Henry). 또, 이 낱말은 ‘열매 없는’, ‘효력 없는’ 등의 뜻을 갖고 있다(G. R. Berry). 이로 미루어 허탄한 사람이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헛것”은 아르게(ἀργή)로서 쓸모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黑崎幸吉).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쓸모없는 믿음이며, 따라서 없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명백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대표적 인물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구절은 창세기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黑崎幸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무를 시험하시어(창 22:1)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보시고 이를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로 삼아 기뻐하시고(창 26:5) 이 행위로써 그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셨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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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행위가 믿음의 증거라는 점이다(C. R. Erdman, W. Barclay).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데(창 15:6), 그 믿음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는 행위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근 님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바치신 속죄의 그림자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의 시험으로서의 요구에 대한 복종이었지, 속죄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은 아니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할 때, 그 행위는 결코 율법적인 의미에서의 행위나 일반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어디까지나 믿음에 근거한 행위이며, 믿음에 따르는 행위이다. 이 사실은 야고보 자신의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헨리(M. Henry)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었고, 행위를 초래했으며, 그리고 행함으로 완전해졌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근 님은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여야 한다. 또한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난 것이지 단지 율법적이나 수양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즉 믿음 자체가 이미 행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박윤선), 아니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행위가 따라나오게 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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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대해서 黑崎幸吉이 잘 설명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한 마음에서 나고, 믿음에서 나는 행위는 마음에서 밖으로 역사한다. 참 믿음은 반드시 이 두 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아직 행위로밖에 나타나지 않은 믿음이(이것과 행위로 나타날 수 없는 죽은 믿음<17절>과는 천양지차다. 이 차이에 주의하라.) 믿음의 본질로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사람이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8). 그러나 이 믿음이 그 역사를 나타냄으로써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며(곧 온전케 되다.), 본질과 활동을 갖춘 뜻에서의 완전한 것이 된다.”
칼빈(J. Calvin)도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행위들로부터 그의 온전을 끌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들이 믿음의 참된 특질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부름 받기 이전에 윤이 났다.……야고보는 다만 아브라함의 온전함이 그의 믿음의 현저한 결실이 드러난 그 행위 안에서 확실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여 같은 의미의 해석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믿음에 행위가 따름으로써 그 믿음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난해 성구 사전 2권\\', \\'야고보서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