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고"

관리자
  • 1970
  • 2012-07-18 09:00:00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고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나라 전설가운데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 먹고 사는데, 호랑이는 성질이 급하여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고, 곰은 참고 견뎌서 웅녀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 웅녀가 우리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곰의 후손들이나 하는 말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만약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지금도 곰을 잡아서 쑥과 마늘만 먹여서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또 그런 일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 곳에서도 그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전설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 전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과학적 논증도 창조설도 신학의 증거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전설이라는 “인큐베이터”속에서 숨 쉬는 신생아들일 뿐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율법주의자들 역시 율법이라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인공 젖꼭지를 물고 있는 신생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인큐베이터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혈을 체험하는 날, 비로소 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한 때는 그들과 마찬가지의 생애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율법주의로 무장되어 제사장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한 가지로 뜻을 같이 하였고, 예수 주의를 외치는 사도들과 스데반을 제거하는데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벗어나는 행동과 유대교를 믿지 않고 신흥종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들은 모두 율법의 반역자요, 신흥 이단사이비종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데반이 성 밖에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을 때, 그의 옷을 맡아 보았던 사울도 찬성하였고, 그 후에 율법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된 후에는 그는 율법의 인큐베이터를 단호히 벗어나서 영적해방을 체험하였고, 가는 곳마다 담대하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직까지도 율법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리석고 초등학문에 심취되어 있는 것을 안쓰럽게 까지 여기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인들을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율법 안에 사는 삶은 행위로 구원 받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율법을 주시지 않았고 구원의 방법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죄를 사하고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있다면, 독생자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내어 주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이 인간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도 하지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앞의 문장을 설명하며 뒤에 문장을 연결시키고 있는 말입니다.
  앞 문장의 결과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앞의 문장을 보완하며, 더 심도 있게 논리를 전개해 가려는 의도가 있어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변명의 의지가 없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규정하는 것은,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죄를 깨닫게 되는 까닭입니다.

율법의 행위
  이 말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바울의 용어로, 신앙과 상대되는 말입니다. 율법의 요구에 따라 그대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을 마음에서가 아니라 행위로 나타내어 보여주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의롭다 함을 나타내려는데 있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했으나,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지킨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는, 성경에서 찾아보려면 부지기수로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맹공을 가하고 계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달려 나온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사탄의 무리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아귀 다투듯 하는 것을 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율법보다는 사랑을 더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보다 사랑을 더 강조하시고 율법의 완성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앞에
  율법을 제정하시고 인간에게 전수 시키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창조주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전수하셨으나, 율법을 전수 받은 인간들은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들을 낳으면 백일이나 돌 때 상에 떡과 고기와 실타래와 붓과 먹을 종이와 함께 놓아둡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느 것을 잡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떡과 고기를 집으면 먹을 것이 풍족할 것이고, 실타래를 집으면 명이 길 것이고 붓이나 먹이나 종이를 집으면 공부에 전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앞에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얼마나 율법을 주신자의 의도를 알고 율법을 지키는지, 아니면 의미 없이 형식에 따라 상에 놓인 물건들을 집어 올리는 어린아이의 행동과 같이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들의 모든 위선과 형식의 행동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성품을 판단하시기 위하여 재판관으로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과 정직으로 나아가야지 남이 장에 간다고 자기도 거름지고 따라나서는 꼴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이 낱말은, 신약에서 39회나 사용되고, 그중에서도 27회가 바울 서신가운데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8회, 야고보서에 3회, 요한계시록에 1회가 나옵니다.

  이 말의 고전적인 의미는, 법정에서 옳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 죄가 있을지라도 옳다고 인정하는 선언을 받으면, 그의 불의는 용서를 받는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재판의 재판장은 예수님께서 맡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죄가 없다.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거역하겠느냐? 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시기에 그 앞에는 불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기사가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들에게는 발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보혈을 흘리고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죄 사함도 구원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만이 장차 만인을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주의 선언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으십니다.

육체가 없나니
  직역하면 모든 육체입니다. 육체란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육체는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육체는 땅에서 살고 그림자가 있고 허물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이 더럽고 추한 육체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상처를 당하면 아프고 피가 흐르고 고통을 느끼듯이, 모든 육체는 자기의 죄 값으로 형벌과 고통과 고난을 받고 심판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들의 육체의 죄를 씻으시기 위하여 먼저 발을 씻으셨고 멸시를 당하셨고 고난을 당하시고 가시관과 쇠못에 박히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모두 흙입니다. 아무리 지혜 있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영광스러운 사람들도, 육체의 근본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생명이 끊어지면 아골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들과 같이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기에 살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생명을 거두신다면 다시 흙덩이로 돌아가고야 말, 마른 뼈다귀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창세 이후로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만이 육체를 지닌 채로 하늘나라에 승천하였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신령하고 변화 받은 육체가 아니면 육체를 지닌 채로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육체로 들어 갈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도 유대인도 율법자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사도도 모두 육체로는 이 땅에서 흙으로 끝나고 마는 피조물들인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해준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아니고는 죄가 죄인 줄을 몰랐습니다. 식인종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죄 인줄을 몰랐으나 율법이 그들을 죄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랍권에서 일부다처주의가 죄 인줄을 몰랐지만, 율법은 그것이 간음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남의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죄 인줄을 몰랐으나, 율법이 그것은 도둑질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자기 양심대로 자기들 마음에 좋은 대로 행동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인들의 이교 권에서 우상을 섬기고 범죄 함을 배우고 살았을 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제각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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